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침소리(2)
행전 박영환
100년도 살지 못하는 한 세상, 허무한 인생사 -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사람들은 겉으로 나타난 일반적인 잣대에 의해 어머니의 일생을 괜찮게 사신 삶이라고 생각하여 호상(好喪)이라고 했다. 여든넷까지 사셨으니 장수를 하신 폭이고 4남매 자식들이 모두 나름대로 자기 생활을 엮어가고, 살림살이도 근동에서는 논밭이 많은 집 중에 하나였으니 그만하면 되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겉으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당신의 삶도 그렇게 평탄하신 것만은 아니었다.
당신께서는 한 때 판사 생활을 하셨던 외할아버지의 막내딸로 태어나 고이고이 자라나셨다. 그런 분이 종갓집 맏며느리가 되면서 삶의 환경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제사도 많고 언제나 사랑방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우환도 있었다. 시동생이 어린 나이에 갑자기 죽고 시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자리에 누웠다. 여기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신께서는 시집을 온 지 몇 년이 지나도록 태기가 없었다. 새 사람이 들고 난 뒤 액운이 겹치는데다가 아이까지 없으니 어찌 어른들이 곱게 보았겠는가? 공공연히 칠거지악(七去之惡)이 대두되었다. 남편을 새 장가 보내려는 쑥덕공론을 들으며 눈물로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상황이 더 나빠졌더라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를 형편까지 갔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은인 한 분이 나타났다. 점을 치는 중동할머니란 분이었다. 그 당시 이 분은 점을 잘 본다고 소문이 나서 근동의 많은 사람들은 길흉사가 생기면 이분의 점괘에 의지했다. 우리 할머니도 이분의 말이라면 절대적으로 신임하여 집안의 대소사가 생길 때마다 이 분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다행히 이 분이 할머니께 이 집 며느리는 아무 흠이 없고 박 씨 집안의 운수일 뿐이라고 하면서 만일 새 장가를 보내게 된다면 집안에 더 큰 근심꺼리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새댁은 분명히 대를 이을 아들을 꼭 낳게 될 것이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 이후 어머니는 중동할머니가 처방 해 준대로 뒤꼍에 칠성단을 모아놓고 꼭두새벽에 물을 길어와 목욕재계하고 치성을 드렸다. 그 때 올리는 밥도 여느 쌀로 짓는 것이 아니고 벼 알갱이 하나하나를 손으로 까서 밥을 지었다. 그런 치성이 계속되던 중, 천지신명도 어머니의 눈물어린 정성에 감동했던지 도사 한 분을 보냈다. 도사는 책 한 권을 건네주며 “이제 이 책을 치마에 받아라. 아들을 얻게 될 것이다.”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얼른 도사가 건네주는 책을 치마에 감쌌는데, 깨고 보니 꿈이었다. 그 이후 어머니는 태기가 있었고, 그렇게 하여 시집온 지 10년 만에 태어난 아이가 나란 사람이다.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다. 아무튼 어머니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신기한 태몽 꿈을 술회하셨는데 그 때마다 책을 받은 태몽과 관련하여 내가 교편생활을 하는 것과 원고지를 가까이 하는 것이 우연찮은 일이라고 말씀하며 웃으셨다.
아무튼 동리 사람들은 나를 일컬어 ‘태어날 때부터 효자’라고 했다. 내가 효자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머니는 쫓겨 갔거나 아니면 골방신세가 되었을 것인데, 내가 태어나는 통에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릴 때 내가 외가에 가면 외할머니는 나를 붙들고 “이짜식아, 어디 갔다가 그렇게 늦게 나와 니 어미 속을 그렇게 태웠노” 하면서 눈물을 닦곤 하셨다.
사실 어머니는 그 이후 4남매를 두셨지만 그래도 시집살이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쫓겨나간다든지 하는 극단적인 일은 피했지만 사랑스럽다든지, 당당하다든지 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한 번 어른들의 눈 밖에 나고 보니 좀처럼 회복하지 못했다. 남에게는 장점이 되는 것도 어머니께는 흠이었다. 심지어 키가 큰 것도 흉이 되었단다. 그래서 키를 작게 보이려고 늘 허리를 구부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원체 유순한 성품을 타고난 분이라 한 번도 내색을 하지 않고 참고 견디셨다. 정말 참는 데는 이골이난 분이었다.
당신께서 그래도 가장 인정받은 것은 대필(代筆)이었다. 어머니는 인근에서 ‘글이 가장 좋은 분’이었다.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옛날 유가(儒家) 집에서는 자녀를 결혼시키면 사돈끼리 예장(禮狀)을 보내고 상을 입으면 위로의 글을 보내는 것은 물론 대․소상에는 꼭 제문을 지어 보냈다.
그렇지만 그 당시 시골에서 우리 어머니 연배 되는 분들 중에는 글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또 글을 안다고 해도 문장으로 엮을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어머니께서는 글씨도 명필이고 문장력도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니 자연 대필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그 많은 집안의 일들 때문에 거의 탈진한 속에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기침을 쏟아내며 밤을 새워 글을 다듬으셨다. 어머니의 글은 연철로 붙여서 내리 쓰는 이른바 내간체였는데 삐침이나 획 하나에도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심혈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어머니께서 초를 잡았던 원고들이 지금도 고향집 서랍 속에 빼곡히 들어 있는데, 이는 당신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글들을 쓰셨는지 말해 주는 것이다.
아무튼 마음이 여리신 당신은 한평생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았는데, 혹시라도 노년에 본의 아니게 자식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상황이 일어날세라 매우 염려하셨다. 이를테면 좋지 못한 병으로 문 밖 출입도 하지 못하고 자리보전을 하여 대소변을 받아내게 한다든지, 아니면 치매라도 와서 주변의 웃음거리가 되는 추한 모습을 보일까 괜히 마음을 졸이셨다.
사실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는 거동이 불편하여 요강을 방안에 넣어 드렸는데 그것을 매우 부담스럽게 생각하셨다. 그래서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해도 아침이 되면 요강을 밖으로 내어놓곤 하였으며, 돌아가시는 그 날 아침까지도 요강을 힘들게 들고 나오셨다. 내가 놀라서 얼른 받으려 하자 “괜찮다. 아직 요강 들 힘은 있다.”고 하면서 기어이 주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날, 다시는 요강을 내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오냐, 잘 다녀오너라”고 하셨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당신께서는 조용히 눈을 감고 저 세상으로 가시고 만 것이다.
“죽음 복도 큰 복이라고 하는데, 자는 잠결에 가야 할 것인데.” 라고 늘 소망하시더니 당신의 소망처럼 자는 잠결에 고이 가신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주변사람들은 한결같이 죽음 복을 타고났다고 했지만 자식의 입장에서는 정말 너무 아쉽고 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아직도 고향집에 계실 것 같아 문을 열고 들어서지만 어머니의 기침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기침 소리에 묻어 들려오던 따뜻한 음성이 너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