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 용천사/행전 박영환
2016년 5월 4일 청도문화원에서 주관하는 '우리문화 바로알기' 현장 탐방이 있었다. 이번에 찾아간 곳은 청도군 각북면 소재 용천사이다.


용천사 전경

삼국유사 - 용천사에서 탈고, 운문사에서 편찬
일연선사가 편찬한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큰 보배요, 자산이다. 이것이 어디에서 집필되고 편찬되었는가? 사실 아쉽게도 거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선사의 연보를 고려하면 청도에서 집필되고 편찬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삼국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도 그렇게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청도는 이 주장들을 적극 수용하고 입증하여 청도의 귀한 자산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청도군 각북면 비슬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약 1400년의 역사를 가진 고찰 용천사 입구 안내문 중 이러한 내용이 눈길을 끈다.
“일연선사께서 비슬산에 마지막 머문 곳이 용천사였다. ‘삼국유사’의 원고를 이곳 용천사에서 탈고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277년 청도 운문사 주지로 옮기어 그곳에서 삼국유사가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고대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아낸 ‘삼국유사’ 원고를 일연선사가 청도 용천사에서 탈고하고 그 이후 운문사에서 편찬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대목이다. 이는 근래, ‘삼국유사’에 대해 경북 군위군이 인각사가 ‘삼국유사’의 산실이라고 하면서 아예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라 명명하여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이에 따른 여러 가지 사업도 벌이고 있는 것과 완전 배치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사실 ‘용천사 탈고, 운문사 편찬’ 설의 진위를 차치하더라도 군위의 ‘삼국유사 산실’ 설도 생각할 점이 있다. 일연선사가 군위 인각사에서 말년을 보내고 입적을 했으니 집필과 편찬을 했다고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머문 시기가 79세부터 입적을 한 84세까지이다. 한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모은 자료를 말년까지 정리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거니와 고령이기도 하고 이때 효심이 많은 그가 노모상까지 당한 시기였는데 그럴 경황이 없었을 것 같다.
당시 고려는 몽고의 침입 등 전란으로 민중들이 민족적 자긍심과 정신적 중심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을 때이다. 일연선사는 그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껴 민중들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많은 기록의 대부분은 현지답사를 통해 자료를 찾아 기록했다.
‘일연을묻는다, 현암사, 2006.’ 저자 고운기도 ‘삼국유사’는 ‘발로 뛰며 쓴 책’이라고 정의하면서 ‘삼국유사’의 미덕이라면 지은이의 발길이 애정 어리게 주어진 다음 치밀함과 정성이 배어 기록되었다는 점이라고 하면서 그 스스로도 책상에 앉아 읽는 ‘삼국유사’가 아니라 발로 뛰는 ‘삼국유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직접 그 현장을 답사하고 ‘일연을 묻는다’를 세상에 내어놓은 것이다.
삼국유사의 내용 중에는 신라 중심의 불교문화가 많이 취급되어 있는데 이도 돌이켜보면 선사가 경상도 쪽, 그 중에도 비슬산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 많이 머물렀기에 역시 이쪽에 발길이 쉽게 갔을 것이다.
선사는 1206년(희종2) 장산군(지금의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9세(1214, 고종1)에 해양 무량사에 취학하고 14세(1219, 고종6)에 정식으로 출가를 한다.(해양이라는 지역이 전라도 광주라고 알려져 있고 출가한 절이 설악산 진전사라고 알려져 있으나 다른 의견이 있다. 이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아무튼 그 이후 22세(1227, 고종14) 부터 포산(지금의 달성과 청도 경계에 있는 비슬산)에 43세까지 머물며 수도생활을 한다. 그 뒤 44세(1249, 고종36)부터 남해 정림사 및 길상암에 머물다가 56세(1261, 원종 2)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 선월사에 주석했다가 59세(1264, 원종5)에 영일 오어사를 거쳐 다시 포산(비슬산)에 들어 인흥사에 주석했다.
그뒤 일연은 69세(1274, 원종15)에 용천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는데 해동화엄전교(海東華嚴傳敎)의 10대 사찰 중 하나인 용천사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가지고 머물렀던 것 같다. 이 용천사를 끝으로 비슬산 시기를 마감하고 72세(1277, 충렬왕 3)에 임금의 명으로 운문사에 주석하게 된다. 그 뒤 76세(1281, 충렬왕 7)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경주 행재소로 갔다. 77세(1282, 충렬왕 8), 임금의 명에 의해 개성 광명사에 주석하게 되고 78세(1283, 충렬왕 9) 되던 해에 국존으로 책봉되었으나 그 해 곧 하산한다.(고운기는 3월에 책봉받고 가을에 하산, 하산 장소는 비문에 나타난 바, 舊山이라 표현된 고향일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일연의 생애를 말하는 것 중에 고쳐야 할 것이 있다. 하산 하면서 바로 인각사에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문은 여기까지 적어놓고 이듬해 어머니가 96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감했다고 적고 있다. 인각사 행은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러니 79세(1284, 충렬왕 10),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인각사에 갔으며 84세(1289, 충렬왕 15)에 입적했다.
일연 선사의 연보를 살펴보건대 승려 생활 중 가장 많이 생활한 곳이 포산이다. 전반기 21년, 후반기 12년, 구도의 발걸음 중 거의 절반인 33년을 포산 즉 비슬산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어떤 이는 35년간 비슬산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아무튼 이 산에 든 지 10년 만에 득도의 체험을 했으며 선불장에 나가서 장원급제를 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유사의 원고 중 많은 양이 포산에서 준비되었을 것이다. 실제 포산에 있을 때 답사하여 쓴 것으로 보이는 내용들이 많다. 황룡사지에 관한 것도 그렇고 '삼국유사'의 피은(避隱) 편 '포산이성(包山二聖)조도 그 때 쓴 것이다.
그리고 포산의 아홉 성인을 소개하며 그 말미에 소중한 기록을 하나 붙였다. “일찍이 이 산에 거처하며 성인들을 찬미하는 시를 썼는데 이제 함께 붙여놓는다.”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한밤중
달빛 보며 자리 잡고 있으니
몸에 걸친 옷
바람 부는 대로 반 남아 날도다
거적자리 누워도 단잠 들것이니
티끌세상
꿈속에서도 가지 않으리
홍진에 묶인 세상에는 꿈속에서도 가지 않으리라는 결연한 다짐을 했다. 이 시는 서른 전후에 쓴 것으로 젊은 시절 삶의 방향을 말한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삼국유사'는 포산에 있던 젊은 시절부터 집필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연을 묻는다’ 저자 고운기도 이를 보면서 ‘삼국유사’의 출발은 젊은 시절부터 듣고 본 것을 기록해둔 데서 출발했으며 본격적인 집필지는 운문사라고 했다.
그는 인각사 입구에 세운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이란 안내판에 대해서 이런 진술을 했다. “그것이 관에서 세웠는지 인각사 측에서 세웠는지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 - 절의 유일한 자랑거리를 훼손할 의도는 전혀 없지만, 그러나 이 말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삼국유사’가 언제 어디에서 저술했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한 까닭이다. 더욱이 인각사가 아닌 다른 절에서도 ‘삼국유사’ 저술의 장소임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니 말이다."
그는 이처럼 ‘인각사 저술설’에 대해 의문과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 반면 한편 다음과 같이 운문사 집필설을 피력했다.
“일연이 운문사 주석시절부터 ‘삼국유사’를 본격적으로 집필했다는 것도 각별하다. 이미 인흥사에 있으면서 '역대 연표'를 만든 것이 '삼국유사' 기술의 시초라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비 작업이었다. 더욱이 이 연표는 일연이 운문사로 옮긴 이듬 해 곧 충렬왕 4년(1278)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준비는 인흥사에서 했지만 마무리는 운문사에 와 있을 때 한 셈이다. 이런 점이 일연의 운문사 주석시절 ‘삼국유사’ 편찬 개시를 뒷받침 해준다.”고 했다.
<삼국유사>의 원문 토씨 하나까지도 그 오류를 밝혀낼 만큼 삼국유사에 정통한 문경현(전 경북대 교수)도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비슬산에서 잉태하여 운문사(雲門寺)에서 낳았다’고 주장했다.
정호완도 ‘삼국유사의 상상력, 지문당, 2013)을 통해서 이런 상상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삼국유사는 신라 서라벌의 얘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신라유사’가 아니냐고 비난을 하기도 합니다. 큰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좀 불만입니다.”
“삼국유사를 쓰겠다는 생각은 20대부터였소. 그래 인연 따라 이곳저곳 거처를 옮길 때마다 많은 곳을 답사하곤 했소. 이런 저런 유적과 유물은 물론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소. 그러나 내가 살아온 때는 이미 고구려와 백제가 이 땅에서 사라진지 어언 600여 차례의 봄가을이 지나 자료도 많지 않았고 특히 옛 고구려와 백제 땅에는 그리 갈 일이 많지 않았소. 아쉬운 일이지요. 다음 기회에 보완하도록 할 것이요.”
이 이야기도 20대 포산 시절부터 집필이 시작되었고 역시 발로 뛰는 기록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신태영도 ‘원문과함께 읽는 삼국유사, 한국인문 고전연구소, 2013’에서 집필지가 명확하지 않으나 젊을 때부터 자료를 수집해오다 운문사 시절 본격적인 저술을 하고 인각사에서 마무리한 것 같다고 했다.
김두진도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연구, 일조각, 2014)에서 23세부터 50여 년 간 장기간 자료 수집을 했다고 했으며 역시 끝 부분 완성은 운문사 시기로 봤다.
유홍준 등 '운문사 답사기(네이버 지식백과)' 1282년 충렬왕의 부름을 받고 개경에 떠날 때까지 운문사에 머물며 삼국유사의 집필에 힘을 쏟았다. 4비 가운데 행적비가 바로 일연스님의 행적비가 아닌가 생각되는데 불행스럽게 이 비기 전해지지 않는다.
위의 저서들에 나타난 주장들을 종합하면 젊은 시절부터 삼국유사를 준비해왔다는 점은 공히 인정한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운문사 주지시절, 즉 선사의 나이 72세(1277) 경 집필과 편찬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그 시기를 좀 더 늦게 보는 분도 있다. 앞의 신태영은 운문사에서 본격적인 저술을 했다면서도 인각사에서 마무리 한 것 같다고 했으며 리상호도 ‘사진과함께 읽는 삼국유사, 까치글방, 1999’에서 삼국유사를 쓴 연대는 정확히 밝힌 기록이 없으나 이 책의 내용 기사와 관련된 최종 연대가 고려 충렬왕 신사(1281년), 즉 저자의 76세에 해당한 부분이 있으며 저자는 84세에 사망하였으므로 이 책의 최종 탈고는 이 사이 7-8년간으로 추정될 뿐이라고 했다.
앞에서 논의된 것처럼 ‘삼국유사’는 어느 한 곳이 아니고 선사의 젊은 시절부터 장기간 수집하여 기록한 것이다.그런데 그 동안 모아 둔 원고들을 어느 시기에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집필하고 편찬했을까.
일연의 생애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포산 시절(1219 -1248) 둘째, 정림사, 길상사, 선월사 시절(1249-1263), 셋째, 영일 오어사, 인흥사, 용천사, 운문사, 인각사 시절(1264-1289)이다. 이 중에 첫째와 둘째 시기는 현장을 직접 답사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한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셋째 시기의 초반부터 서서히 시작하여 중반부터는 평생 동안 준비한 자료들을 최종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가 계산상으로 14- 15년 정도가 되지만 실제 정리를 할 수 있는 기간은 6-7년으로 압축된다. 그 6-7년 기간이 용천사와 운문사에 주석했을 때이다.
진상기(陳相基)는 ‘淸道 속으로, 2011.12.5. 도서출판 신원사’에서 ‘삼국유사’는 운문사에서 찬술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명성스님(전 운문사 주지며 현재 운문사 회주) 의 글을 소개했다. “<증보 삼국유사, 최남선 편>에 의거하건데, 삼국유사는 일연의 70세 이후로 京師(경사)로 被召(피소) 國尊(국존)에 冊封(책봉)되기까지 운문사에서 遺閒(유한)한 業績(업적)이요 그 중에서도 俗事(속사)의 部(부)인 王歷(왕력)과 紀異兩編(기이양편)은 아직 왕명이 있을 그 前期(전기)의 撰成(찬성)일까 하노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서울로 불려가서 국존이 되기까지 한가한 시간에 업적으로 이룬 것이 삼국유사라는 말이지요.”
<증보 삼국유사, 최남선 편>을 근거로한 명성 스님의 주장도 위의 기간과 일치한다. 76세(1281, 충렬왕 7) 때는 일본 원정군을 독려하기 위해 경주 행재소를 차린 왕을 가까운 거리에서 모셔야했고 77세(1282, 충렬왕 8) 때, 환궁하는 왕을 개성까지 모시고 가야했다. 78세(1283, 충렬왕 9) 때 국존으로 책봉되었으나 곧 하산했으며 79세(1284, 충렬왕 10) 때 96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군위군 인각사로 갔다가 84세(1289, 충렬왕 15)로 입적한다. 아무튼 이런 사정이 있었기에 용천사와 운문사 시기 외에는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경황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용천사는 69세(1274, 원종15)에 주석했다. 이 때 이미 고희의 시기인지라 마지막 주석처로 생각하며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화엄 10찰의 면모를 갖추도록 중수하였다. 그리고 평생 심혈을 기울였던 원고들을 탈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는 중, 나라에서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고 운문사 주지로 불렀다. 이때 72세(1277, 충렬왕3)였으니 늦은 나이라 이제는 정말 마지막 주석이란 생각을 가지고 용천사에서 못다 한 자료들을 집대성하여 편찬하였을 것 같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용천사 안내문에서 밝힌 "용천사 탈고, 운문사 편찬"이란 말이 괜한 추정이 아니고 근거가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인조 9년(1631년) 조영대사가 중건한 용천사 대웅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5호)
용천사의 역사와 연혁에 대해서는 숙종 28년(1702) 김진규가 지은 목판본 사적기와 1703년 행규 스님이 지은 '용천지'를 한데 엮어 1927년에 간행된 '청도군 각북면 사적'이 참고가 된다.
신라 문무왕 10년(670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해동화엄전교(海東華嚴傳敎)의 10대 사찰 중 한 곳이다.창건 당시 처음 이름은 옥천사(玉泉寺)이었다. 최치원(崔治遠)이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과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史)』에절 이름이 나온다.
『법장화상전』에 의하면 태백산 부석사(浮石寺), 원주 비마라사(毘滅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비슬산 옥천사(玉泉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팔공산 미리사(美理寺),계룡산 갑사(甲寺), 웅주 가야협 보원사(普願寺), 삼각산 청담사(靑潭寺) 10개 사찰을 말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이중 부석사와 비마라사·해인사·옥천사·범어사·화엄사6개 사찰만이 기록되어 있다.이들 사찰은 의상대사가 전파한 화엄사상을 널리 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불교 전성기에는 승려가 천여 명이나 되었고 주변에 자리잡고 있던 암자들은 백련암, 청련암, 일련암, 남암, 서암, 내원암, 부도암 외 47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오랜 세월 속에 모두 없어져버렸다. 이미 24명의 도인이 나왔고 앞으로 104명의 도인이 나올 것이라는 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현존하는 건물 중 3중창(1631년) 때의 것은 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만 남아 있고 다른 건물은 근대에 세워진 것이다.고려 원종 8년(1267년) 일연 선사가 중창하여 보조국사의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불일사(佛日寺)라 하였다가 다시 용천사로 고치고, 임진왜란 후 인조 9년(1631년) 조영대사(租英大師)가 3중창하였으며 순조 5년(1805년) 의열 화주가 크게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물로서는 법당의 삼존불, 후불탱화, 나한십육존불, 영탱, 석조물 등이 있으며 불을 밝히는 데 사용하였던 정로대가 남아있고 절 오른쪽 골짜기에 고승들의 부도(浮屠) 6기가 이 절의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다.용천사라는 이름은 맑고 풍부한 석간수가 끊임없이 용솟음쳐 흘러내리고 있어 용천(湧泉)이라 부쳐진 것이라고 전한다.

경내의 대웅전에 있는 삼존불과 후불 탱화


대웅전은 다포집이다. 다포집은 건물을 보다 크고 화려하게 하기 위해서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만들어서 끼워 넣었다. 하중이 기중과 벽체에 분산될 수 있고, 모양이 중후하고 장엄하다. 다포 양식은 중국에서 유행하다 원을 통해 고려에 전래되었다.(함남 안변 석왕사의 응진전) 조선 시대에는 두 양식이 필요에 따라 혼용되다가 점차 다포 양식이 일반화되어 갔다.
기둥이 아래에서 위로 곧바로 뻗어 올라간 것이 아니라, 가운데가 슬쩍 부풀어 탱탱한 팽창감을 느끼게 해주고 윗부분을 좁게 마무리한 기둥을 배흘림이라고 한다. 배흘림 기둥은 삼국 시대 이래로 우리 목조 건축의 중요한 특징이며, 그리스 신전에서도 이 형식이 나타나 이른바 엔타시스(entasis)라고도 한다.(네이버 지식 백과 중에서)

명부전
지장보살은 육도중생이 모두 성불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하신 대비의 보살이다. 안인함은 대지와 같고 고요히 생각하여 깊고 비밀스러움이 비장과 같아서 삼세의 삼계 중생이 하루 밤낮이라도 악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게하고 그 응한 것을 따라 이익하고 안락하게 하는 구원의 보살이다.
육도중생 : 지옥, 아귀, 수라, 축생, 인간, 천상. 삼계: 욕계, 색계, 무색계

응진전
응진전(應眞殿), 나한전(羅漢殿)이라고 함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羅漢)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이라고 한다. 그리고 500나한, 즉 부처님의 500제자를 모신 전각은 나한전(羅漢殿)이라 부른다. 나한전(羅漢殿) 나한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건물이다. 부처님에게는 열여섯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 Arhan)의 약칭으로 그 뜻은 성자(聖者)를 의미한다. 아라한은 응공(應供). 응진(應眞)의 자격을 갖춘 분들이다. 응공은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분들을 의미하며, 응진은 진리로 사람들을 충분히 이끌 수 있는 능력의 소지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나한전을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존으로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봉안돼 있다. 그 좌우에 열여섯 분의 나한이 웃고, 졸고, 등을 긁기도 하는 자유자재한 형상이 배치되어 있다.

응진전의 부처님과 나한상


응진전
부연 건축이다.
부연이란 우리나라의 절(사찰) 이나 사당 등의 고 건축물의 지붕 이음새 즉 이중 연목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건축 양식이 나타난 것은 고려 때 어느 목수가 궁궐을 짓는 일을 하면서 계산을 잘못하여 지붕을 만드는 연목길이를 설계보다 짧게 재단하여 추녀 길이가 짧아지게 된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그 목수는 이제 죽게되었다고 비관하며 식음을 전폐하게 되자 그 사연을 알게된
며느리가 예지를 발휘했다. "아버님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십니까? 짧으면 연목을 이어서 이중 지붕을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옳구나, 며느리의 말을 들은 시아버지는 지붕위의 연목위에 또 이중으로 연목을 이어 추녀를 빼어내게되니 이것이야 말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중 추녀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이 양식을 며느리 부(婦)자와 이을 (連)자를 쓰서 부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동편의 주지실 '목암' - 목암은 일연스님의 호이다.

화엄당 - 요사채이며 의상대사의 창건을 기려 붙인 이름임

범종각

회원 기념 촬영

수령이 오래된 배롱나무(백일홍)
오랜 세월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속이 심하게 패였는데 거기에 시멘트로 응급 처방까지 하여 더더욱 보기도 안쓰럽다. 그러나 노익장의 면모를 잃지 않고 여름이면 꽃망울을 힘차게 떠뜨려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다. 지금은 새잎이 나고 있는 중이다.

청수대로 보이는 조형물

큰 행사가 있을 때 도량을 밝혀주는 정로대

괘불대로 보이기는 하지만 괘불대라 하기에는 좀 작다. 그리고 한 짝이 없다.

고려시대의 탑이라고 알려져 있는 사암으로 만든 석탑






맑은 물이 샘 솟는 용천



산신각


부도



용천사에는 모두 여섯 기의 부도가 있다. 요사채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잠시 걸어가면 무명의 부도 한 기가 있고, 그 위쪽 두 곳에 각각 세 기와 두 기의 부도가 있다.
부도는 임란이후 스님들의 부도로 보이는데 모두 석종형이며 상·하대석만을 갖춘 대석 위에 탑신을 올려놓은 형태다. 모두 2m 남짓한 큰 부도들이다. 첫 번째 부도와 가장 위쪽에 있는 두 부도에는 명문이 없어 누구의 부도인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가운데 부도 3기에는 ‘사송당 최백 대사(四松堂 最栢 大師), 우운당 진희대사(友雲堂 眞熙 大士)’, ‘청심당 ○○ 대사(淸心堂 ○○ 大士)’라는 당호와 법명이 새겨져 있다. 첫 번째 부도와 세 부도는 거의 유사한 형태와 크기인 것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중 첫 번째 부도와 우운당 부도가 조형적으로 가장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탑신 위쪽과 아래쪽에 각각 잎과 꽃을 둘러 새긴 것이 돋보인다. 첫 번째 부도와 가장 위 왼쪽 부도 앞에는 비석 받침이 있는데, 비신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청도에서 사찰 중에 부도가 많은 순서로 보면 적천사, 대비사, 운문사, 용천사이다. 그런데 숫자상으로는 네 번째이지만 크게 만들어지고 조각이 잘된 것은 용천사 부도라 할 수 있다.


비슬산 중턱의 어느 식당 내, 운치있는 모습

'청도가 좋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혈(性穴) (2) | 2022.11.13 |
|---|---|
| 오졸재 박한주 여표비 및 비각 (1) | 2022.11.13 |
| 청도 임당리 운림고택 (0) | 2022.11.13 |
| 제6회 청도읍성 밟기 (0) | 2022.11.13 |
| 청도군 읍면 농악대회 (0) | 2022.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