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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

대마도 여행(2) 덕혜옹주여

대마도 여행(2)

 

         덕혜옹주여

 

                                                   

                                                                 행전 박영환

 

 

 

옹주님 자취가 왜 여기 있을까

경복궁 뜨락을 거닐텐데 대마도라니

기 막혀 말문을 닫은 비운의 역사여

 

이덕혜가 아니고 양덕혜로 살라 하고

조선인이 아니고 대마도의 종씨 남편

어디에 정을 붙일까 차리리 눈을 감네

 

오늘도 붉은 눈물 하늘을 적시네 

한 올 한 올 젖어올라 소매끝이  무겁구나 

울어서 녹여낸다면 그치지 마소서

 

 

  대마도의 첫 번째 도주(島主) 소오요시토시(宗義智), 2번째 소오요시나리(宗義成), 3번째 소오요시자네(宗義真) 때가 가장 번창하고 융성하던 시기였다. 특히 3번째 소오요시자네(宗義真)때에 조선무역이 잘 되어서 대마도가 제일 번성하고 대규모의 사업이 실행되었다고 한다. 

金石城(금석성)은 그러한 시기인 1669년에 소오요시자네(宗義真)가 건설한 성이다.

 

 

 

 

 

 

일본 성은 천수각이 있지만 금석성은 천수각이 없다. 노문(야쿠라몬)이다. 노문이란 뜻은 누각문이란 뜻이다.

 

정원으로 들어가는 길

 

李王家란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이씨 왕조란 표현은 조선왕조를 폄하하기 위한 식민사관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왕조로 해야 한다. 

 

 

 

 

 

 

 

*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고종과 궁녀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을 맞은 해였다. 고명딸인 덕혜옹주는 고종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고종은 영친왕처럼 일본이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시킬 것을 염려하여 김장한과 약혼을 시키려했지만 일본의 방해에 이어  갑작스런 승하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1921년 덕혜옹주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다가 1925년 3월 조선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 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끌려갔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 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한다.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 귀인이 유명을 달리하자 귀국하였지만 이내 일본으로 갔다. 1930년 봄부터 정신분열증을 앓기 시작했다. 영친왕 처소로 옮겨 치료를 받게 되자 다소 좋아졌다고 한다.

 

  1931년 5월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1955년  이혼을 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도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실패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1962년 1월26일 고국에 돌아와 창덕궁에서 생활하였다.  귀국은 했지만 20년 만인 1982년에 호적이 만들어졌고,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