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들 엇더하며
행전 박영환
우리 시조(時調)에 이른바, 하여가(何如歌)로 불려지는, ‘이런들 엇더하며 저런들 엇더하리’로 시작하는 두 수가 있다. 이 시조들의 겉으로 나타난 표현만 본다면 작가들은 마음을 비운 무욕청정(無慾淸淨), 즉 허심(虛心)의 상태이거나 아니면 사리 분별이 없는 우유부단한 성격 소유자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두 수 시조의 작가는 마음을 비운 사람도 아니었고 사리 분별이 없는 사람도 아니다.
이렇게 노래한 두 분 모두 매우 유명한 분들이다. 한 분은 근세조선의 3대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이며, 한 분은 우리나라 최고의 성리 학자로 추앙 받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다.
태종은 잘 알려진 대로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용기와 지략을 겸비하였으며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그가 가야 하는 길에 방해 요인이 되는 그 어떤 사람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가 죽인 사람들의 면면만 보아도 그는 허심이나 우유부단과는 거리가 멀었다.
먼저 그는, 그가 존경하고 따랐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을 죽였다. 그는 포은을 죽이기 전 ‘하여가(何如歌)’를 노래했지만 이는 애초부터 포은(圃隱)을 회유하는데 목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포은도 우유부단하게 변절을 하지 않을 인물이고 보면 ‘이런들 엇더하고 저런들 엇더하냐’ 는 식의 속보이는 권유는 처음부터 교감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왕권을 두고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벌인다. 태조 이성계의 여덟 아들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정상적으로 보면 왕위를 넘볼 수 없는 위치였다. 그러니 그가 왕좌에 앉는 데는 많은 무리수가 따랐다. 태조의 사랑을 받아 세자로 책봉된 그의 이복동생인 방석(芳碩)과 역시 같은 강씨 소생인 방번(芳蕃)을 죽였고 왕권에 도전하는 넷째 형인 방간(芳幹)도 죽였다.
그의 처남들도 무참하게 죽인다. 왕권을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외척이 득세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의 비(妃)인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피눈물 어린 간청을 외면하고 두 동생인 민무질(閔無疾), 무구(無咎) 형제를 억지로 죄명을 만들어 죽인 것이다. 처남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아들인 양녕, 충녕(세종)의 장인들도 죽였다.
아무튼 그는 스스로 악역을 자청했다. 세종에게 “모든 악역은 아비가 도맡아 할 테니 너는 성군이 되라”고 하였다. 개국 초에 누군가가 정지 작업을 할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 소임을 스스로 맡고 나섰으니, 그가 어떻게 이런들 엇더하고 저런들 엇더할 수 있었겠는가?
퇴계도 마찬가지다. 선생은 인생을 아무 계획 없이 낙천적으로 사신 분이 아니다. 학문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는 20세 전후에 주역(周易)을 연구하다가 과도한 공부 때문에 몸이 상하여 평생에 고질이 되게 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생원시(生員試), 문과 초시(文科初試)등에 수석을 하지 못하고 2등으로 합격하며 문과 급제도 34세가 되어서야 겨우 올랐다. 이는 퇴계의 노력과 집념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생의 제자인 김성일(金誠一)의 기록에 의하면, 선생은 언어나 문장에서 한 번도 농담이나 재주를 부리지 않았다고 했으며, 역시 제자인 이덕홍(李德弘)의 기록에는 선생은 젊어서부터 늙음에 이르기까지 여럿이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고, 혼자 딴방에 앉아 마음의 근본을 닦았으며 선생은 비록 글자 한 자를 우연히 쓰더라도 점과 획이 정돈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글자의 체는 방정하고 단중(端重)하였으며 시 한 수를 읊더라도 일절 일구의 글자를 반드시 깊이 생각하고 고쳐서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선생은 사후(死後)의 일까지도 철저하게 걱정하신 분이다. 임종 직전에 유계(遺戒)를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장(禮葬)을 하지 말라.’ 예조에서 국가 유공자의 전례에 따라 예장을 하려 해도 유언이라 하고 절대로 고사하라고 했다. 둘째, ‘유밀과(油蜜果)를 쓰지 말 것.’ 밀가루를 반죽하여 적당한 모양으로 빚어서 말린 뒤에 기름에 튀기고 꿀을 발라 깨를 입힌 과자를 말하는데 사치와 낭비로 본 것이다. 셋째 ‘비석을 세우지 말라.’ 묘는 비석의 높고 낮은 척수에 따라 죽은 이의 신분을 나타낸다. 퇴계는 종 1품의 정승이었으나 처사로 자처하여 조그마한 돌에 ‘退陶晩隱眞城 李公之墓(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만 써라고 했던 것이다.
이상 두 분 삶의 자취를 더듬어 보건대 만수산 드렁칡처럼 살고 싶다던 이방원이나, 초야우생(草野愚生)으로 천석고황에 젖고 싶어 하던 퇴계였지만 이런들 ‘엇더하며 저런들 엇더하게’ 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정말, 우리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인가? 가금씩 정해진 모든 격식이 너무 갑갑하고 무겁고 부담스러우며 괴로울 때는 훌훌 털어 버리고 싶다. 그러나 마음뿐, 항상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고 만다. 위의 두 분에 연민(憐憫)을 가질 틈도 없이 스스로의 연민에 하릴없이 웃는다. 이것이 인생인가?
10인 감성수필집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