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나도 모르겠어요
행전 박영환
어느 여고에 근무할 때 우리 반 슬비란 아이가 가출을 했다. 학생회장이며, 공부도 잘하고 모든 면에 모범적인 슬비의 가출 소식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다행히 외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안도를 했지만…. 아무리 방학 중이라 하지만 고3 학생이 별 이유 없이 학교 보충수업에도 나오지 않고 부모님도 모르게 외가에 간 것은 문제가 있다.
슬비는 얼마 전부터 왠지 모르게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표정이 밝지 못했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으며 성적도 떨어졌다. 지난 번 7월 모의고사에서는 학급에서 10위권 이후로 밀렸다. 전교에서도 10위권 이내에 들어가던 아이가 학급에서도 10위 밖으로 갑자기 떨어진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모의고사를 치르는 날, 몸이 아파서 대충 치렀기 때문일 뿐이라고 했다. 조금 석연치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으려니 했다.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파묻고 슬비가 나타났다. 상담실로 자리를 옮겼다.
“요즈음 혼자 해결 못할 고민꺼리가 생긴 모양이구나.”
하고 묻자 슬비는 거침없이
“선생님, 저 얼마 전에 철학관에 갔어요.”
했다. 이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철학관이라니…. 그 운세를 보는 곳 말이니?”
“네”
“어머니도 알고 있니?”
“어머니 몰래 혼자 갔어요.”
“그것도 혼자…. 그래…. 혼자 철학관에라도 가야 할 사연은?”
“선생님, 저는 정말 바보인가 봐요,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도저히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요.”
“슬비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는 것이 도대체 뭐지?”
“저도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철학관에 간 걸요.”
“친구 관계니?”
“아뇨”
“그럼 이성 관계?”
“아아뇨.”
그는 일단 부정했다. 그러나 금방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성 관계 같구나. 슬비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그는 한참 동안 망설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선생님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어도 책장만 넘기면 어떤 얼굴이 책갈피 속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가 누구니?”
그런데 그날 슬비가 털어 놓은 내용은 꼭 이성에 대한 것만 아닌 복합적인 것이었다. 슬비가 고민을 하고 있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인 것 같았다. 첫째는 이성 관계이었다. 슬비는 어떤 사람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동생의 과외 공부를 시켜주는 대학생 오빠란다. P대에 다니는 사람인데, 키도 별로 크지 않고 얼굴도 잘생긴 것이 아니어서 별로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마음이 끌리니 자기도 이상하다는 것이다.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전혀 이성에 대한 그런 감정이 없었는데 하필이면 이 고3 시기에 이런 마음이 생기니 어쩌면 좋으냐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어머니와의 관계이다. 어머니가 근래에 슬비에 관한 모든 일을 슬비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주장대로 처리하며 너무 간섭이 심하다는 것이다. 일례로 수면 시간이 늘 부족하여 아침에 조금 더 자려고 해도 새벽 5시면 꼭 깨워 공부를 하라고 닦달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교우 관계이다. 학생회장이 된 이후 아이들이 자기를 일부러 멀리하며 왕따를 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식사 시간에 밥을 먹고 난 뒤 어떤 아이가 화장지를 쭉 나누어 주다가도 자기만 빼버린다는 것. 그리고는 저네끼리 어울려 선생님들이 슬비만 편애한다고 쑥덕거린다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슬비와 짝지도 하지 않겠다고 한단다. 교만하고 도도하다고 소문이 났단다.
학생회 일 때문에 수업 시간에 약간 늦게 들어와도 학생회장 티를 낸다고 곱지 않은 눈길로 본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체육 시간에 늦게 운동장에 나간 일이 있었는데, 체육 선생님은 슬비가 학교 일로 늦어진 것을 알았기에 아무 꾸중도 않았다. 그 때 ‘흥, 완전히 공주 대접이군’ 누군가가 한마디 뱉으니, 아이들은 의미 있게 쿡쿡대었다. 그럴 때마다 구차스럽게 일일이 변명도 할 수 없고 참아 버리곤 했는데 그렇게 되니 그것을 인정해주는 꼴이 되었단다.
슬비가 또 하나 참을 수 없는 고통은 별명 아닌 별명, ‘예스 걸’. 학생회장으로서 학생들의 의견을 대변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전부 선생님의 지시만 ‘예스, 예스’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 말에 대해서는 별로 부정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 선생님들이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헌신적으로 돌봐주고 계시는데 불만이 있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선생님, 친구들의 이런 따가운 눈총들을 의식하고부터는 학교 오기가 두렵고 무섭습니다.”
슬비는 드디어 울먹이기 시작했다.
나는 슬비를 다독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슬비는 오늘 고민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 그 고민 순서를 이성- 어머니- 교우 관계 순으로 말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역으로 슬비의 고민을 교우 - 어머니- 이성의 순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거기에도 순서가 있나요?‘
“그럼. 슬비는 모든 일에 너무 소심하며 예민하다. 어쩌면 너무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수하다. 매사에 세심하며 절제를 생명으로 삼는다. 말은 함부로 하지 않으며, 모든 일을 속으로만 삭인다. 교칙을 어기지 않으며,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 진실하고 예절 바른 모범생으로 남고 싶어 한다. 누가 봐도 모범적이고 교과서적인 학생이다. 그런데 이 모범적이고 교과서적인 행동이 비록 선생님들에게는 귀엽게 보였을지 몰라도 교우 관계에 있어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구나.”
“착한 행동이 오히려 친구들에게 오해를 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까?”
회장인 슬비와 부회장 은주는 매사에 너무 차이가 난다. 은주는 학생들과 곧잘 어울리고,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면 적극 개입한다. 때로는 선동도 한다. 자율 학습 시간에도 떠들다가 걸려 벌도 받고, 농담도 즐긴다. 교복을 변형시켜 입고 다니다가 선생님께 들켜 혼이 난 일도 있다. 반면 슬비는 은주와는 거의 정반대이다. 농담이라곤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며, 애늙은이처럼 항상 저만큼 떨어져 고고하다. 친구들이 농담이라도 하면 찬찬히 타이르는 투가 되고 노래는 명곡만 부르고 연예인이나 남자 친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아이들을 보면 깜짝 놀라니 아이들은 자기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보다 한 걸음 앞서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내기보다는 질투를 한다. 처음 학생회장 선거를 할 때는 슬비가 표를 훨씬 더 많이 얻었지만 그 이후는 은주가 아이들에게 훨씬 호감을 얻게 되었다.
“슬비가 학생회장이 아닐 때는 착하고 모범적인 행동이 어쩌면 큰 장점으로 돋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학생회장이란 측면에서는 단점이 되고 점수를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단다. 저네들의 대표는 저네들과 같이 어울리고 농담도 하고, 때로는 연예인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고, 대중가요도 한 곡 뽑아야 하며, 어떨 때는 교칙도 위반하고, 아이들을 대변하다가 선생님께 꾸중도 들을 때가 있어야 하는데….”
“저는 천성적으로 그런 것을 잘못합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간부는 그들의 속마음을 이해해 주는 친구이지 그들과 멀리 떨어져 고고하게 생활하는 것이 아니란다. 슬비의 생각과 행동이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한 걸음 물러서서 그들 속에 뛰어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다분히 쇼맨십을 발휘하여 빵집에도 가보고 영화관도 기웃거리고 유행가도 흥얼거리며 만화라도 뒤적여 보렴. 그것도 문제를 푸는 방법 중에 하나가 될 것 같다.”
“어렵지만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와의 문제는 학우 문제와는 정반대 현상이란 생각이 드는구나.”
“정반대 현상이라뇨?”
“학교생활이 안정이 되지 않으니 자연 집에 가서는 짜증을 부리고 불만을 늘어놓게 되겠지. 슬비도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를 어머니란 언덕에 마구 부비며 풀려한 것이지. 그러나 어머니로서는 슬비의 사정을 모르고 돌변한 딸의 태도에 당황하고 불안해진 것 같구나. 여태껏 너무 착하던 아이, 전혀 나무랄 데가 없이 자기 일을 잘 찾아서 하던 자랑스럽던 아이, 공부 잘 하고 예쁘기만 한 아이가 갑자기 태도가 바뀌고 성적도 떨어지니 어머니는 불안해지지 않겠니? 이 아이가 학생회장이 되더니 뭔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도 종전처럼 느긋한 마음으로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관심을 갖고 적극 개입하신 것 같구나. 그러니 재촉을 하지 않던 공부도 다그치고, 다른 일들도 슬비의 말처럼 사사건건 간섭을 하게 되는 것 아니겠니?”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럴 테지.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어머니의 이런 간섭을 받아 보지 않았겠지. 그런데 갑자기 돌변하여 슬비의 말처럼 간섭을 하기 시작하니 참을 수 없는 충격이 될 수도 있었겠지?”
“선생님 저도 이제 고3입니다. 그리고 한 학교의 학생회장입니다. 그런데 사사건건 간섭을 받는다는 것은 수모이고 참지 못할 괴로움입니다. 어머니만은 항상 저의 편인 줄 알았는데, 그런 어머니가 저의 마음을 너무 몰라주고 괴롭히고 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관심을 가지는 만큼 오히려 더 빗나가고 있었다. 도시락 반찬 같은 것도 트집의 대상으로 삼고, 동생과 다투고, 책상에 붙어 있지 않고 음악을 크게 틀어 놓았다. 불만은 불만을 낳는 악순환. 슬비의 가정은 갑자기 서로를 불신하는 우울한 집으로 바뀌고 말았다. 어머니는 마침내 슬비를 신경정신과에 데려갔다. 슬비는 철학관에도 들르고….
“대입을 120일 정도 남겨 놓은 중대한 고비를 슬기롭게 극복해야 한다. 어머니께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 놓고 대화를 나누어 보는 것이 어떻겠니?”
“…….”
“어머니도 사회 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분이니 슬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실 거야.”
“어머니와 충분히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그리고 이성 문제. 그 이성 문제는 2학년 때가지만 해도, 아니 고3 초까지만 해도 전혀 다른 아이의 일처럼 생각했지?”
“네. 저 역시 약간씩 느끼는 충동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구체성을 띠는 것이 아니고 아주 관념적인 그런 것에 불과했고, 그것을 생각한다는 자체부터 죄의식을 느낄 만큼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무용담(?)이라도 늘어놓는 아이들을 보노라면, 매우 천박하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구나.”
“그러던 제가 다른 아이들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게 되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합니다.”
“이성을 생각한다는 것. 그것을 허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제 슬비도 어린 아이의 꺼풀을 벗어나 하나의 성숙한 여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발전을 축하할 일이다.”
“…….”
“그런데 이 문제도 생각해볼 일이다. 슬비가 왜 그토록 빠른 속도로 이성에 접근하게 되었을까?”
“선생님,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두 가지가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친구들은 등을 돌렸고, 비빌 언덕이었던 어머니마저 너무 냉담해졌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마침내 긴 늪에 빠지게 되었고 이내 흙탕물에 휘말려 급류 속에 떠내려 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 오빠가 서 있었습니다. 오빠는 처음엔, 지푸라기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점차로 구명의 신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저를 감싸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오빠밖에 없었습니다.”
“오빠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랐니?”
“저가 오빠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입시생의 공부 방법이라든지, 대학 생활에 대한 궁금증이었지만, 그건 하나의 핑계였습니다. 저의 마음속에는 어느덧 사랑이 싹텄고, 가슴 속에 지울 수 없는 한 남성으로 자리 잡게되었습니다. 오빠와 대화를 나누면 한없이 기뻤습니다. 오빠와 이야기를 하게 되면 두통이 씻겨 나갔습니다. 물론 표정도 밝게 되었습니다. 오빠가 동생을 가르치러 오는 날은 선생님께 아프다는 둥 적당한 핑계거리를 만들고, 물론 어머니께도 오늘은 자습을 하지 않는다는 둥 구실을 만들어 오빠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오빠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제한된 것이었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몇 마디 던지거나 아니면 아예 한 마디도 못하고 얼굴만 빨개져서 눈인사만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그렇게라도 만나지 못하게 되면 갑자기 멍해지고 열이 펄펄 끓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빠도 슬비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니?”
“오빠가 저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저에 대해 매 우 호의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호의란 것이 슬비의 간절한 마음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겠지. 이를테면 귀여운 동생을 지켜보는 정도?”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슬비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슬비가 사랑하는 마음에 몇 가지 경계해야 될 것이 있다. 우선 사랑의 출발이 친구와 어머니에 대한 보상으로 나타났기에 슬비가 처음에는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도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보상이 다른 곳에서 풀려 버리게 되면, 아주 쉽게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가 애틋한 사랑을 할 만큼 여유가 있는 시기가 아니잖니? 우선 고3만큼은 접어 둘 필요가 있다. 대학에 들어가서 좀더 폭넓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대상을 구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도 그런 줄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슬비야, 철학관, 신경과, 절, 그 어느 것보다도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본인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문제 해결을 교우 - 어머니 - 이성의 순서로 풀어보렴,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말이 있잖아?”
“노력을 하겠습니다.”
하고 돌아갔다. 정말 빨리 안정이 되기를 비는 마음 간절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마침 일기장에 기록이 남아 있어 정리하여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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