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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22)인재(忍齋)가 강학하고 수학하던 계명재(啓明齋)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22)

인재(忍齋)가 강학하고 수학하던 계명재(啓明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향교 홍보장의. 청도문협 회장

 

<계명재>

 

<2020년 5월 8일(금), 청도신문>

 

  청도군 이서면 구라리 마을 앞에 자리 잡고 있는 계명재(啓明齋)를 찾았다. 기성반씨(岐城潘氏) 집성촌인 구라리(九羅里)의 본래 이름은 늑평(勒坪)이다. 전하는 말에는 옛날 이 지방에 군사들이 주둔해 있을 때 장군의 말이 죽자 묻어 주어 늑평이라 했다고 한다. 늑평은 곧 굴대(멍에를 일컫는 청도지역 명칭)인데 이 굴대가 변하여 구라가 되었다고 한다.

  이 재사는 기성반씨 입청도조(入淸道祖)인 인재(忍齋) 반예(潘汭)[1507(중종 2)1586(선조19)] 공이 수학하고 강학하던 곳이다. 공은 고려후기 밀직부사, 문하찬성사를 지낸 석암(石庵) 반복해(潘福海)  9세손이며 동지중추부사·한성부 좌윤·우윤에 올랐던 옥계(玉溪) 반우형(潘佑亨)의 아들이다. 삼족당 김대유 문하에서 수업하고 충순위 도정에 올랐으나 공명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 전념하여 학문을 닦았다. 가의대부 호조참판(戶曹參判) 증직되었다.

  반씨 문중에는 삼용장(三勇將)이 있다. 반효홍(潘孝弘) 의병장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창의하여 1592 7 9, 박경신 청도 조전장과 함께 청도읍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 또 반국해(潘國海) 장군은 임진왜란 중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병조참의를 제수 받고,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반중경(潘仲慶) 장군 역시 임란 중 이 충무공 휘하에서 용전하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계명재 옆에 반환(潘瓛)의 효자비각이 있다. 종모재(終慕齋) 반환[1767 (영조 43)1829(순조 29)]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에 진력했으며 효심이 깊어 정성으로 부모를 섬기고 봉양했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산소가 있는 매전면 두곡리까지 왕복 80 리 길이었지만 3년을 하루같이 성묘를 다녔는데 아무리 춥고 덥고 비바람이 치는 날이라도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집에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그곳에만 머물지 못하고 산소와 집을 오갔는데 뒤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때는 아예 여막(廬幕)을 지어 시묘살이를 했다. 제삿날 이외는 묘를 떠나지 않고 조석으로 향을 피우고 피눈물로 애통하며 술잔을 올렸는데 이는 중국 상고시대 순임금의 효심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공의 그 효행에 감복하여 달리던 말이 주변에 머물렀으며, 호랑이도 가축처럼 길들여져 공을 보살폈다. 공의 사후 향리의 유림들이 그의 여막을 종모재(終慕齋)’라 부르며 여러 번 나라에 장계를 올리니 마침내 효의 귀감으로 삼아 후세 전하도록 표창했다. 김복한(金福漢)이 지은 묘갈명과 류필영(柳必永)이 쓴 유허비명이 있다.

  계명재는 1840(헌종 6)에 지었고 효자각은 1925년에 건립하였다.

 

<구라리>란 시제로 받들어 올린다.

 

터를 잡은 인재께서 큰 붓을 내어주고

구국의 삼용장 긴 칼을 쥐어주며

종모재, 피눈물 효심 가슴을 젖게 하네

 

                                            

 

<계명재 정면>

 

 

효자각

 

<종모재 효행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