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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

대마도 여행(1) - 최익현과 이완용

대마도 여행(1) - 최익현과 이완용

 

                     

 

 

                                                                     행전 박영환/ 2012.5.15.

 

 

 

선상에서 바라본 대마도

 

  2012년 5월 15일, 대마도행 배를 탔다. 전날까지 비가 왔기에 걱정을 했는데 마침 날씨가 맑아 발길이 가벼웠다. 오륙도를 뒤로 한 지 얼마되지 않아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가득한 대마도가 눈에 들어왔다. 영도에 있는 학교에 근무할 때, 날씨가 맑은 날은 그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드러나곤 하여 가까운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도 더 가까운 거리란 것을 실감했다. 

  대마도와 부산은 불과 50km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상 대마도 히타카츠 항까지는 1시간, 하 대마도 이즈하라 항까지는 2시간이면 도착한다. 우리 일행은 하 대마도부터 먼저 방문하게 되어 있어  오전 8시에 승선 10시에 이즈하라 항에 도착했다.

 

 

 

  비자 없이도 여권으로만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대마도를 여행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가는 날도 평일이었지만, 배에 빈 좌석이 없었다. 내리는 즉시 이즈하라 지역을 걸어서 관광을 했다. 그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아예 자전거를 가지고 온 사람도 있었다. 

  대마도 전체 인구는 약 35000명 정도인데 그 중 13000 명이 이즈하라에 살고 있다. 물론 이곳에  시청도 있다. 그러나 전혀 붐비지 않는 오히려 한적하게 느낄 정도의 소읍이었다.    

    대마도는 이미 고려 때부터 조공을 바치며  쌀·콩 등을 답례로 받아 갔는가 하면 조선 세종 때 왜구의 근거지로 우리 해안을 노략질하자  회유책·귀화정책 등을 쓰다가 마침내 원정()에 나서 정벌한 바도 있다. 
   쓰시마 도주() 소[]가 간청하여 조선이 삼포(부산포,·염포·제포)를 개항했는데 그 이후 에도[]시대 말기까지 대()조선무역을 하여 생계를 이어갔다.  그런 지정학적 관계가 있었기에 일본이 독도에 대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할 때마다  '독도는 물론이고 대마도까지도 우리 땅'이란 말하는 이가 많은데 상당히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선연이든 악연이든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대마도  역시 선연과 악연을 동시에 가진 곳이다. 대체로 우리나라를 섬기며 선연으로 살고자 했지만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 수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기도 한 악연도 있다.    
 

 

 

 

 

수선사 입구

 

수선사(슈젠지)는 백제의 법묘스님이 창건했으며 현판은 구한말 판서를 지낸 김학진의 친필이라고 한다.

 

 

최익현 선생 순국비 앞에서

 

  수선사에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다. 이 비석은 1996년에 세웠으며 비문에  "면암 최익선생이 1907년 1월1일 대마도 경비대 억류지에서 사망하여 상여가 본국으로 운구될 때까지 이 절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선생의 사적이 사라질까 두려워 이 비를 세운다." 란 취지를 밝혀놓았다.  

  면암 선생은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한 평생 의기와 충절로 살다 가신 분이다. 과거에 급제한 이후, 흥선대원군을 정면 비판, 그의 퇴진과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다가 제주도에 귀양을 갔으며 그 뒤 고종이 일본과 통상을 논하자 통상 및 개항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또 귀양을 갔고 갑오개혁 때 단발령을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그 뒤, 74세 고령에 의병을 이끌고 일본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대마도로 끌려와 단식을 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을 했던 것이다. 일본에 붙들려 왔을 때 수비대원들이 칼로 위협을 하며 대장을 향해 갓을 벗고 인사를 하라고 하자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당신의 신발 속에는 고국에서 가지고 온 흙이 항상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는 일념이었으니 그 충절이 얼마나 지극했던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면암 선생의 처음 유형지는 시내 중앙에 있는 팔번궁 신사 좌측광장에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그 건물이 없어지고 주차장이 되었다.

 

 

이완용의 글씨

 

  반면 일본에 충성을 다하여 후작까지 받은 이완용의 글씨가 이곳에 같이 남아 있어 두 사람의 생애가 너무나 대비되었다. 이 비명은 고쿠분소타로의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이또후히로부미 통역비서로서 시작하여 을사보호조약 과 한일합병문을 초안하고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인사국과과 궁내부차관까지 승진하였던 사람이다. 

  이 비석 하나만 보아도 이완용이 얼마나 일본의 충복이었던가를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것이다. 아마 이완용도 이 비문을 쓸 때  이것이 자신에게 채운 족쇄가 되어 희화화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갑자기 '天網 恢恢 而不失'이란 말이 생각났다. 즉 하늘 그물망은 성긴듯하나 결코 놓치지 않는다 것, 불의는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이지 못하고 결국 정의가 이기게 되는 것이 만고의 진리이다.  그 역시 잠시 부귀는 누리고 갔겠지만 끝내 오명으로 영원히 허덕이게 되었다.   

 

 

팔번궁 신사

 

 

참배하기 전 손을 씻는 곳

신사

 

마리아 신사

 

  팔번궁 내에 있는 마리아 신사는 19대 대마도주의 부인과 아들을 모신 곳이다. 마리아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장녀인데 가족 모두 특이하게 카돌릭 신자였다. 15세에 정략적으로 대마도주 종의지(소요시토시)의 부인이 되었다.

  마리아의 아버지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 선봉장으로 조선에 출병하여 평양까지 침공하였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권력 싸움(세키가하라 전투)에 패하여 참수형을 당한다. 이에 고니시의 사위 종의지는 대마 주민의 안전을 위해 부인 마리아와 이혼하고 나가사키로 내친다. 마리아는 거기서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후 권력싸움에 희생된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위해 신사에 모셔 제사를 지내다가 뒤에 천신신사에 합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즈하라시내의 여러 곳에 이런 비석이 있는데 모두 1811년(순조11년)년으로 되어있다. 이는 마지막 통신사가 일본본토에 입국하지 않고 막부에서 접반사가 대마도에 와서 행사를 치렀기 때문에  통신사와 막부의 관리가 묵은 주택 등을 표시한 것이다.

 

  통신사는 일본 막부정권의 역지빙례(易地聘禮, 외국의 사신은 본국의 중심부로 들이지 않고 그 나라와의 접경지대에서 예를 다함.)정책 때문에 본토에 들어가지 않았다.

 

 

 

 

일본의 공동묘지

 

 

 

 

높은 담장 - 외부 사람들이 잘 들여다 보지 못하게 했다.

 

 

 

 

 

 

  히구치 이치요(일본어: 樋口一葉, ひぐち いちよう, 1872년 5월 2일 - 1896년 11월 23일)는 일본근대 소설의 개척자로서 직업 소설가이다. 도쿄 출생. 본명은 히구치 나쓰코(樋口 夏子)이다.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와카를 배우는 사설 기관에 다니는 한편, 작가 나카라이 도스이에게 문학 수업을 받았다. 1892년 3월 나카라이가 발간한 잡지 [무사시노] 창간호에 첫 작품 <어둠 속의 벚꽃>을 발표하고 고다 로한의 <풍류불>의 영향을 받아 예술에 대한 도공의 정열을 사실적 문체로 묘사한 <매목>(1893)으로 재능을 인정받는다. [문학계] 등의 잡지에 <섣달 그믐날>(1894), <키재기>(1895~96), <탁류>(1895) 같은 서정성 넘치는 수작을 발표하여 복고적 시대 풍조 속에서 주목을 받았다

  2004년엔 새 5000엔권 지폐에 일본의 제국대학 총장을 지냈던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를 대신해서 등장하여 더 유명해졌다. 17세에 집안의 호주가 되어, 소설을 쓸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14개월간의 집필 생활을 하였으나, 폐결핵 진단을 받고 24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근대 문학사에 길이 남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키재기>, <섣달 그믐날>, <흐린 강> 등이 있다. /위키백과

 

 

묵었던 여관 - 다다미 방으로 아늑했다.

 

 

여관 앞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