발칸반도 여행(1) - 보스니아 / 행전 박영환
2018년 6월 22(금), 발칸반도 첫 여행지인 보스니아에 들어섰다. 먼저 들린 곳은 수도 사라예보이다.
10시간 정도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에 내려 비행기를 갈아탔다. 1시간 뒤에는 내린다는 예고가 있었지만 막상 사라예보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안개가 너무 심하여 몇 바퀴를 돈 뒤에 겨우 내려 한 동안 긴장을 했다.
이곳은 1973년 4월 개최된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정현숙 선수 등이 여자단체전을 석권하여 처음으로 한국탁구가 세계제패를 이룬 곳이다. 승전보를 알리던 아나운서의 감격하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 뒤에도 1984년에는 이 도시에서 제14회 동계 올림픽이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도시는 그런 것으로 설명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아픈 상처가 있는 곳이다.
발칸 반도의 화약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상흔 - 지중해와 흑해 사이에 있는 발칸 반도는 흔히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고 불린다. 고대부터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종교와 문화가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어 갈등과 분쟁이 그치질 않았다.

보스니아 - 정식 명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으로, 발칸반도의 서남부 아드리아해 연안에 위치하며, 해안선의 길이는 20㎞이다. 면적은 5만 1197㎢, 인구는 386만 7055명(2015년 현재), 수도는 사라예보(Sarajevo)이다. 주민은 이슬람인 44%, 세르비아인 31%, 크로아티아인 17%로 구성되어 있으며, 언어는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사용하고, 종교는 이슬람교 40%, 세르비아 정교 31%, 가톨릭교가 15%이다.
3인의 공동 대통령은 8개월씩 윤번제로 정권을 담당하며, 그 아래 총리는 내각을 이끌고 있다.

이상하게도 사라예보 시내를 관통하는 밀야츠카 강물의 색깔이 붉은 황토색이다. 흡사 핏물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나만의 생각일까. 근래 비가 많이 와서 황톳물이 많이 유입되었다하지만 왠지 자꾸 그렇게 느껴졌다.
현지 교포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을 했다. 이곳에는 10명의 교포가 있는데 이집 식구가 6명이니 전교포의 60%를 자기 집이 차지한다고 농담을 했다. 이곳에서 자라도 한국말이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집에서만은 꼭 한국말을 사용하게 한 덕분이라고 한다.

발칸 반도의 국가들을 종교와 문화적 기준으로 크게 가톨릭 문화권(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그리스정교 문화권(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불가리아), 이슬람 문화권(알바니아)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에는 그리스정교와 이슬람교가 섞여 있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약칭 보스니아에는 가톨릭교, 그리스정교, 이슬람교 세 종교가 섞여 있다는 데서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다.
세르비아를 주축으로 한 구유고연방에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1991년 크로아티아를 침공하였다.
다음해 보스니아마저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반군을 지원하였고, 크로아티아 역시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계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에 의한 '인종 청소'가 곳곳에서 자행되면서 내전 4년 동안 25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인구 400만 명 가운데 40%가 난민이 되는 등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가 암살 당한 라틴 다리>
황태자 부부 암살은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일어났지만 암살을 위한 모든 계획은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검은 손’으로 불리는 암살의 배후조직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통일이냐 죽음이냐’라는 이름의 비밀결사 조직원들이었다. 페르디난트 부부의 테러 발생 후 한 달이 지났을 때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럽의 세력 균형을 와해시켰고,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군부의 총사령관 자격으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부인 조피 호테크와 함께 1914년 6월 군대를 사열하기 위해 보스니아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그런데 이날 1914년 6월 28일은 공교롭게도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열네 번째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 페르디난트는 1893년 합스부르크-로트링엔 왕가의 궁정 시녀로 일하고 있던 보헤미아 백작의 딸 조피 호테크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신분의 차이로 인해 황제와 궁정 관료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그가 낳을 자녀들의 상속권을 포기한 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날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황태자 부부를 위한 환영식이 계획되어 있었다. 이 환영식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엄청난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유는 이 6월 28일이 중세 세르비아 왕조가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 페르디난트 부부가 탑승한 차가 사람들 사이로 지나갈 때 한차례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이때 폭탄 테러로 황태자 부부를 영접 나온 오스카 포티오레크 지사와 메리지 중령이 약간의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테러로 인한 피해가 경미했고, 거기에다가 황태자 부부의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단독범의 소행으로 판단하고 행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11시가 되기 전 시청 환영행사가 끝나면 나머지 일정은 그만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차량 담당자들에게 전달이 되지 않는 통에 황태자 부부가 탑승한 차량은 순서대로 다음 행사를 위해 대성당으로 향했다. 바로 그 때 페르디난트 부부를 향해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총구를 겨누었다. 총알은 페르디난트의 목을 가격했고, 또 다른 총알은 부인의 복부를 관통했다. 결국 황태자 부부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게 되었다.

<전쟁의 상흔을 잊지 못하고 있다. - 선명한 핏자국으로 기억하고 있다.>
너는 기어이
깊은 뼛속에 핏자국을 남기고 말았다
미움과 저주
돌이킬 수 없는 앗고 앗는 붉은 총성
황태자 부부가 쓰러지고
내 편 네 편 또 건너 편까지 엉키어
천 길 나락으로 안고 또 뒤집어
태풍을 만들었다
광장에 쌓인 죽은 사랑의 벌거벗은 불협화음
종교도 인종도
앞뒤 섞여버린 미로
한 세기가 마구마구 짓밟힌
통증 그 이후
라틴 다리는
안개구름이 훑고 간 동공의 눈물샘
죽음을 복제한 무늬들이 검붉은 녹물을 안고
아직도 뒤쪽 풍경을 만들고 있다.
(행전 박영환 '라틴 다리'-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오스만술탄 제국의 유적지>


<길거리 체스>

<1899년에 건축된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건물로 보스니아 성당 중 가장 큰 규모이다>

<교황 요한 바오르 2세 동상>

<식당 벽 시렁 위에 예스런 모습이 연출되었다 -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

<길가의 과일점>

세빌리 샘
바슈카르지아 광장의 한복판에 있는 오두막 모양의 샘이다. 1754년 처음 만들어졌으며 1852년 한차례 화재로 인해 전소되었다가 다시 1891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이 물을 마시면 그 어디를 가더라도 다시 돌아 올 수 있다는 전설이 있어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수제품 골목>

가지 후스레프 베그 모스크
사라예보를 대표하는 이슬람식 건축물로 당시 보스니아를 통치하던 ‘가지후스레프 베그’의 지시로 1530~1531년에 거쳐 완성되었다. 이 사원은 보스니아 내전 중에 많이 파괴되었지만 중동지역의 이슬람 국가들의 지원 덕에 1996년에 모두 복원되었다. 이 사원을 창설한 ‘가지 후스레프 베그’는 보스니아 지역을 통치했던 터키인으로 모스크와 학교, 도서관등 많은 공공시설들을 짓는 등 업적을 남겼다. 이 사원의 정원에 이 분의 시신을 안치한 석관이 있다.
모스크 입구에는 5개의 문이 있는데 남성, 여성, 성직자들이 출입하는 문이 정해져 있다.

신도들이 모스크에 입장하기 전 씻는 샘이다.

사라예보에서 모스타르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한 컷 잡았다.

사라예보를 출발할 때만 해도 날씨가 좋았는데 모스타르에 도착하자 강한 빗줄기가 덮쳤다. 가게 앞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으나 장대비는 쉽게 하늘을 내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강행군을 했다. 그러나 다행히 길바닥이 전부 돌로 되어 있어 흙물은 피할 수 있었다. 이쪽 지역은 대부분 길이 돌로 바닥을 깔았다.

<벽의 살속에 깊이 박힌 탄흔이다. 전쟁의 아픈 기억을 잊지말자고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

그래도 이곳 네레트바 강의 빛깔은 푸르다. 다행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스타리 모스트(오래된 다리)
'화려한 황제' 쉴레이만이 건설한, 과거와 미래를 결합해 주는 다리
얼마나 아팠을까
혹독한 내전의 화마 속
포탄의 세례로 무너져
그는 마른 뼈 조각을 안아 떨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슴을 두드리며 외쳤다
“이건 아니야, 이럴 수 없어”
이 오래된 다리는 보스니아의 역사를 감싸고 있었던
모스타르의 긍지요 존재 이유이었기에
나라가 포위되어 공격을 당하면서도 국가적 애도를 선포하지 않았던가
하여 무심하게 흐르는 가슴 먹먹한 잔인한 세월
그 기다림의 끝
이럴 때도 있구나
드디어 그가 다시 왔다
잔혹한 핏자국을 지우고
과거는 품고 미래가 다독여
둥글게
무지개 아치 높이 쏘아 올렸다
저기 보라
은과 소금을 가득 실은 마차가 여명을 뚫고
달려오고 있다
추억은 옛날의 그 영광
지킬 것은 미래의 발전과 번영
화려한 황제 쉴레이만의 깊은 호흡이
네레트바 강 위에 푸른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 행전 박영환 '스타리 모스트' )

1993년 11월 9일, 1991년부터 유고슬라비아를 집어삼켰던 광포한 내전의 물결 속에서 다리는 크로아티아 포병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다리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사라예보에 도달하자, 정부는 사라예보 역시 포위되어 공격당하던 상태였음에도 국가적 애도의 날을 선포했다. '오래된 다리'의 파괴는 내전으로 인한 무의미하고 잔혹한 유혈 사태를 상징한다. 여러 해에 걸친 설전 이후, 유네스코의 후원을 받은 재건축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다리는 2004년 7월 다시 개통되었다.
네레트바 강 위에 높이 치솟아 올라 걸려 있는 훌륭한 돌로 된 이 아치는 단 하나의 건축학적 걸작으로서 보스니아의 역사를 감싸고 있다. 스타리 모스트(오래된 다리)는 1566년 발칸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의 '화려한 황제' 쉴레이만의 명에 따라 건설되었다. 건축을 공부하는 하이루딘이라는 학생이 설계를 준비하라는 명을 받았으며 건축했다고 한다.
'스타리 모스트'라는 이름과 도시의 이름인 '모스타르'는 다리 양쪽 끝에 건설되었던 탑과, 통행을 지키던 오스만 군인 부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탑과 병사들 모두 '모스타리', 즉 '다리의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 다리의 우선적인 기능은 자신의 군대가 달마티아 해변의 부유한 도시로 손쉽게 접근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다리는 또한 은이 풍부하게 산출되는 보스니아 내륙의 산악 지대와 교역을 수월하게 해 주었으며, 달마티아의 염전으로부터 귀중한 소금을 내륙 지방의 마을로 신속하게 수송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메주고리예 순례지 [Medugorje]
멀리 산위에 있는 흰 십자가를 망원렌즈로 잡은 것이다.
메주고리에는 슬라브어로 ‘산과 산 사이의 지역’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해발 200미터 높이의 산악에 위치하고 있으며, 교구 전체 인구가 약 4300명 정도다.
이곳은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서남부, 치트룩시에 속한 가톨릭 교회 소교구(小敎區) 명칭이자, 교구 내에 속한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애초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한적한 농촌이었으나, 1981년 성모마리아가 나타났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가톨릭 신도들의 순례지이자 관광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81년 6월 여섯 아이들이 마을 외곽의 크르니카라는 언덕 위에서 성모 마리아를 보았다고 주장해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처음 목격자는 두 명이었으며, 이후 수 차례에 걸쳐 여섯 명의 아이들에게 나타나 기도와 평화의 메시지 등을 전했다는 주장이었다.
아이들의 성모 발현 주장을 놓고 가톨릭 교회와 과학 및 의학계에서 다양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현재까지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부정적이다. 가톨릭 내부 법규에 따라서 해당 교구 주교가 조사하여 1차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이곳 주교가 “초자연적인 존재의 발현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다만 교황청의 직접 조사 가능성을 열어두었으나, 2006년 현재까지 교황청은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신도들의 메주고리예 여행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순례는 금하지만 개인적인 여행은 허락한다는 입장이다.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이 성모 발현을 부정하고 있지만, 일반 가톨릭 신자들은 이곳을 성모발현 성지로 인정하는 경향이 짙다. 항공편은 물론이려니와 철도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데도 1981년 이후 수천만 명이 이곳을 다녀갔고, 메주고리예의 관광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방문객이 많아지자 작은 산골 교구 메주고리예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현재는 주차시설과 숙박시설, 상가가 들어서 제법 관광지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성야곱 성당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리고 있다

성당 앞에 자리잡은 성모마리아 상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노천 광장

청동 예수상 - 예수님의 다리에 성수가 흐르는데 이 물을 받아 아픈 곳에 바르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성수 채집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성수를 정성스레 훔치는 통에
예수님 청동 다리가 금빛을 띠었다
아내도 아픈 팔을 들고 성수를 손수건에 적셔 내고 있다
"당신은 불자인데 효험이 있을까"
"하나님이 불자와 기독교인을 구별하겠습니까 "
이튿날 아침 다시 한 번 가잔다
"어제 성수를 발랐더니 훨씬 좋아진 것 같네요"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었다
출발 시간이 바쁜데 어쩌려나 하고 걱정했는데
대뜸 손짓 발짓으로 양해를 구해 먼저 들어섰다
참 못말릴 일이다
저러다가 우리 허 여사 은혜를 입어 성당에 다닐지 모르겠다.

숙소가 있던 네움 해변


*위의 글은 KRT 인솔가이드 해설 및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의 내용을 참조하여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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