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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오졸재 박한주 여표비 및 비각

  오졸재 박한주 여표비 및 비각/ 행전 박영환

 

  2016년 3월11일(수) 청도문화원 '우리문화 바로알기' 답사 일정으로 경북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 소재 오졸재 박한주 여표비 및 비각을 찾았다.  

 

  어떤 불의에도 타협하지 않던 기개가 높았던 문신이며 학자였던 청도 출신 두 분이 있었다. 한 분은 탁영 김일손 선생이고 한 분은 오졸재 박한주 선생이다. 두 분은 공통점이 많다. 나이도 오졸재 선생이 여섯 살 위이지만 큰 차이가 없고 출생지도 탁영은 이서면 자계이며, 오졸재는 풍각면 차산이니 지척의 거리에 있으며 두 분 모두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인이다.

  두 분 모두 연산군 때 있었던 사화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탁영은 무오사화 때, 오졸재는 무오사화 때는 유배를 그 뒤 갑자사화 때 역시 극형을 당했다. 

  오늘은 그 두 분 중에 한 분인 오졸재 선생의 여표비 및 비각을 찾은 것이다.

 

 

 

비각

 

 

 

  이 비석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서 두번의 사화(무오(戊午)·갑자사화(甲子士禍))에 희생된 오졸재(迂拙齋) 박한주(朴漢柱, 1459 ~1504)의 여표비(閭表碑)이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비신(碑身)·귀부·이수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전체 높이는 308cm이며 비신의 높이가 196cm이다. 귀부는 30cm이고 이수가 82cm이다. 이 비는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 100여년이나 지난 1629년(인조 7)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대사간(大司諫)이었던 김응조(金應祖, 1587~1667)가 짓고 이관징(李觀徵)이 썼다.

  박한주의 본관(本貫)은 밀양(密陽)이며 (字)는 천지(天支)이고 호(號)는 오졸재(迂拙齋)이다 . 청도군(淸道郡) 풍각면(豊角面) 차산리(車山里)에서 출생하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생의 조부인 안국암 박대성이 밀양에서 이곳으로 이거했으며 아버지는 돈인이다.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정언(正言)·헌납(獻納)·예천군수(醴泉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성종 22년 부모님 봉양을 위해 창녕 현감을 자청했으며 부임 이후로 민과 관리를 대함에 조법(調法)이 있었고 주변에 학문을 일으키니 민속이 달라졌다고 한다. 성종 때는 치적이 제일이라 하여 포상을 내렸고 연산군(燕山君) 3년에 사간원 헌납 재임 중 연산군의 실정(失政)과 무상시로 이어지는 유연을 중지할 것을 극간하자 연산군은 노하여 사간원 직원들에게 식물과 녹피를 하사하면서 박 모(某)는 주지말라는 교지를 내렸다. 선생은 그럼에도 피하지 아니하고  노사신, 임사홍의 간사하고 배임한 죄를 탄핵하고 연산군의 마음이 날로 황폐해지자 외직을 청해 평해군수를 거쳐 예천군수로 부임했다. 무오사화에 김종직 선생의 문도로 몰려 선생과 김굉필 등 문도들이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나무라고 비방하였다 하여 선생은 왕과 훈구파에게 미움을 받아 곤장 80대를 맞고 평안도(平安道)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 연산군 6년 낙안으로 이배되었는데 그곳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여 최산두 등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유희춘은 이를 보고 호남 학문의 연원이 오졸재에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폐비 윤씨를 왕비로 추승하고 성종묘에 배사함을 반대한 사람, 폐비 윤씨 폐사에 찬동한 사람, 연산군에 직언 , 직간(直諫)한 사람을 극형에 처했다. 선생도  연루되어 5월 15일 참형에 임하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향년 46세였다. 이후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조광조 등의 주청으로 통정대부 도승지(都承旨) 겸 예문관에 추증(追贈)되었다. 밀양 예림서원, 함안(咸安)의 덕암서원(德岩書院), 청도 각북면 남산리 남강서원(南岡書院), 풍각 차산서원, 흑석의 석강서원에 배향되었다. 오졸재집(迂拙齋集)』이 있으며 밀양 5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으로, 풍각면 차산리 전 남부초등학교(南部初等學校) 뒤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내부는 모두 통칸으로 처리되어 있다. 내부 바닥은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으며 중앙에 비가 위치하고 있다. 벽은 원래 개방되어 있었던 것 같으나 현재는 시멘트로 벽체를 하였으며, 정면 어간(御間)에는 철창문을 설치하였다. 시멘트로 마감한 얕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에는 배흘림을 두었다. 주두상(柱頭上)에는 이익공(二翼工)을 두었다. 인방(引枋)과 장혀(장설, 長舌) 사이에는 원형(圓形)의 화반(花盤)을 끼웠으며 도리는 굴도리를 사용하였다. 가구(架構)는 제형판대공(梯形板臺工)이 마룻대를 받는 간결한 구조의 오량가(五樑架)인데, 양측면에서 충량(衝樑)을 대량(大樑) 위에 걸었으며 충량 상부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박한주 선생이 기간원 헌납으로 있으면서 (사간원 헌납은 궁중의 재산관리하는 직책) 연산군과의 일화가 있으니 어느 날 연산군이 홍청에서 기생들을 데리고 놀기 위해서 내시를 불러 용봉장막을 가져오게하였다. 이때 박한주 선생은 단호하게 못 준다고 하였다. 내시는 바로 가서 연산군에게 고했다. 

  연산군은 좌우시자를 불러 당장가서 박한주를 잡아 오라고 하였다. 임금에게 불려온 박한주에게

  "왜 용봉장막을 내어주지 않느냐?" 묻자 

  "나라에 잔치와 능침에 제사지내는 때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상께서는 종묘사직과 능침에는 한 번도 제사지내지 않으시고 놀이와 잔치는 밤을 낮삼아 계속하시는데 효도하는 도리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했다. 그러자 연산군이

  "눈병이 있어서 다닐 수 없기 때문이오." 하고 변명했다. 

  "후원에서 말달리기와 제기차기는 잘 하시는데  어찌 눈병이 걸렸다고 말씀하십니까?""

  이때 연산군이 화가 나서 얼굴빛이 변하며 말하였다. 

  "용봉장막이 네 물건이냐?"

  "용봉장막이 제 것은 아니옵니다. 그렇지만 주상의 것도 아닙니다."

  "어째 그렇냐?"

  "이는 모두 백성의 세금에서 나온 것이니 신민의 장막이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상감의 사사로운 물건이겠습니까?"

  선생은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임금의 잘못을 간언하였다. 일찌기 박한주는 군수를 하면서 정사를 공평하게 하여 아전들이 그를 두려워하였고 백성들은 모두 부모처럼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 내직의  간관으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이와 같은 강직한 성품을 가진 박한주는 훗날 노사신과 임사홍의 간사함을 논하다가  모함을 받아 무오사화때는 유배되었고, 갑자사화때는 끝내 목숨을 잃었다.

 

 

위의 안내문에 대한 오류를 지적한 이가 있어(eyoone님의 블로그 - 열린누리), 블로그를 소개한다. 고증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가) 이 비석은 인조(仁祖) 7(1629)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1662년 이후에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나) 김응조(金應祖)의 몰년(沒年)은 1699년이 아니라 1697년임을 알 수 있다.

 

  비석에는 김응조(金應祖)의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이라 새겼는데 그의 연보(年譜)를 보면 그가 대사간(大司諫)의 벼슬을 받은 것이 1662년이라 하였으므로 안내판에서 1629년에 세웠다는 것이 틀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1629년에 세운 것이라면 비석에 새긴 그의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이라는 것이 틀린 것이 된다. 따라서 아마도 나중의 경우는 아닐 것임이 확실하다.

 

[출처] 오졸재 박한주 여표비 안내판의 오류를 찾다|작성자 열린누리

 

 

殿 - 위패 머무는 곳, 閣 - 사람이 아니더라도 모시는 곳 - 비를 모시면 비각, 堂 - 사람이 기거하는 곳, 亭 - 마루가 있는 곳, 樓 - 2층다락

 

참석 회원들이 비석을 둘러보고 있다.

 

이수

 

 

 

 

     

                                                                              귀부

“용생구자부동명(龍生九子不同名)”이란 말이 있다. 그 뜻을 풀어 쓰자면, “용에게는 아홉 아들이 있는데, 그들 모두가 다르다.”는 말로, 대개 갓 결혼한 부부에게 개성이 특출난 여러 자식들을 낳기를 빌어주는 덕담으로 사용된다.

   

용의 아들은 용이어야 할 텐데 그들 모두가 다르다니 무슨 말일까. 예로부터 용은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져 건물이나 물건에 장식해왔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장식된 곳이 어디냐에 따라 그 모양이 조금씩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무덤 앞에 세워져 있는 비석을 보면 비석을 받치고 있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이 보일 것이다. 요즘 세우는 비석의 받침돌은 그냥 거북이 모양으로 조각하지만 오래 된 무덤을 보면 용의 머리를 하고 있다. 이 용머리의 거북같이 생긴 짐승이 용의 첫째 아들이 비희(贔屓)이다.

 

그 이름을 이루는 한자를 보자면 ‘힘쓸 비(贔)’와 ‘힘들일 희(屓)’로 한자사전에는 ‘힘을 버쩍 씀’이라고 뜻을 풀이하고 있다. 이름 풀이 그대로, 비희라는 짐승은 무거운 것을 들기 좋아하는 아들로, 용의 아홉 아들 중 첫째라고 한다. 달리는 패하(覇下)라고도 부른다.

     

이 같은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은 시대와 문헌에 따라 조금씩 아홉아들에 대한 설명이 다른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명나라 때 호승지라는 이가 지은 「진주선(眞珠船)」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책에 따르면, 용의 아홉 아들은 각각 나은 순서에 따라 그 이름을 비희(贔屓), 이문(螭吻), 포뢰(浦牢), 폐안(狴犴), 도철(饕餮), 공하(蚣蝦), 애자(睚眦), 산예(狻猊), 초도(椒圖)라고 한다.

 

 

 

박윤제 문화원장이 이곳 차산 동리 주변의 지명의 유래를  소개했다.

풍각 - 차산의 옛 이름이 上火村인데 우리말로 하면 윗뿔촌이다. 여기에서 뿔이 角으로 바뀌어 각북 각남도 나왔다. 1896년까지 각남면 이실부터 풍각, 각북은 대구 소속이었다.  차산이 그 당시 중심지이다.

쫍은 딩이 - 좁은 등, 밤갓소 - 밤나무 산 아래 물이 고여 있는 소

 

 

 

 

여표비 들어가는 골목 입구에 있는 보호수 - 버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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