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임당리 운림고택
경북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행전 박영환


참가자 기념 촬영
400여 년 내시(內侍) 가문이며 거부(巨富)였던 운림고택(雲林古宅)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林塘里), 국가민속문화재 제245호인 운림고택을 찾았다.
이 고택은 조선중기부터 400여 년간 내시 가문이 살았으며 이 집이 여기에 자리 잡은 것은 당시 유명한 지관이 명당을 찾아 두루 답사한 결과 이곳을 최고의 길지(吉地)로 꼽았다고 하는데 그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이 집은 긴 세월 동안 큰 부잣집으로 이름을 날렸다.
내시가(內侍家)는 근본적으로 혈손을 둘 수 없었기에 입양으로 대를 이었는데 그 동안 다른 성씨가 부자와 조손의 연을 맺어 가계를 이어갔다. 이때 16대까지는 생가의 성과 이름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데 16대에는 2명이 입양되었고 17대와 18대에 오면서 성씨도 김씨로 통일한 것 같다.
현재 건물은 구한말 내시로 상선(尙膳)의 품계를 받은 15대 운림(雲林) 김병익(金秉翼, 1842〜1925)이 건립했다고 전한다. 이 집에서 나온 가계 문서에는 2대부터 16대까지 이름과 실제 관직, 부인의 본관, 산소의 위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집은 큰 사랑채, 중 사랑채, 안채, 큰 고방채, 작은 고방채, 사당,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는 대궐 쪽 방향인 북향으로 놓여 있다. 큰 사랑채에서는 대문부터 안채로 들어가는 동선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중 사랑채 좌측 문을 통해서만 안채로 드나들 수 있다. 안마당에는 곡식을 나르는 등 특수한 때를 제외하고는 남자가 출입하는 것은 금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옥 구조는 보통의 사대부 가옥보다 더욱 엄격하게 안채의 노출을 최소화하고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구조이다. 청도 운림고택은 서울, 경기 지역 외에 남아있는 유일한 내시 가옥으로 조선 시대 가옥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일설에는 이 집 만석지기 재산은 2대 이세륜(李世倫)이 서울에서 낙향하여 내려올 때 임금님께 받은 시업인 새들 논 30마지기가 그 시작이었다고 하는데 대가 내려가면서 계속 재산이 불어나 마침내 청도 지역은 물론이고 밀양, 대구, 경주 등 100여 리 밖에까지 광범위하게 논밭이 있었다.
그런데 이 집은 재산만큼 인심도 넉넉하여 배고픈 걸인이나 과객이 오면 내치지 않고 대접을 잘 했다. 한 번은 어느 과객이 돌연사하자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기도 했는데 그 땅이 명당이었다고 한다. 또 동리 앞 하천이 휘어져 비만 오면 홍수 피해가 막심했는데 막대한 사재(私財)를 출연(出捐), 냇물을 직선으로 흐르게 하여 이를 해결하는 등 동리의 숙원사업에 적극 나섰고 그리고 나라가 일제의 압박에 시달릴 때 거금의 독립운동 자금을 흔쾌히 내어놓은 애국심 또한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러나 이 집의 재산도 이승만 정부가 주도한, '토지개혁'이 전격 시행되면서 만석지기 시대도 끝이 나고 말았다.
‘문’이란 시제로 몇 줄 적었다.
문은 언제나 무겁게 닫혀 있었다/ 그 무서운 헛기침의 기압이 담장을 누르던/ 햇살 없는 북향의 안방을 밀고나오던 문은/ 또 다른 문에 덜미가 잡혀 주저앉았다/ 문들은 모두가 자기편이 아니라는 비애를 안고/ 늘 서로를 두려워하며 제 몸을 줄여 어둠과 마주했다/ 문은 서로를 모른 체 했고 열려는 힘보다는 닫으려는 힘의 편에 섰다/ 깊은 성곽/ 문풍지가 무심한 달빛 따라 울어 주어도/ 안방 문은 하얀 창호지만 어루만질 뿐 문풍지처럼 울 수 없었다.
1대 미상, 일설에는 김한식(金漢植)이라 함, 2대 이세륜(李世倫), 3대 김희보(金熙輔), 4대 이한형(李漢亨), 5대 박영종(朴永宗), 6대 하인룡(河仁龍), 7대 갈지담(葛旨覃), 8대 박태무(朴泰茂), 9대 정세경(鄭世卿), 10대 곽선징(郭善徵), 11대 신태손(申太孫), 12대 강위문(姜渭文), 13대 정현묵(鄭賢默), 14대 류광원(柳光源), 15대 김병익(金秉翼), 16대 김일준(金馹俊), 한우경[韓敎官)] 17대 김문선(金文選), 김문석(金文錫), 김문극(金文極, 한우경의 아들), 18대 김진우(金振宇, 김문선의 아들), 김진동(金振東, 김문석의 아들), 김진하(金振夏, 김문극의 아들)(16대부터는 2명씩 입양을 했고 17대, 18대는 성씨도 김씨로 통일했다.
내시는 고려시대 국왕의 측근에서 시종하는 문관직이다. 재예와 용모가 뛰어난 세족자제(世族子弟) 또는 시경에 능통한 문신 중에서 임명했다. 뒤에는 환관이 등용되었다. 918년(태조1년) 내시 서기라는 직명이 있었으며 모든 의식의 집행과 어가를 수행하는 일과 유학자적 자질을 왕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왕의 제사(制詞, 글)를 기초하였으며 국가기무를 관장하기도 했다. 또한 고려 지배관료의 중책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내시부 - 고려시대 환관을 맡아보던 관청. 내시부 정원은 140명으로 알려져 있다.
환관 - 거세된 남자로 궁궐에서 일하는 내관. 이 환관 제도는 1894년(조선 고종 31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내시위 - 조선초기 궁궐 경비와 왕의 경호를 맡아보던 시위군.
내시 교관 - 조선시대 내시들을 교육하고 훈도하고 책임을 맡았던 관리.
상선 - 조선시대 내시부에 소속된 종2품 관리. 궁중에서 식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상온 - 조선시대 내시부에 소속된 정3품 당상관. 술 담그는 일 관장.
상전 - 정4품의 관직. 궁중 내 명령을 전달하는 일을 맡아 봄.
그외에도 의약관계에 종사한 상약, 서책을 관장한 상책 등이 있었다.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배치된 사랑채

측면에서 본 사랑채

안채 - 부엌, 안방, 마루, 작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원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강사: 박희상)

강의를 하는 박희상님


내시란? 박윤제 문화원장 강의

안채 마루에 앉아 설명을 듣다

안방 바깥 문 - 외부에서 방안을 쉽게 보지 못하도록 문턱을 높였다
문
- 청도 임당리 내시 종가에서
행전 박영환
문은 언제나 무겁게 닫혀 있었다
그 무서운 헛기침의 기압이 담장을 누르던
햇살 없는 북향의 안방을 밀고나오던 문은
또 다른 문에 덜미가 잡혀 주저앉았다
문들은 모두가 자기편이 아니라는 비애를 안고
늘 서로를 두려워하며 제 몸을 줄여 어둠과 마주했다
문은 서로를 모른 체 했고 열려는 힘보다는 닫으려는 힘의 편에 섰다
깊은 성곽
문풍지가 무심한 달빛 따라 울어 주어도
안방 문은 하얀 창호지만 어루만질 뿐 문풍지처럼 울 수 없었다.

안채 마루 문 - 필요시 문짝을 분리하여 개방할 수 있도록 했다

안채 방안 미닫이

박 문화원장이 안방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 내외가 엄격하던 안방에 외간 남자가 이렇게 들어왔으니 금석지감(今昔之感)이 든다

안채에서 바라본 안채 출입문이 있는 집

광에 들어가고 있다

쌀 뒤주

뒤주 위의 서까래

곳간 - 이 건물이며 뒤주가 있는 건물 등이 안채를 둘러싸고 있다

방앗간

정낭(화장실)

사당 입구


사당


측면에서 본 사당

안채 출입문에 붙은 방이 외부 사람과 접견할 수 있는 장소이었다.

외부를 볼 수 있는 구멍

정원을 둘러보고 있다

흐드러지게 핀 꽃 사과


작은 연못

여 회원들이 한 자리에서 찰칵

집 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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