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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마을(소설, 수기 등)

모르겠시유

        모르겠시유

                                                          

 

             

 

                                                              행전 박영환

 

 

 

 

문맹교육대 수업 장면

 

 

 

문맹 교육대에서 지발 좀 빼 주이소

 

9 5

오늘로써 문맹 교육대(文盲 敎育隊) 병사들의 교육이 시작된 지 꼭 5일째 되는 날이다. 저녁 시간, “교관님!”부르는 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오덕규 병장이 찾아왔다. 작달막한 키에 주근깨가 빼곡히 들어찬 얼굴, 헝클어진 통일화 끈, 금방 뒷주머니에서 꺼낸 듯한 작업모, 단정치 못한 모습이었다.

식사를 하다 말고 약간은 뜨악하게 그를 맞았다.

용건이 뭐지?”

하고 물었으나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긴장된 얼굴로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가 찾아 온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낮에 한글 독본을 가르치다가 꾸중을 한 일이 생각났다. 그것 때문일까. 아무튼 자리를 권하며 다시 물었다.

무슨 긴한 말이 있는 모양인데, 이야기 해보렴.”

이 때 그는 대답 대신 매우 조심스럽게 주위를 힐끔거리며 꼭 쥐고 있던 오른 손을 재빠르게 나의 하의 작업복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도로 끄집어내었다. 얼른 보아서 다섯 장은 될 듯한 파란 지폐였다.

아니, 이건?!”

황당한 그의 수작에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그의 당황한 얼굴은 이내 붉게 물들었다.

-. 교관님 고생하시는데 담배라도 사서 피우시소.”

순간 웃음이 피식 일어났다.

“담배라고, 누가 너더러 그런 걱정하랬어? 도로 가지고 가.”

,아닙니더, 그라고 지를 지발 문맹 교육대에서 좀 빼 주이소.”

갑자기 예리한 바늘에 정수리가 찔린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방금 뭐랬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맹교육대에서 빼달라니.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나갔다.

 

 

천막 교실, 문맹 교육대

 

문맹 교육대 -. 글자를 모르는 병사들을 위한 교육 기관이다.

초급 장교인 육군 소위로 처음 부임했을 때 부대 내에 의외로 문맹자가 너무 많은 데 놀랐다. 마침 ROTC 동기로 연대 정훈 장교를 하고 있는 이 소위를 만났을 때, 병사들이 기본 글자라도 익혀야 교육을 할 수 있고 경계 근무를 할 때 이름을 보고 교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러던 중 문맹교육대 같은 것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오갔다. 그러나 항상 손이 부족한 최전방 부대에서 병사들을 차출하여 따로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힘든 일이기에 이 소위와 나는 그냥 웃기만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그로부터 6개월여가 지난 8월 초순 흥분한 이 소위의 목소리가 전홧줄을 타고 신나게 왕왕댔다.

박 소위 드디어 허락이 났어.”

아니 뭐가 허락이 났는데.”

앞뒤를 잘라먹고 하는 말이라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신임 연대장이 병력을 파악하던 중 문맹자가 너무 많은 사실에 놀라더라는 것.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훈 참모인 이 소위가 문맹 교육대 설치를 건의하여 허락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그 참에 교관으로 박 소위를 추천했지. 맡아 줄 수 있겠지.”

그렇게 쉽게 허락이 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정말 잘 됐네. 최선을 다해보겠네.”

흔쾌히 승낙했다. 드디어 9 1, 연대 문맹 교육대는 제1 60명으로 개교를 했으며, 내가 그 교육대의 교관으로 발령이 났다.

사실 교육대란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막사며 교실 하나도 할애 받지 못했다. 연대 예비 대대인 3대대 연병장에 텐트를 쳤다. 그나마 40인용 텐트이고 보니 비좁기가 말이 아니었지만 그저 교육대를 허가해준 것만이라도 고맙게 생각하며 모든 것을 참아야 했다.

기간은 6, 이 짧은 기간에 오랫동안 갇히어 있던 어둠의 터널에서 벗어나야 한다. 수업을 하기 전, 개인 면담을 하면서 문맹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몇 마디 질문을 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누구지?”

시작하면서 농담 삼아 물어 본 것이었는데 정말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모르겠시유-.”

충청도 출신 권봉구였다. 이럴 수가, 잘못 들었겠지 하는 생각에 다시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역시 모르겠시유-’였다. 아무리 정규 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글자를 모른다 해도 대통령 이름을 모르다니. 생각보다 훨씬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상명세서를 작성했다. 평균 연령이 28세였다. 그 때 내 나이 24, 반 이상이 나보다 나이가 많고 어떤 이는 몇 째 형뻘이나 되는 연장자였다.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은 정필범 병장으로 실제 나이는 36세이지만 호적상 나이가 스무 살이어서 아주 늦게 입대한 것이다. 경북 칠곡이 고향인 그는 이미 10년 전에 결혼을 한 1 2녀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는 서글서글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기보다 어린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고 상급자에 대해서는 예절이 발랐다. 그를 학생장으로 임명했다. 정 병장 이외에도 기혼자는 28명이나 되었다. 이 사람들이 글자를 배우지 못한 주된 이유는 대부분 조실부모와 가난이었다. 그러나 특이하게 유복한 가정이면서도 문맹자인 사람이 있었다. 대통령 이름도 모르던 권봉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권봉구 상병- 28, 2년 전 결혼, 한 아이의 아버지, 충청남도 예산 출, 양친 다 계심, 아버지는 교회 장로이며 40마지기 정도의 자작농을 가진 부농집 아들. 객관적인 상황으로는 그가 학교에 다니지 못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문맹은 아무래도 선천적인 저능 때문이라고 판단되었다.

문맹 교육대에 교육생 차출을 하자 각 중대는 인원만 충당하기 위해 고문관들- 군대의 속어로 좀 바보스럽고 둔한 사람- 및 고령병에 잣대를 둔 것 같다. 그렇게 되니 이들에게 있어 문맹 교육대는 유배지나 위로 출장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자연 나의 의도와 그들의 교육 참여 태도에는 알지 못할 미묘한 틈이 있게 마련이었다.

 

 

좋은 기회

 

9 2

어제에 이어 자음과 모음을 가르쳤다. 교본은 육군 본부에서 발행한 한글 독본.

ㄱ ㄴ ㄷ ㄹ….

권봉구 한 번 읽어 봐!”

한참 미련스럽게 입을 이죽거리며 뜸을 들이던 그의 대답은 역시 모르겠시유-’였다.

오덕규 한 번 써봐.”

하릴없이 머리만 긁적이었다.

안 보고는 못쓰겠심더.”

이들은 자신의 까막눈에 대해 회한이 있었고 자식만큼은 어떻게 하든 대학까지 보내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배우려는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오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잠깐 일어나던 열의도 쉽게 포기하고 이내 식어 버렸다. 오덕규, 그는 연신 한숨을 쉬며 먼 산만 쳐다봤다.

내가 등이라도 툭 치면 그 때야 놀라 연필을 잡지만 연필심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부러지기가 일쑤였다.

 

9 3

드디어 참나무 회초리 몇 개를 교탁 옆에 세웠다.

교육 기간은 6주밖에 없다. 그 동안에 기초적인 읽기, 쓰기, 셈하기는 익혔으면 했다. 그래서 정규 시간 6시간 이외 밤에도 공부를 시켰다. 하루 10시간 이상 공부를 하는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학습 효과는 수업의 양과 비례하지 않았다.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독거리기도 하지만 매를 들 것이라고 엄포도 놓았다. 실제 회초리를 들기도 했다. 잠시 그 효과도 나타났다. 국어의 자모음도 산수의 아라비아 숫자도 일단은 느슨한 잠에서 깜짝 놀라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매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오덕규 병장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흥미를 잃어버린 그에게 있어 지난 5일간의 강행군은 생지옥이었고 이를 피하는 길은 원대복귀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는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27세의 통신병이었다. 그의 특기는 전신주에 오르는 것. 선을 깔기 위해 전신주에 오를 때는 그 날렵한 동작이 원숭이도 부러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원래부터 글을 배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제대 말년에 전신주에 오르지 않고 좀 쉬러 왔던 것이다. 그런데 교육대는 그가 생각한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동생뻘 되는 교관이 눈을 부라리고 매까지 들고 닦달하니 잘못 왔다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오덕규 돈을 도로 받아.”

그러나 그는 돈을 거두지 않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래도 교, 교관님 지는 지발(제발) 좀 빼주이소.”

돌아가지 못해.”

다시 언성을 높였지만,

교관님, 지를 정말.”

계속 치근대었다.

엎드려뻗쳐.”

그의 잔꾀를 단단히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적 효과도 기대하며 밖에 있는 병사들도 훤히 들리도록 크게 꾸중을 하며 몇 대를 야무지게 때렸다. 그러나 곧 멈추고 말았다. 갑자기 나 자신이 미워졌다.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매를 던져 버렸다.

오 병장 일어나 앉지.”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두 눈에 눈물이 흥건히 고였다.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오 병장, 교관이 밉지?”

…….”

그는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원대 복귀를 시켜줄게.”

건성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다면 정말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교육대 생활이 정말 힘들지. 늦게 시작하여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 교관이 매까지 동원하니 얼마나 힘들겠니?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병장이 오늘 돈으로 문맹 교육대에서 빠지려는 것은 여간 섭섭한 일이 니었어. 나의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는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 오 병장,  정도의 돈이라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닌데 그 귀한 돈으로 배움을 얻어 시원찮을 것인데 하물며 교관을 매수하여 배우는 것을 포기하려 들다?”

…….”

그는 고개만 푹 숙였다.

오 병장, 이것 하나만 물어 보자. 이 세상에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

뜻하지 않은 질문에 고개만 잠깐 들었을 뿐 이내 다시 숙였다.

아마 별로 없겠지?”

.”

그런데 사람들은 왜 공부를 할 것 같은가?”

…….”

하지 않을 수 없어 하는 것 아니겠니?”

그런 것 같습니다.”

오 병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

그리고 오 병장이 하기 싫다는 이 공부는 사회의 학생들이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서 하는 공부도 아니잖니?”

…….”

어떻게 보면 기초적인 글자를 배운다는 것은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배우기 싫으면 배우지 않을 문제가 아니잖니?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과 같은 필수적인 일이 아닐까?”

…….”

그러나 아무리 그런 것이라 하더라도 오 병장이 꼭 배우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원대 복귀를 하도록 해라.”

그렇게 허락하면 그가 좋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뜻밖에 그는 나의 소매를 꽉 잡았다.

, 아닙더. 교관님 죄송합니더. 지가 순간적으로 잘못 생각했심니더. 한 번 열심히 해보겠심더.”

…….”

금방 그렇게 마음이 바뀔 수 있는가? 믿어지지 않았다.

용서해 주이소, 정말 잘못했심더.”

…….”

두고 보이소. 우짜든지 열심히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배우고 말낌니더.”

그의 얼굴에는 종전과는 다른 의지가 보였다. 너무 빨리 태도를 바꾸기는 해도 그의 결심을 믿고 싶었다.

고맙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시작하자.”

나는 그의 투박한 손을 덥석 잡았다.

오 병장의 머리는 나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교관을 돈으로 매수하려는 머리를 잘만 활용한다면 그 어느 누구보다도 글자를 더 빨리 익힐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다.

 

9 6

오덕규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어제 덕규의 일도 있고 하여 교육대원들에게 잠시 몇 마디를 했다.

여러분과 나는 서로 빚진 일이 없습니다. 단지 여러분들은 몰라서 찾아왔고 나는 여러분들을 가르쳐 주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빨리 글자를 배웠으면 하는 욕심에 꾸중도 하고 심지어 매를 들기도 했습니다. 오늘부터 매는 들지 않겠습니다. 궁극적으로 공부를 하는데 있어 필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입니다. 의지가 없는 사람은 매가 아니라 매보다 더 무서운 총이 있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사회에서도 배우지 못한 글자를 군대에서 배우게 되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한 번 노력해봅시다.”

 

 

 

 

 

 

이름도 못 적고 눈만 멀뚱

9 7

사이다 병 몇 개를 준비했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 병사들을 위한 학습 보조 자료였다. 세 개를 붙여 을 만들고 다섯 개를 붙여 을 만들었.

봉구, ‘은 어떻게 만들지? 사이다 병으로 한 번 붙여 보겠니?”

글자는 잊어버리고 병 싸움만 붙였다.

그럼 간단한 이나 한 번 만들어 봐.”

모르겠시유-.”

오덕규는 그 일 이후는 먼 산을 바라보지 않고 열심히 연필에 침을 발랐다. 학생장 정필범도 간혹 여의치 않은 듯 주억거리며 몸을 뒤척이긴 해도 그래도 억척스럽게 글자를 붙들고 있었다.

오늘, 늦게 학생 한 명이 더 늘었다. 이름은 윤말룡’, 고향은 전라도 여수라고 했다. 나이는 31세라고 하지만 아직도 여드름을 툭툭 짜내는 십 대를 연상할 만큼 동안(童顔)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늦게 시작해서 어려울 텐데.”

제깟 놈이 어려우면 얼마나 어렵드랑께, 한 번 해 볼 거시랑께요.”

순박한 의지가 보였다.

 

 

9 8

너무 비좁아 연대 군수과에 텐트 하나를 더 부탁했다.

연대에 현재 보유하고 있는 천막은 하나도 없는데요, 박 소위님 인원이 너무 많은 게 아닌가요? 될 놈만 남기고 그 고문관 같은 짜식들 아예 원대 복귀 시켜 버리죠.”

어쩌면, 내 모습이 심훈의 상록수 주인공 영신의 모습과 같은 꼴이 되었다. 건물이 좁고 낡았다는 핑계로 주재소에서 130명 학생 중에서 80명만 남기라고 했을 때 영신은 눈물로 금을 긋고 50명을 교실 밖으로 나가게 했다. 그런데 소설 속의 아이들은 뽕나무에 오디 열매처럼 매달려서라도 글을 배웠다. 과연 이 사람들은 쫓아낸다면 그 아이들처럼, ‘배워야 산다 고 외치며 뽕나무에 매달릴까!

 

9 10

교육대 전 식구를 인솔하여 이사를 했다. 마침내 2대대가 진지 작업 관계로 막사를 비워놓았으니 우선 그 막사를 이용하라고 했다.

차량 지원도 없이 이십 리나 되는 길을 등짐을 지고 옮겼다. 힘은 들었지만 막사에 짐을 풀고 보니 새집을 지어 이사를 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한 번도 막사에서 생활을 해보지 못한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로웠다. 관물대에 지급품을 정리하고 막사 대청소를 했다. 빈 식당에 칠판을 걸고 식탁을 책상으로 이용하니 근사한 교실이 되었다.

저녁에 관물대 명찰함에 이름을 적어 넣게 했다. 그러나 10여명은 눈만 멀뚱하게 끔벅이고 있었다. 조교인 고 하사와 이 하사가 구박을 하며 명찰을 만들어 주었다. 언제 이 사람들도 자기의 이름을 적을 수 있을는지!

 

 

미운 오리 새끼, 쪽박만 깨어지고

 

9 11

노래로써 글을 가르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선 흥미가 있어야 학습 효과가 있다. 노래의 곡은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쉬운 곡 복남이네 어린 아이로 했다. 가사는 새로 만들었다.

김 일병과 박 상병은 연필 들었네. 김 일병과 박 상병은 공책 들었네. 김 일병과 박 상병은 편지를 쓰네. 다 같이 입을 모아 글을 배우세.’

대부분 반복되는 글자이고 너무나 보편적인 단어들이기에 의욕을 북돋우기에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다. 노래도 배우고 글자도 배우는 이른바 일석이조를 생각한 것이다.

괘도에 가사를 크게 써놓고 노래 연습부터 시작했다. 내가 선창을 하고 따라 부르게 했다.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김 일병과 박 상병이 할 때는 좌우 병사들을 보게 하고 연필과 공책이 나올 때는 연필과 공책을 높이 들게 했다.

그런데 나도 음치이지만 이 사람들, 정말 음치였다. 전혀 곡을 만들지 못하고 타령조가 되어 버렸다. 동작은 제 마음대로 왔다 갔다 했고 곡도 한 소절 한 소절 복창을 할 때는 비슷한 흉내가 나지만 전곡을 한꺼번에 부르게 하면 모두가 작곡자였다. 이 짧은 곡과 무려 2시간이나 씨름했는데도 한 번 타령조는 영원한 타령조였다. 곡은 그러해도 설마 글자야 알려니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연필이 공책 되고 공책이 연필 되어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결국은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니라 이석무조(二石無鳥)가 되어버렸다.

 

9 13

2대대 전 병력이 다시 철수한다는 전갈을 받았다. 상황이 갑자기 바뀌었단다. 겨우 3일 만에 다시 막사를 내어놓으라니 이 무슨 날벼락인가.

다시 2대대 연병장 구석에 40인용 천막을 치고 피난민 신세가 되었다. 막사의 편안함을 맛보고 나니 처음보다 더 불편했다. 어깨와 어깨가 서로 부닥치고, 아직 마르지 않은 생 억새를 밑자리에 깔고 매트리스를 얹어 놓았으니 풀이 썩는 퀴퀴한 냄새가 쉬척지근했으며 병사들의 발 고린내가 눅눅하고 쿠릿쿠릿하여 코를 찔렀다. 이런 판국에 2대대 본부에서 빌려 쓰고 있는 남포등까지 돌려 달라고 했다. 정말 설상가상(雪上加霜)이었다. 나는 오히려 현재 쓰고 있는 2개의 남포등으로는 어두워 하나 더 빌려 쓸 심산이었는데 동냥을 요구하기 전 쪽박이 먼저 깨진 셈이었다.

등불을 빼앗긴 천막, 촛불 몇 자루가 어둠을 밀어내느라고 안간힘을 다하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좀 가까이 모여서 책을 보도록 하자.”

풀죽은 늙은(?) 학생들이 머리를 맞대고 책을 폈다. 내일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등불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꿀을 바를까?

 

9 14

시계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불침번과 동초를 서다가 교대를 하는데 애로가 많심더.”

학생장 정필범의 말이었다.

시계를 볼 줄 모르는 사람, 손 들어봐.”

그래도 약간은 쑥스럽든지 곁눈질만 할 뿐 올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 짜석들아, 하이고 마 부끄러운 줄은 우애 아노. 바딱 올리 봐라.”

정 병장이 채근을 하자 슬금슬금 손이 올라갔다. 그런데 무려 15명이나 되었다.

초등학교 교실처럼 시계의 모형을 그렸다. 짧은 것은 시침, 긴 것은 분 침, 하루는 24시간, 1시간은 60. 손가락으로 종이 바늘을 움직였다. 몇 번이나 계속되는 반복. 바늘의 움직임보다도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권봉구, 시간을 한 번 말해보지.”

그 때 시간은 8 30분이었다.

모르겠시유-.”

너무 답답했다. 다시 바늘을 돌리며 천천히 설명했다. 그러나 시침과 분침이 아무리 좌에서 우로 헐떡이며 돌아가도 그에게 있어 시계 바늘은 종이 막대기에 불과했다.

, 여덟 달 반도 몰라.”

서 하사가 노골적으로 빈정대도

모르겠시유-.”

 

9 15

18과를 배울 차례이었다. 여태껏 받침이 없는 글자를 공부했으나 이젠 받침이 있는 글자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쯤 오게 되니 개인 간의 격차가 심하게 벌어졌다. 학생장 정필범처럼 열심히 따라온 사람들은 성큼성큼 잘도 나가지만 권봉구와 같은 이는 아직도 제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 똑같이 진도가 나간다는 것은 맞지 않았다. 3개조로 반을 나누었다. 이를테면 수준별 수업을 시작한 것이다.

내가 맡은 1조는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다. 자음의 ㄱ ㄴ ㄷ ㄹ, 모음의 ㅏ ㅑ ㅓ ㅕ 를 다시 배우는 것이다. 고 하사의 2조는 종전의 진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중급이다. 서 하사의 3조는 상급반에 해당되며 대부분 글자를 한 번 정도만 읽어 주고 쓰는 연습을 주로 하도록 했다. 3조는 자신이 있을 때 개인적으로 검사를 받아 다음 진도로 나갈 수 있도록 했다. 3조에는, 정규학교는 다니지 않아도 기본 글자를 어느 정도 익힌 사람도 있었고 또 여기에서 처음 배우는 사람이라도 두뇌 회전이 빠르고 열심히 노력하여 진도가 빠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1조는 다시 복습을 해도 제자리에서 맴을 돌았다. 유태인의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철들 무렵이면 성서를 펼치고 거기에 꿀을 떨어뜨린 뒤 아이들이 입을 맞추도록 한다. 이것은 책이 달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의식이다. 이 덕분에 유태 민족만은 문맹이 없다. 나는 이들에게 어떤 꿀을 발라야 할까?

 

 

새로운 조교, 이천우 하사

 

9 17

이천우 하사

분대장이나 조교가 아닌 이제 12살 먹은 꼬마 하사다.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다가 부대에 들어온 녀석.

오늘 아침, 연대 인사 장교로부터 급히 와 달라는 전갈을 받고 들어갔을 때 나에게 소개된 아이다. 물론 천우는 정식으로 군대에 입대한 병사가 아니다. 이 아이는 1대대 3중대 이 상병의 아들이다. 천우가 우리 문맹교육대에 오게 된 사연은 좀 기구하다.

천우의 아버지도 호적이 잘못되어 37살에 군에 입대했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군에 입대하자 길거리에서 행상을 하며 천우를 키웠다. 그런데 천우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어머니의 속을 태우지 않고 공부를 잘했다. 미술에 소질이 있어 서울시 교육청이 주최하는 미술 대회에 나가서 입상을 하는 등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 그러나 5학년이 되면서 아이는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빗나가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지 않고 만화방에서 놀거나 공연히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결석을 했다. 열심히 나가던 교회도 나가지 않았다. 이 아이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예수를 믿은, 즉 모태(母胎) 교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에 아들이 장차 하나님 나라를 지키는 일꾼이 되어 달라는 뜻으로 이름까지 천우(天佑)라고 했다. 그런 아이가 이렇게 되자 어머니로서는 심한 충격이었다.

거기에다 천우에게 도벽까지 생겼다. 집에 있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물건이나 돈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는 타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체벌로 혼을 내었으나 천우의 비뚤어진 행동은 점차 더 빗나갔다.

천우가 다니던 교회 목사가 이 사실을 알고 길 잃은 어린양을 구하려는 심정으로 천우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갔다. 처음 얼마 동안은 목사가 설득하고 관심을 기울이자 학교에도 나가고 도벽도 없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이제 옳게 되어 가는가 보다 하고 약간 방심하는 사이에 급기야 목사 집안의 물건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마침내 성경책과 찬송가까지 가져가자 목사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들고 말았다.

어머니는 억울하고 분했다. 남편이란 자가 아무 대책 없이 늦게 군대에 입대하는 통에 리어카를 끌며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자식이란 놈이 어미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다니. 하나님도 원망스러웠다. 거의 이성을 잃어버린 그녀는 군대 생활을 하는 남편을 찾아와 분풀이를 하듯 마구 퍼부었다.

마흔이 다 되어 무슨 염병할 군대 생활이요. 남편 복 없는 년 자식복도 없다더니 나를 두고 한 말이지. 구렁이를 키웠으면 키웠지 나는 이 아이를 도저히 징그러워 키우지 못하겠소. 당신, 이 아이 김일성이를 주든지 내다 버리든지 마음대로 해요.”

아이를 팽개치고 그 길로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난감한 일이었다. 경계근무나 진지작업을 계속 해야 하는 아버지가 이 아이를 맡을 수는 없지 않는가. 마침내 연대장이 이를 알고 고심하던 중 문맹 교육대가 맡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데리고 가게 한 것이다.

교육대에 데리고 오면서 부대 앞 수선소에서 천우에게 줄 군복 한 벌을 줄였다. 부대 내에서는 사복을 입고 생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군복은 줄이니 그런 대로 맞았지만 신발은 맞는 것이 없었다. 제일 작은 군화를 신겼지만 12살짜리 꼬마에게는 그야말로 모기발의 워커였다. 신발 끈을 최대한 동여매었다.

아이는 표정이 굳어 있었다. 안심을 시키기 위해 말을 걸고 장난도 쳤으나 입술을 꽉 깨물고 전혀 말이 없었다. 자칫하면 울음보가 터질듯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점차 풀어지며 밝아졌다.

군복, 군화에 이어 모자도 지급했는데 계급장이 없어 밋밋했다. 무슨 계급장을 달아줄까 하고 생각했는데 이때 이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글 독본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겠구나.”

교본을 펼쳐 보이자 순간 녀석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니?”

저를 무시하지 마세요. 이 정도가 아니라 어려운 동화책도 마음대로 읽고 편지도 쓸 수 있어요.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아버지께 편지도 쓴걸.”

그래, 미안 미안.”

순간 녀석에게 조교란 직책을 주고 싶었다. 사실 천우의 한글 실력이면 우리 교육대 조교가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이 하사, 오늘부터 내 조교로 임명한다.”

익숙지 못한 조교란 말에 반문을 했다.

조교가 무엇입니까?”

, 조교란 교관을 도와서 병사들이 글을 잘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 소위님은 선생님이시죠?”

선생님, 응 그래, 선생님이지. 그런데 우리 군대에서는 선생님이라 하지 않고 교관이라고 부르고 있단다.”

선생님, 교관님, 나는 조수-, 아니 조교.”

녀석은 아무래도 익숙지 못한지 몇 번이고 교관과 조교란 단어를 반복했다. 그러나 싫지 않은 듯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하사 계급장을 달았다. 갈매기 두 마리가 나는 하사 계급장. 이건 유래가 없는 대 특진(?)이다. 명찰도 하사관 명찰로 까아만 바탕에 노란 글씨로 이천우라고 선명하게 새겼다.

, 잘 어울린다. 장차 장군감이야.”

어깨를 툭 쳤다. 군대식 인사하는 방법도 가르쳤다.

이천우 하사

크게 부르자 배운 대로 부동자세로 들어가며

필승.”

거수경례를 했다.

그의 구령 소리는 어느 새 여느 병사 이상으로 힘차고 옹골찼다.

좋아, 하사 자격이 있어.”

감사합니다.”

녀석은 맹랑했다.

오늘, 새로 부임한 조교를 소개한다.”

교육대 병사들에게 이 하사를 소개했다. 병사들은 느닷없는 꼬마 하사의 출현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는 대충 그가 우리와 함께 교육대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 주고 그가 5학년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 점은 자신들의 선배가 되니 나의 말이 전혀 농담만이 아닌, 어쩌면 정말 조교도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 하사는 신바람이 나서 칠판에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하게 적었다. 조그마한 꼬마가 얄따란 입술을 쉬지 않고 쫑알대며 자기의 이름 및 주소를 단숨에 적어 나가니 머쓱하고 기까지 질려 머리를 긁었다.

저녁에 이 아이를 내 옆에 재우면서 단단히 부탁했다.

부대에 온 이상 앞으로 내 허락 없이 행동을 하면 안 된다. 특히 부대 밖으로 나가는 일은 절대로 안 된다.”

만일 이 아이가 서울에 있을 때처럼 마음대로 행동하다가 도망이라도 가버린다면 이건 보통 낭패가 아니다.

 

 

9 18

이 하사님, ‘ 을 붙이면 무엇입니까?”

병사들의 지원 요청이 쇄도했다. 그는 신나게 폴폴 뛰어다녔다.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때로는 몇 번 가르쳐 주어도 금방 잊어버리는 병사에게 크게 꾸중도 했다.

이 바보야.”

그 통에 때때로 폭소가 일어났다. 조교로 임명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9 19

천우는 아버지 이 상병과 함께 교회에 다녀왔다. 천우는 연대장의 특별한 배려로 전방 부대이지만 일요일만큼은 아버지와 함께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오후에 돌아오면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조잘대었다.

목사님께서는 꼬마 군인 아저씨라고 소개했어요. 어떤 할머니는 저를 붙들고 마구 우셨어요.”

그는 교회에서 얻어 온 선물 꾸러미를 전리품처럼 풀어놓았다. 과자와 내의, 양말이며 김치와 참기름도 있었다. 저녁, 천우 아버지 이 상병은 천우의 볼을 몇 번이나 비비다가 끝내 큰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귀대했다.

가을 해거름의 주황색 햇살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9 20

 

- 릴케의 유년 시절의 고독에 나오는 구절이 생각난다

나는 어린 아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나는 어린 아이와 어울리는 법을 통 모릅니다. 나는 어린 아이와 어울리게 되면 망설여지고 당황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의 세계는 나에게 열려진 일이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에게도 판단할 권리는 있습니다. 나도 예전에는 어린 아이였으니까요.’

 

  9세 때, 이미 부모와 별거했기에 유년 시절을 고독하게 보냈던 릴케도 어린아이와 어울리게 되면 망설여진다고 했는데 나는 천우의 마음을 얼마만큼 가까이 가서 다독거릴 수 있을까?!

천우를 데리고 부대 뒤편 언덕에 올라갔다. 멀리 추수를 기다리는 황금빛 벼들이 광활한 벌판에 출렁이고 있었다. 가볍게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천우는 태어나기 전부터 교회에 다녔다면서.”

.”

그러면서 부모님 속을 태우는 짓을 하면 되니?”

잠시 말이 없던 그는 맹랑한 말을 늘어놓았다.

우리 하나님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회개를 하면 용서를 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100번 중 99번 잘못을 해도 한 번만 용서를 빌면 죄를 사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걸 믿고 마음대로 나쁜 짓을 했니?”

저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교회와 학교에 나가지 않고 물건을 훔쳐내는 것이 나쁜 짓 아니?”

그렇게 하여야만 어머니가 말을 붙여 줍니다.”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이니?”

어머니는 항상 늦게 돌아오십니다. 저는 밤늦게까지 혼자 기다리다가 어머니가 돌아올 때 100점짜리 시험지를 자랑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피곤하다면서 이내 잠자리에 들어버렸습니.”

…….”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러면 그의 빗나간 행동도 어머니의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이란 말인가? 마치 소변을 가리던 아이가 부모의 관심이 식어지면 갑자기 야뇨(夜尿) 증세를 보이는 것처럼. 이런 행동을 일컬어 심리학자들은 이른바 퇴행(退行)’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아이의 퇴행을 받아 주기에는 너무나 생활고에 지쳐 있었다. 그러는 속에 천우의 불만은 늘어나고.

 

 

 

몽구

9 21

산수 시간, 100단위 더하기와 빼기를 가르쳤다. 132-19=( )하는 문제를 내었다. 12에서 9를 빼면 3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대체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모르는 학생들이 많다. 10을 빌려오고 1을 더해주는 설명을 해주었더니 137+13=151이 된다. 7+3 1을 더해 버린 것이다.

포인트란 소설에 나오는 숫자에 대한 유희가 생각났다. 0 이란 숫자를 동정하고 3에 대해서는 자꾸 아첨을 하던 일. 권봉구는 아첨도 동정도 하지 못하고 달관(?)의 경지에서 묵상에 잠겼다. 오덕규는 그런 대로 계산이 되었다. 계산이 잘되지 않는 병사들을 위하여 돌멩이 스무 개를 준비했다. 아주 원시적인 계산 방법을 택한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전, 담을 물건은 있으나 담을 그릇이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릇도 없고 담을 물건도 너무 빈약하거나 아예 없었다.

 

9 22

제법 스산한 날씨다. 문맹교육대가 시작된 지 어느덧 3주가 지났다.

3주를 총 평가하는 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100점짜리와 0점짜리는 항상 정해져 있다. 100점은 3조에서 0점은 1조에서 나왔다. 윤말룡은 다른 사람보다 일주일 늦게 시작해도 당당하게 상급반인 3조 소속이고 이 번 시험에 100점을 받았다.

그러나 권봉구의 답안지는 역시 0점이었다. 권봉구의 답안지에는 빈자리가 없다. 열심히 적긴 적었는데 완성된 글자가 하나도 없었다. 속기록을 했는지 스페인어인지 희랍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게으름을 피운다거나 잔꾀를 부리지 않는다. 이 사람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공부 시간에도 잠시 놀지 않고 공책을 메운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권봉구 한 번 읽어 봐.”

모르겠시유-.”

대답은 항상 일정하다. 봉구는 동료 병사들에게도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다. 간혹 두툼하게 생긴 입술 사이로 혼잣말이 나오긴 해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누군가가 말을 걸어와도 첫 마디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몇 번이나 다그치면 겨우 몇 마디 할 뿐이었다.

대부분 모르겠시유-’로 일관한다. 권봉구의 말 중 제일 분명한 말이 모르겠시유-’이다. 물론 별로 아는 것도 없지만 설사 안다고 해도 모르겠다고 표현해버리는 것 같다. 오랜 습성이 되어버린 대답. 하기야 3주가 지 지금까지도 자기 이름 하나도 쓰지 못하는 형편에 알면 무엇을 알겠는가?

 

 

9 23

오늘도 권봉구와 이름 쓰기를 하느라고 실랑이를 벌였다. 그 동안 권봉구란 이름을 완성시키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구몽구로 적을 뿐이다.

오늘은 기어이 성공하리라. 다시 솥뚜껑 같은 손을 잡고 이름 그리기 전쟁을 시작했다. 달래기도 하고 우격다짐도 했다. 그도 코를 훌쩍이며 콧잔등에 땀이 맺히도록 노력했다. 그러기를 100여 차례 반복. 그렇게 집중적 연습을 했으면 머리가 거꾸로 가면 손이라도 바로 가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역시 도로 아미타불. ‘의 우측 날개와 바퀴가 탈영하고   뿔이 망가져 구몽구로 원대복귀하고 말았다.

며칠 전만 해도 이름을 잘못 쓰는 학생이 몇 명 있었다. ‘김일준 감밀춘이 된다든지 노병근 도평그로로 둔갑하던 경우다. 이제 3주가 지난 지금, 그들은 자랑스럽게 자기 이름을 적는다.

 

9 24

구몽구’, 언제 이름을 바로 찾을 것인가? 오늘도 그의 이름 찾기에 한 판 승부를 걸었다. 병근이와 일준이도 옆에서 안타깝다는 듯이 거들었다. 오늘따라 봉구가 이상하게 손을 가리고 끙끙대며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잠시 뒤, 종이 위에 나타난 이름은 몽구가 아닌가?! ‘몽구는 아는 일이지만 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아무렇게나 쓰다 보니 우연하게 생긴 것일까?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을 가리키며,

이건 뭐니?”

대답 대신에 희미한 미소만 띠었다.

잘못 적은 것이니?”

그 때 그가 한 말

한자 이름이유-.”

한자 이름, 깜짝 놀랐다. 아하! 그때야 짚이는 게 있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예산의 부농(富農), 권봉구의 집에 비상이 걸렸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안타깝게도 지능발육이 너무 느렸다. 아버지 권 장로는 온갖 몸부림을 쳤다. 아무리 그래도 이름 석 자야 써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가르치고 가르쳐도 그의 이름은 이상하게도 구몽구로 굳어버렸다. ‘가 아니고 이야, 이름은 봉구이고. 안달이 나서 가슴팍을 치던 아버지는 혹시 한자는 되려나 하는 생각에 자를 들이댔다. 그러나 이 역시, ‘씨의 오른 쪽은 빼먹고 씨가 되었다. 야 이놈아 배가 고프면 밥을 먹지, 조상이 물려 준 성을 빼 먹어. 장탄식을 했을 봉구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이 여기까지 떠오르자 봉구의 부모가 하나님을 찾은 것도 어쩌면 봉구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절대자에게 하소연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한자라고 했니?”

씨익 웃었다. 이름을 가지고 계속 실랑이를 벌이니 한자 이름이 떠올랐던 것 같다. 할 말을 잃고 밖으로 나와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물었다.

 

 

저도 진급을

 

9 25

교관님, 저도 진급 좀 시켜 주십시오.”

꼬마 이천우 하사의 간청이다. 그의 모습이 꽤나 진지했다.

갑자기 진급이라니?”

위병소에서 깡통 계급장이라고 깔보고 내보내 주지 않습니다.”

깡통 계급장’, 군대에서 흔히 사병들의 계급장을 양철로 만들었다고 깡통 계급장이란 속어로 비하한다. 녀석도 그 말을 어느새 주워듣고 섬긴다.

뭐라 했니!”

꿀밤 한 대부터 올려붙였다. 앙증스럽게 고개를 비틀었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위병소 근무병들에게 단단히 부탁을 했다. “너희들, 김일성이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임무가 이천우를 지키는 것이.” 이렇게 엄명을 했으니 아무리 떼를 써도 밖으로 내보낼 턱이 없었다.

천우가 부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그의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갈 때뿐이었다. 그러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음대로 뛰어다니던 녀석이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그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가 군복을 입고 이천우 하사란 희화적인 모습으로 부대 내에 갇혀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학교에 다니고 방과 후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마음대로 뛰어다녀야 한다. 조롱에 갇힌 새처럼 단조롭고 슬픈 일과를 보내는 그가 몹시 안타까웠다. 그래서 며칠 전 연대 본부에 건의를 한 적이 있다. 천우를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에 보내자고. 그러나 대답은 ‘NO’이었다. 동정을 해서 내놓으면 언제 도망을 갈지 모르고 그리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것. 곧 아버지 이 상병이 제대를 할 것이니 그 때까지는 좀 안됐지만 꼭 잡고 있는 것이 상책이란 것.

교관님, 정말 진급 좀 시켜 주십시오.”

녀석이 다시 칭얼대었다.

진급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줄 아니

에게, 거짓말. 전에도 내 계급장을 마음대로 달아 주셨잖아요, 그리고 장군감이라고 하셨잖아요.”

아하, 그걸 잊었구나. 녀석은 내가 참모총장이나 되는 줄 아는데. 말을 바꾸었다.

그래, 그래, 그런데 이 하사, 언제 하사가 됐지?”

“9 17일입니다.”

그는 목에 심줄이 생기도록 크게 대답했다.

아주 씩씩하다. 그런데 이제 겨우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군.”

그렇습니다.”

나는 그의 모자를 벗겨 갈매기가 부지런히 날아가고 있는 그의 계급장을 가리켰다.

이천우 하사.”

!”

우리 교육대에 하사 계급장을 단 사람이 몇 명이지?”

세 사람입니다.”

그것 봐, 이렇게 많은 병사 중에 세 사람밖에 없잖아. 그러니 이 계급장도 대단한 거야. 그리고 천우가 하나 알아 둘 것은 계급이란 그렇게 쉽게 올라가는 게 아니란다. 나를 봐라, 나도 천우의 나이 정도에 군대에 들어와 이제 겨우 소위가 되었단다.”

그게 정말이어요?”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믿건 말건 이왕 내친 김에 시침을 뚝 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네 눈엔 내가 거짓말쟁이로밖에 보이지 않니?”

그럼 저도 교관님 나이가 되면 소위 계급장을 달 수가 있나요?”

그럼 물론이지.”

그럼 그 땐 저도 경례를 받으며 위병소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나?”

물론이지. 그 때 병사들은 이천우 소위님에 대하여 경례하면서 받들어 총을 할 것이다. , 근사하겠다. 그 때 이 소위는 위병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래 수고가 많다, 계속 근무해 하면서 위병소 문을 나설 것이다.”

천우는 나의 나이를 묻더니 손가락을 꼽았다.

어휴, 10년도 넘네.”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이 불만이긴 해도 가능성이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그래도 발그레한 입술에 미소를 머금었다. 언젠가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하여 주겠지.

 

 

우리 마누라가 도망 간대유-.

 

9 26

2대대 식당을 빌려 영화 구경을 하게 되었다. 영화구경이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발을 구르고 박수를 쳤다. 어린애들처럼 좋아했다. 갑자기 발을 굴려서 그런지 천막 안은 목이 따갑도록 먼지가 부옇게 일었다. 하기야 지루한 공부보다야 예쁜 배우가 나긋나긋한 미소를 짓는 영화가 좋은 것이야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이들 중에는 영화란 것을 처음 구경을 하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정훈 장교 이 소위가 특별히 가지고 온 영화였다. 그는 특별히란 말을 강조했다. 그는 비록 같은 소위지만 문맹 교육대를 관장하는 연대 참모이다. 그러나 그의 빈약한 계급으로는 문맹 교육대를 충분하게 지원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그가 할 수 있는 큰 선물 - 순회 영화치고는 필름이 비교적 새 것이고 그것도 예하 부대에서는 처음 상연을 했으니 - ‘특별히란 말을 붙일 만했다.

그런데 영화 제목이 팔 푼 며느리였다. ‘하필이면 팔 푼 며느리는 뭐람.’ 시계 보는 법을 가르치면서 8 30분이 헐떡일 때 여덟달 반이라고 구박을 하던 조교 서 하사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이 영화는 장병 여러분들의 즐거운 병영 생활을 위해서 ○○회사에서 희사한.’이란 자막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지만 빨리 지나가는 글자들을 따라 읽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얀 눈송이가 하염없이 쏟아진다고 착각이나 하지 않았으면.

 

 

9 27

문맹 교육대 2기 대원 차출을 위한 공문을 보내기 위해 연대 본부에 다녀오니 권봉구가 큰 입을 이죽거리며 콧물까지 섞어 섧게 울고 있었다.

어이, 봉구 왜 우니?”

고개를 파묻고 있는 그의 얼굴을 억지로 들게 했더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무슨 일이야?”

서 하사에게 물었다. 필시 이 작자의 짓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 하사는 웃기만 했다. 이 때 봉구가 억울함을 일러바치는 아이처럼 눈을 힐끔거리며 다시 눈물을 훔쳤다.

우리 마누라가 도망 간대유-.”

항상 입안에서 얼버무릴 뿐 이렇게 분명히 말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

또 서 하사 짓이구나.”

서 하사를 질책하자 서 하사는 슬슬 꼬리를 뺐다.

서 하사가 봉구를 울린 것은 이번이 처음 아니다. 벌써 여러 차례다. 몇 번이나 그러지 말라고 해도 봉구가 번번이 속는 것이 재미가 나서 자꾸만 장난을 치는 것이다. 그러니 봉구는 아내의 편지가 올 때마다 애간장이 타서 이렇게 닭똥 같은 더운 눈물을 쏟는 것이다.

권봉구는 관심을 보이는 일이 별로 없지만 마누라에 대해서는 끔찍했다. 마누라 이야기가 나오면 귀를 쫑긋하고 거기에다가 도망이란 말만 나오면 바로 눈물을 쏟았다.

그는 마누라 하나는 잘 얻은 것 같다. 아마도 넉넉한 그의 가정 덕분에 가난한 집 처녀가 시집을 온 것 같다. 그의 부인은 문맹자가 아니었다. 아내는 결혼을 한 뒤 2개월 만에 군대에 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자주 편지를 보냈다.

이 교육대에는 권봉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편지도 종종 온다. 그런데 이 문맹자들 속에 편지를 읽을 사람이 누가 있는가? 자연 조교들이 읽어주었다. 간혹 천우가 읽어 주려하면 잽싸게 낚아채고는 장난을 걸었다.

특히 서 하사는 목이 마르단 둥 딴 청을 부려 막걸리 등을 얻어먹은 뒤에야 큰 선심이나 쓰듯 읽어 내려갔다. 그러고도 편지를 바로나 읽어주는가. 헛기침을 컹컹하며 자기 마음대로 편지 내용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갔다. 특히 병사들의 아내에게서 온 편지는 100% 새로 작문하여 읽어주었다.

주로 새서방과 눈이 맞아 멀리 도망가니 이제 잊어 달라는 것이 주 메뉴였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면서도 많이 속았다. 뭐가 어째, 새서방의 그것이 나보다 그렇게 좋다고, 이년이 장리를 내어 매어둔 목맨 송아지까지 팔아 간다고, ! 이 세상에 믿을 년 없어. 가슴을 치고 이를 갈았다. 그러나 한번 속은 사람은 다시 속지 않았다. 다음에 편지가 오면, ‘우리 마누라 새서방과 눈이 맞아 도망갔는지 한번 봐 주소하고 먼저 선수를 쳤다. 이렇게 되면 싱거워서도 천우야 네가 읽어 줘라 하고 팽개치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봉구는 그게 아니었다. 매번 마누라가 도망간다고 하면 울어대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여보 밥만 먹고는 못살겠시유-, 이젠 어쩔 수 없어유-, 금반지루두 안되유-.”

이 말에 덕규가 끼어들었다.

, 봉구야, 금반지루두 안된대. 니 금반지 사좃나?”

새서방은 좋아유-. 당신 것보다 훨씬 좋아유-.”

서 하사는 일부러 충청도 억양을 넣어 곡조를 넘기며 계속 읽어 나갔.

아이고 이걸 어쩔 것이유-”

코믹하게 두 눈을 찔끔질끔했다.

쯔쯔, 얼마나 좋아서-.”

고 하사가 양념을 쳤다.

이제는 도망가유-, 찾지 말아유-, 빠이 빠이.”

손까지 흔들며 도망가는 시늉을 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서방님을 남겨두고.”

황금심의 가락을 흥얼댔다. 이쯤 되면 봉구는 온몸을 비틀며 오열했다.

봉구한테 온 편지 가지고 와.”

내가 언성을 높이자 서 하사가 하의 뒤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편지를 꺼냈다.

봉구 부인의 편지는 여느 여인네와 다를 바 없는 그리움에 촉촉이 젖어있는 일상적인 안부편지였다. 나는 봉구의 가슴이 시원하도록 크게 읽어 주었다.

 

여보!

그 동안 군대 생활을 하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신지요?

여기 예산의 아버님 어머님 등 전 가족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 속에 무사합니다. 우리 아기는 이제 서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휴가 때는 걸음을 잘 걸을 것 같아요. 지난 장날 시누이가 시집을 가기 위하여 읍내 김 씨 댁 총각과 선을 보았습니다. 올해는 비가 순조롭게 와서 대풍년이 예상됩니다.

요즈음은 교육대에서 글을 배운다고요. 참 다행이네요. 제 편지도 당신이 직접 읽고 답장을 썼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럴 날이 꼭 오기를 바랍니다.

항상 당신의 무사한 군대 생활을 주님께 기도드릴게요.

안녕히 계셔요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 드림.

 

봉구 잘 들었지. 도망간다는 말이 어디 있어. 안심하라고.”

봉구는 오랜만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봉구야, 아내도 부탁을 했잖아. 제 편지도 당신이 직접 읽고 답장을 썼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당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글자를 익혀야지.”

봉구는 머리를 긁었다.

 

 

귀관만 믿어

 

9 28

교관님 공책이 다 떨어졌심더.”

그래, 새로 준비하마.”

며칠 전에 사주었던 공책이 벌써 다 떨어졌단다.

좀 아끼지 새끼들, 끄싱이(지렁이) 오줌 싸는 짓 디기 하고 안잤네. 사 덕지덕지 입혀 황칠을 하는 자석들이 공책 빵구를 내기는 냈더라만.”

학생장 정 병장, 미안한 마음에 내가 들으란 듯이 혼잣말을 하고는 굵은 눈을 슬슬 돌리며 헛기침을 컹컹했다.

안다, 알아, 내가 왜 몰라.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만져 보았다.

이들의 학용품 및 자질구레한 소모품은 내가 많이 보충했다. 연대에서 지원하는 학용품 및 소모품은 항상 감질이 났다. 좀 더 지원을 요구해도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기만 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내가 좋아서 하는 짓거리니 좀 떠맡겨도 괜찮다는 계산도 깔려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된 데는 이 소위의 책임(?)도 크다. 이 소위 녀석, 문맹 교육대 허락을 받는 데만 급급하여 허락만 해주면 박 소위가 모든 것을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라고 했단다. 박 소위의 봉사정신이니 뭐니 하는 필요 없는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던 모양이다.

개교에 즈음하여 연대장은 나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말했다.

박 소위에게 맡기면 틀림없다고 하더군. 귀관만 믿어.”

그게 다 복선이라면 복선이었다. 사실 요모조모로 따지자면 애당초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젊은 혈기 하나만 믿고 뛰어 들었다. 그러나 너무 인색한 지원에 야속하다는 마음이 문득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이 소위가 공연히 켕겨서 이리저리 발 돌림으로 구걸을 해도 별무 소득이었다. 그는 순해만 빠졌지, 어르고 달래는 재간을 부릴 넉살은 없다.

, 이번에는 알장이 좀 많은 것으로 준비했다. 갈라 주도록 해라

알짱이 적은 것을 사도 되는 데요.”

정 병장이 내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가 고마웠다.

말룡이 빼곡히 연습한 공책을 슬며시 내밀고 새 공책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제든지 새로 바꿔 주는 감요?”

그래그래, 언제라도 다 채우기만 해라. 항상 준비하마.”

제법 많이 준비했는데 단 번에 동이 났다. 북어 껍질처럼 꺼칠한 손마디를 움직여 이름들을 적는 모습이 보기 좋다. 천우는 새 공책에 일기를 적겠다고 했다. 그의 일기는 어떤 내용으로 가득 차게 될까? 연병장 울타리에 낙엽이 누웠다.

 

 

여보님 전상서

 

9 29

3조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1, 2조에 비하여 약간의 진도가 빠르다고 하지만 4주 정도 글을 배워 편지를 쓴다는 것은 무리이다. 바늘을 허리에 매는 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일주일 뒤면 모든 이의 마음을 고향에 묶어 두는 한가위이다. 이 때 몸은 비록 군에 있어 고향을 찾지 못하더라도 마음이라도 찾아뵙는 편지를 쓴다면 쓰는 이는 얼마나 보람이 있고 받는 이는 얼마나 기쁜 선물이 되겠는가 하는 욕심이 있었다.

편지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고 편지틀을 만들었다. 아버님께 드리는 글월을 칠판에 크게 적었다.

 

아버님 전상서

아버님 그 동안 안녕하옵신지요? 어머님께서도 건강하옵시며 동생들도 잘 있는지요? 저는 염려해주시는 덕분에 무사히 국방의 의무를 다 하고 있습니다.

또 한 해가 돌아 추석이 다가왔군요. 차례를 지내는 고향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추석이 지나고 나면 가을걷이 때문에 고생이 많겠습니다. 제대를 하고 고향에 돌아가면 전보다 더욱 열심히 하여 아버님의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요즈음 저의 생활은 즐겁고 기쁜 시간입니다. 지금 아버님께 드리는 이 글월은 우리 부대 내 문맹 교육대에서 배운 솜씨입니다. 늦게 시작한 배움이지만 제가 생각해도 신기할 만큼 글을 쓸 수 있으니, 정말 보람 있고 자랑스럽습니다.

다음엔 더더욱 노력하여 더 좋은 내용의 편지를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불효자 ○○○ 드림

 

물론 이 대로 쓰지 않아도 좋다. 이것은 연습이 아니고 실제 보낼 것이니 자기 사정에 맞추어 받는 사람을 정하고 내용도 보태고 줄여야 한.”

생후 처음 써보는 편지, 팔꿈치를 괴고 칠판을 들여다보는 병사들의 눈망울은 진지했다. 자신들이 생각해도 편지를 쓴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여 마음의 흥분을 가누기 힘든 모양이었다. 몸을 꼬기도 하고 자기 머리를 쿡쿡 쥐어박기도 하고 한숨을 들이쉬며 화장실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도 있었다.

지우고 또 지웠다. 지우개의 때 자국이 채 가시기 전에 글자가 덧방이 되어 편지지가 아예 꺼먼 색깔로 염색이 되었다. 그래저래 그 잘난 편지를 완료시키는데 무려 세 시간이나 걸렸다. 그나마 대부분은 원본과 이상 없이 그린 것이었다. 원본을 그리다가 보니 희한한 일도 벌어졌다. 어머니와 동생이 없는데도 어머니와 동생의 안부를 물었고 농사를 짓지 않는 집인데도 제대하여 농사일을 돕겠다고 한 것이다.

우민석은 우민석이 아버지라고 했다. 남의 아버지를 부르느냐고 했더니 부끄러워하며 책으로 낯을 가렸다. ‘아버지 강용범이라고 시작한 강용범에겐 누구가 아버지냐고 물었다. 그 때마다 서로 쥐어박고 발을 굴렸다.

그건 그렇고 오덕규의 편지를 대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편지 서두는 장관이었다. 과시 이 날의 백미(白眉)였다.

여보님 전 상서로 시작했다.

아버님이 안 계시고 고향에 마누라만 있는데 여보님 전 상서라 한기 뭐가 잘못됐심니꺼?”

오히려 이상하다는 투다.

그래, 그것을 미처 설명을 하지 못했구나, 상서(上書)란 웃어른께 드리는 글월이란 뜻이지.”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오덕규가 이 정도라도 편지를 쓸 수 있다니. 그의 출발에 비해서는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는 이제 공부에 완전히 재미를 붙였다.

교관님 전상서도 있었다. 현성훈은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다른 친척도 없어 편지를 받을 만한 사람이 없기에 나에게 보낸다고 했다. 다른 말은 없고, ‘고맙습니다.’만 여남 번 썼다. 오히려 고마운 것은 내 쪽이었다.

학생장 정 병장은 제법 수정을 하여 자기 식으로 내용을 맞추었다. 그의 편지 속에는 아내에 대한 염려와 자식들의 안부도 나름대로 자상하게 물었다. 새끼 밴 어미 소의 관리에 관한 것도 일러 주었다. 그런 대로 다정하고 소박한 내용이었다. 그는 36세의 고령을 집념으로 극복했다. 그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대견스럽고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는 일곱 살 때 큰 홍수로 부모 두 분을 갑자기 잃고 꼴머슴을 시작으로 줄곧 남의 집 품팔이만 했다. 그러니 언제 글을 배울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글을 배우지 못한 것을 누구에게 원망하지 않고 자기 탓으로만 돌렸다.

묵고 살라고 낮에는 들일을 하고 밤에는 새끼를 꽈야 했으니 글 배우는기 쉽지는 않았켔지예. 그렇지만 암만 그래도 꼭 배울라카마, 동냥글을 배워도 와 못 배웠겠심니꺼? 다 지가 깰바자서(게을러서) 그렇지예. 시간 좀 나면 초당방에 앉아, 술이나 먹고, 짓고땡이 하기 바빴지예. 안그라마 시답잖은 가시나들 이바구(이야기)에만 군침만 질질 흘리고, 또 장가라고 가이, 야시 매구 같은 것 엉덩이는 와 그래 참하노(예쁜가)?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게 세월만 잡아먹은 검니더.”

그는 나이가 들은 연장자답게 후배 병사들에게도 응어리진 한을 들려주며 매우 엄격했다. 교육대 병사들이 좀이 쑤셔서 게으름을 피울라치면 그의 큰 손이 사정없이 올라갔다. ‘*, *끼 호강에 바쳐 요강에 똥싸는 놈 그의 두고 쓰는 문자다. 그것은 어쩌면 정 병장 자신에 대한 무서운 채찍이기도 했다.

주소를 적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다른 종이에 적어 준 것을 옮겨 적도록 했다. 내용도 약간씩 수정했다. 천우도 언제 편지를 썼는지 슬그머니 내어 놓았다.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라고 했다.

주소를 모를텐데.”

전에 살던 곳입니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받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천우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천우 아버지 이 상병이 특별 휴가를 얻어 천우 어머니가 갈만한 곳을 두루 수소문했으나 허탕을 치고 돌아온 것이 불과 며칠 전 일이었기 때문이다. 편지가 되돌아오면 실망이 클 텐데 걱정이다.

 

 

압수당한 한가위

 

10 6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 박봉우 휴전선(休戰線)’-

 

교관님 비상입니더.”

정 병장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나는 잠결에 비상이란 소리를 기상으로 들었다.

아니, 왜 이렇게 법석이야, 지금 몇 시야?”

반쯤 떨어진 눈을 비비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니 아직 새벽 네 시잖아, 오늘은 추석이고 하니 기상 시간을 30분 늦춘다고 하지 않았니?”

아닙니더, 기상이 아니라 비상입니더.”

비상, 비상이라니.”

모포를 박차고 일어났다. 2대대 상황실로 뛰어갔다.

대대 정보관 왈

사태가 심상찮소. 추석 분위기에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적이 전격적으로 도발할 위험이 있소. 알려진 바로는 어제 저녁부터 북방 한계선 쪽에 병력을 태운 차량들의 불빛이 수없이 관측되었다는 거요. 전 부대는 출동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라고 했소.”

“×, 김일성이 개×끼는 조상도 업당께?”

형석이 여과되지 않은 욕을 원색적으로 내뱉었다. 내어놓고 말은 못해도 동감이었다. 아직도 잠에 취해 끙끙대는 병사들에게 정 병장이 욕을 퍼부으며 엉덩이를 찼다.

모포를 말아 군장을 꾸렸다. 배낭 속에는 비상식량을 준비했다. 수통엔 물을 넣고 위장망을 입히고 군화 끈을 동여맸다. 머리만한 방독면을 아기 젖 주는 아낙네처럼 가슴팍에 붙였다. 개인화기와 공용화기의 노리쇠를 점검하고 수류탄과 실탄을 지급 받았다. 오늘따라 철모는 왜 그렇게 무겁던지!

출동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멍청하게 총대를 껴안고 군장을 깔고 앉았다. 그 와중에도 아침은 안개의 눈물을 벗고 철의 삼각지 멧부리에서 노려보는 초소 사이로 해당화 꽃잎 같은 햇살을 몰고왔다.

일요일과 공휴일도 없이 내몰면서 그래도 한가위만큼은 고향의 정취를 한껏 담아 보자고 약속했다. 며칠 전부터 형석이가 차례 상 준비는 자기가 맡을 것이라고 떠벌렸다. 그는 식당에 근무한 경력을 살려 일등 조리사(?) 솜씨를 마음껏 보여줄 것이라고 너스레와 엉너리를 쳤다.

하기야 바람만 터뜨렸지 실제 준비한 것은 조기 세 마리, 돼지고기 열 근과 막걸리 두 말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얼마나 풍성했던가? 맥이 풀려 하품을 하며 다리를 쭉 뻗고 벌렁 자빠지던 형석이가 거미 한 마리를 모질게 때려 눕혔다.

아침 거무(거미), 저녁 거무고 재수 없는 건 일반이랑께.”

아무도 대꾸하지 않고 죽어 가는 거미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사게(빨리) 출동이나 한번 해버리믐 쓰겠구먼, 사가지 없는 새끼들 확 글거버리게 잉.”

형석이가 방아쇠 당기는 시늉을 했다. 하루 내내 대기를 했다. 오후 늦게 해제령이 내렸다.

출동을 하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봐준 것이구먼유-.”

광무가 비아냥거리며

그런데 오늘은 달까지 안 뜬다면서유-.”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했다. 오늘이 뭐 55년만에 돌아오는 개기월식이란다. 정말 희한한 한가위다. 낮을 허무하게 잡아먹었으면 달이라도 둥글게 떠올라 막힌 가슴을 쓸어 주어야 할 텐데, 달까지 빼앗다니. 막걸리를 먹어도 제 맛이 아니었다. 낮과 밤을 몽땅 압수당한 한가위, 너무 초라하고 씁쓸했다.

 

 

여보님의 답장

10 12

오덕규 여보님의 답장이 왔다. 덕규는 싱글벙글했다. 그의 아내도 글을 모르기 때문에 동네 사람이 대신 써준 모양이었다. 아내도 남편이 글을 배우고 있다는데 자극을 받은 듯 자기도 이웃집 초등학교 다니는 조카에게 글을 배울 것이라고 했다. 덕규는 흡족한 마음에 아내 자랑을 시작했다.

이게 얼굴은 메줏덩이 같이 생겨도 마음씨 하나는 야무지고 착한 기.”

마음씨만 좋은감?”

형석이 거들었다.

딴 거 좋은 거 있으마 와?”

하따, 새서방 얻어 삼십육계 도망갈까 봐 걱정되어 잠이 안와뿌라요.”

이 짜석아가 머라카노. 마누라 자랑하문 온 병신이라 카더라만 진짜로 요조 요조.”

뒷말을 잇지 못하고 끙끙대며 나를 쳐다보았다.

숙녀.”

내가 이어 주자

, 그거요, 요조수녀제.”

이 등신아, 수녀가 말라고 니 마누라 할끼고 숙녀다. 하따마 마누라 랑 너무 하지 말어래이, 얌전한 개 자제 분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 카.”

정 병장님도, 뭐라캤능기요, 개 자제분.”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그런데 부뚜막도 부뚜막 나름 아잉교, 지 부뚜막에 지 오르능기야 어떤기요?”

아따 덕규 댁은 부뚜막에도 잘 오르더랑께.”

하무하무, 고 암상궂은 것이 호롱불을 홱 불고 나면 썰물 진 갯벌의 조개껍질처럼 야질거리제.”

덕규는 육군이 콱 찍힌 러닝셔츠를 배꼽이 훤히 보이도록 올렸다 내렸다 했다.

 

 

조약돌

 

병사들이 한창, 덕규댁의 편지를 가운데 두고 한바탕 열을 올리고 있을 때 한 쪽 구석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천우였다. 모두들 갑자기 웃음소리를 그치고 천우 쪽으로 눈길을 모았다. 금방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천우의 편지는 걱정했던 대로 역시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왔다. 천우는 편지에 어머님께 용서를 빌었다. 어머님이 용서하여 주신다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 학교에도 잘 다니고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며 착한 사람이 되겠다는 간절한 사연을 적었었다. 천우의 간절한 소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수취인 불명의 너덜거리는 편지를 구겨 쥐고 천우는 한없이 흐느꼈다. 파동을 일으키며 들먹이는 어깨를 감싼 녹색의 군복이 오늘따라 너무 큰 무게로 누르고 있었다. 그래, 그래 이 제복은 아직 네가 입을 옷이 아닌데. 코끝이 갑자기 저려 왔다.

천우야.”

다정다감한 민석이 울상을 지었다.

천우야 짜석아 불알 찬 놈이 울기는 와 우노.”

정 병장이 천우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이미 그도 눈가에 물기가 젖어 있었다. 정 병장의 품에 안긴 천우는 처음엔 억지로 소리를 죽여 헉 끄억 하였지만 마침내 북받치는 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으헉헉 하고 크게 울. 눈물은 왼쪽 가슴에 붙어 있는 하사 계급장을 타고 마구 흘러 내렸.

천우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곧 천우 어머니는 천우를 데리러 올 거.”

나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 주고 그리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 그러나 천우는 나의 말을 믿지 않으려 했다.

우리 어머니는 이제 오지 않습니다.”

그럴 리 없어. 잠시 숨어 있는 거야.”

아녜요, 아녜요.”

천우는 극구 부인했다.

천우야, 우리 밖에 나가서 바람이나 좀 쐬자.”

부대 근처에 있는 언덕에 올라갔다. 오후의 햇살이 따가웠다. 멀리 긴 늪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출렁이고 있었다.

천우야 저 늪이나 바다, 아무튼 물속에 돌멩이를 한 번 던져 본 적이 있니?”

, 인천 바닷가에 어머니와 놀러 갔을 때 조약돌을 던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요?”

글쎄다, 늪을 보니 공연히 그런 생각이 나는군. 그런데 말이다, 천우가 인천 바다에 던졌다는 그 조약돌은 없어진 것이 아니고 지금 바다 밑에 숨어 있겠지?”

아마 그렇기야 하겠지만.”

천우는 불쑥 허리만 잘라내는 나의 말이 점점 더 이상하다는 듯이 빤히 쳐다봤다.

그처럼 천우 어머니의 마음도 없어진 것이 아니고 잠시 숨어 있는 것 아니겠니?”

그제야 내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눈물로 얼룩진 눈가를 비비며 나를 보는 대신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며 힘없이 말했다.

비록 조약돌처럼 없어지지 않고 숨어 있다고 해도 물이 마르거나 누군가 끄집어내기 전에는 다시 볼 수는 없잖아요.”

그것이 감정이 없는 돌멩이와 살아 있는 어머니 마음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지. 어머니의 마음은 물이 마르지 않아도 또 누군가 끄집어 내지 않아도 스스로 떠오르고 말지.”

그게 정말일가요?”

그럼.”

나는 그를 믿게 하려고 크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이미 없어졌어요. 아니 죽었어요. 나를 부대에 떼어놓고 도망을 갈 때 우리 어머니의 마음은 죽어서 돌멩이처럼 단단히 굳어 버렸다고요.”

그렇지 않아. 두고 보라고. 천우의 어머니는 분명히 나타나시게 된.”

정말 그렇게 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틀림없어.”

계속 아이의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내심 자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게 진리라 해도 헤어 나올 벽이 너무 두꺼워 방해한다면 가면의 상태가 되거나 영원히 혼수상태가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가면이나 혼수상태는 이미 모성애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천우와 연관하여 그런 최악의 변수까지는 생각하기 싫었다.

 

 

족보를 판 사나이

 

10 13

연대에 보고할, 종합 성적표를 작성했다. 매주 100점씩, 6주이니 600점 만점이었다. 성적이 가장 우수한 학생은 570점을 획득한 정필범, 2등은 540점을 얻은 윤말룡- 그의 1주 성적은 5주의 성적을 환산한 것이다.- 이었다. 이렇게 좋은 성적이 있는가 하면 권봉구는 거의 0점에 가까웠다.

이 번에 5등까지, 즉 정필범, 윤말룡, 우민석, 강용범, 오덕규는 연대장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상장과 상품을 받게 된다. 이 상장을 고향에 가지고 가서 액자에 넣어 보관하면 좋은 추억과 자랑이 될 것이다.”

하는 함성이 일어났다. 내일은 6주를 마감하는 수료식, 병사들과 조촐한 회식 자리를 가졌다. 막걸리 동이 위에 하현달이 떴다.

세월이 참 빠르다. 그 동안 대원들은 대원들대로 나는 나대로 사연이 많은 기간이었다. 대원들, 고생이 많았다.

어려움이 크면 감회도 깊은 법. 취하며 권하니 위로와 격려로다. 내 앞에 잔들이 쌓였다. 그래그래, 오늘은 실컷 마시자고.

취흥이 별나구나. 목발 장단의 곱사춤, 각설이의 얼씨구가 절씨구를 끌어안고 품바타령 드높다. 미식기가 덩더쿵, 꽹과리 소리 드높여라. 마니산의 야시보살, 지리산의 총각도사, 심마니는 심봤다고 소리하니, 땡중도 양반님도 망나니도 시앗도 술독 속에 자빠졌다.

달도 기울고 하나 둘 콧소리를 높였다. 별자리도 흥에 겨워 마음대로 흩어졌다가 겨우 제자리를 찾은 깊은 밤, 정적이 찾아왔다. 이 때, 은밀히 찾아온 병사가 있었다. 윤말룡이었다. 그는 비록 군복 속에 거칠어진 얼굴이지만, 기름한 얼굴에 쌍꺼풀이 있고 코와 입의 윤곽이 반듯한 미남형이었다. 병사들 자는 틈새를 약간 비비적거려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그는 선 채로 목소리를 낮추어 누가 들을세라 조용히 말했다.

교관님, 5등까지는 진짜 상장을 준답디여.”

응 걱정하지 마, 그건 이미 말하지 않았니? 윤말룡 상병은 2등을 하였으니 자랑스럽게 상장과 상품을 받게 된다.”

내가 안심을 시키려고 말을 했지만 그는 기쁜 표정이 없이 잔뜩 얼굴이 어두웠다.

그런데 저어-.”

고추 먹은 소리를 내었다. 무슨 긴한 이야기가 있으나 선뜻 말하지 못하고 매운 입술만 불어 대었다.

답답하구나, 시원하게 말해 봐.”

몇 번이나 독촉을 하자 그 때서야 겨우 입을 떼었다.

상장에 저의 이름을 박으면 좋겠구먼요.”

그 이야기가 그렇게 어렵던가? 몇 번이나 확인한 말이 아닌가?

그럼 윤말룡의 이름을 적지 않고. 내 이름이라도 적을까봐 걱정이 되?”

내가 농담을 해도 그는 웃지도 않았다.

교관님 정말, 저의 이름으로 하면 안 되는 감요?”

아니 사내대장부가 왜 이렇게 소심한가? 몇 번이나 같은 이야기를. 그럼 말룡이 말고 다른 이름이라도 있단 말인가?”

혹시 술주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저의 명찰을 보시랑께요.”

그는 울먹이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왼쪽 가슴 명찰 쪽에 시선이 갔다. 흰 바탕이 약간 누르께하게 퇴색이 되었지만 까만 색깔의 이름을 읽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름이 조달호가 아닌가?

조달호라니?”

조달호가 제 이름이랑께요.”

눈물을 흘렸다. 뭔가 심상찮았다.

담배 한 대를 권했다. 그는 폐부 깊숙이 연기를 잔뜩 들어 마시며 이름이 바뀐 사연을 말하기 시작했다.

진짜 윤말룡은 조달호와 같은 소대에 있는 동료 병사이었다. 원래 문맹교육대 차출을 받은 것은 조달호가 아니고 진짜 윤말룡이었다. 그러나 윤말룡은 가지 않겠다고 했다. 기록 카드에는 무학이지만 그건 착오이고 자신은 국졸이라는 것이었다.

조달호는 그와 정반대였다. 그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고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문맹자였으나 기록카드엔 국졸로 되어 있었다. 달호가 이 사실을 알고 자기를 보내달라고 했다. 중대 행정반의 반응은 냉담했다. 윤말룡이 같으면 고령 병이니 보내지만 아직 팔팔하게 일하기 좋은 놈이 문맹자 교육이나 가서 노닥거리려 한다고 된통 꾸중만 들었다.

달호가 글자를 몰라 치른 곤욕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의 나이 20세가 되던 해 찢어질듯 가난한 그의 시골집이 싫어 무작정 광주로 뛰쳐나와 어떤 화물회사에 일하게 되었다. 그는 짐짝들을 행선지별로 구분하여 싣는 탁송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답답한 것은 글자를 모르는 것. 그렇다고 새파랗게 젊은 놈이 글자를 모른다고 할 수도 없고 적당히 눈치껏 갈라놓았다. 그러나 그게 눈치로 되는 일인가! 마침내 행선지가 바뀐 탁송물이 환송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과일 등 생물은 시간이 지연됨에 따라 썩어 버렸다. 그때 화물주인들의 부라린 눈망울은 너무나 두렵고 섬뜩했었다. 화물회사 소장은 민틋한 얼굴값도 못한다면서 욕을 바가지로 끓여 부었다. 그날로 당장 쫓겨났다.

그 길로 군에 입대를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역시 글자 때문에 엄청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소대로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 군가 경연 대회를 연다고 군가를 베껴가라는 대대 본부의 지시가 있었다. 중대의 일직 하사인 김 하사는 내무반을 빙 둘러 보다가 달호를 불렀다.

, 조 이병, 대대 본부에 가서 가사 좀 베껴와.”

하늘이 노래졌다. 육시할, 내가 공부를 많이 한 줄 어떠고롬 잘 안디. 목을 쑥 내밀고 글자를 모른다고 했다.

뭐야.”

김 하사의 금속성 날카로운 목소리. 아래위를 매섭게 훑더니, 두고 보자는 투로 재빠르게 서랍에 들은 인사기록 카드를 꺼냈다. ,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조달호의 학력 난엔 국졸로 되어 있었다. 잘못 기록된 것이다. 사실은 그것도 달호의 잘못이었다. 처음 부대에 배치가 되었을 때, 행정반에서 대뜸 물었다.

중졸이야, 고졸이야.”

반듯한 인물 덕분에 또 그렇게 오해를 받은 것이었다.

저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당께요.”

그럼 국졸이구먼.”

행정반원은 더 묻지 않고 국졸이라고 카드에 기록했다. 그 때, 아니라고 정정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뭔가 쑥스럽고 하여 대충 적는 대로 그대로 둔 것이었다.

, 요 새끼 봐라. 먹물도 마르지 않은 주제에 요령부터 배워.”

변명할 틈도 없이 양 볼이 후끈하도록 번갯불이 튀었다. 눈알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 날 정말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서럽게 울었다. 그 때 그는 어떻게 하든지 글자를 배울 것이라고 다짐을 했다. 그런데 이 좋은 기회가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분대장, 선임 하사, 소대장, 닥치는 대로 졸랐다.

쥐약 먹은 놈 물 찾는 식으로 덤벼들었지라우. 미쳐서 설쳐대니 할 수 없이 허락을 하더랑께요.”

허락을 받아도 교육대에 오기가 끌끄러웠지. 그래서 소대장 당번이었기에 늦었다는 둥 하면서 가짜로 둔갑했군.”

죄송하구먼요. 사실 중대 내에서 일단 허락을 받기는 했지만 그 이후가 정말 난감했지라우. 기록카드 상 국졸로 되어 있으니 문맹 교육대에는 지 이름으로는 갈 수 없찌라우. 그래서 무학으로 되어 있는 윤말룡 상병의 이름을 빌릴 수밖에 업섯당께요.”

맹진사댁 갑뿐이가 이뿐이로 바뀐 형상이었다.

나가 글자만 배울 수 있다면 영원히 다른 성을 가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찌라우.”

그런데 막상 상장을 준다고 하니 욕심이 생겼다는 말씀이군.”

말하자면 그러찌라우. 조달호의 이름으로 액자에 넣어 걸어 두구 동네 사람에게 자랑하고 시펏당께요. 옆집 금옥이도 놀라 눈을 까발리고 입이 째지는 것을 보고 시펏찌라우.”

참 그러고 보니 편지를 쓸 때도 아버님께 보내는 편지 뒷 부분에 불효 말룡으로 한 것 같은데.”

…….”

그는 대답 대신 계면쩍어 몸을 비꼬았다.

그렇다면 막심한 불효는 불효다.”

그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히죽 웃었다.

그러나, 나가 2대대 본부에 편지 심부름을 가면서 다시 고쳤당께요.”

그래, 그랬었구나. 그 때 고 하사를 보내려 했는데 자기가 가겠다고 억지로 받아가던 것이 생각났다.

글을 배우기 위하여 족보를 판 사나이 이건 분명히 미담이지만 당장에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을 하지 못하는 것은 웬일인가?

군이란 특수 사회는 기강을 생명으로 한다. 글자를 배우는 것도 군이란 바탕 위에 가능하다. 목적이 좋으면 방법이야 어떠해도 관계없다는 등식은 용납되지 않는다. 물론 조 일병이야 목적이니 방법이니 하고 복잡하게 따지지 않고 글만 배우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 물론 그의 중대에서도 그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건 위험한 일이다. 이름이 다른 병사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부대 내에서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었다니. 너무 비약인지는 모르지만 만일 간첩이었다면 어떡할 뻔했는가?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잠시일 뿐 나도 모르게 그의 의지에 감동하여 잠시 혼란스럽던 생각이 서서히 녹아 내렸다. 사실 어떻게 보면 조 일병이야말로 문맹교육대 창설 취지를 가장 잘 따른 사람이 아닌가? 내가 연대에 꾸중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이름을 바로 잡아 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때 그는 내 표정이 잠시 어둡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생각을 바꾸었다.

교관님, 잘못해서라우. 이름 그까짓 것, 뭐에 쓰간디, 안바꾸겠쓰라우.”

아냐, 걱정하지마. 괜찮아.”

정말이랑께요, 지 같은 놈은 지 욕심만 채우는 나쁜 놈이지라우.”

무릎을 꿇었다.

그렇지 않아, 조달호야말로 우리 문맹교육대에 꼭 필요한 사람이야. 이름을 꼭 바꿔 줄게.”

교관님! 고맙습니다.”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천우야 잘 살아야 한다

 

10 14

수료식 날이다. 1기가 수업을 끝내고 졸업을 하는 날.

명색이 1기 졸업식이니 연대장님께서 직접 상장과 수료증을 전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수료식에 참석할 병사들이 한창 군장을 꾸리고 있을 때였다. 정훈 장교 이 소위가 상기된 얼굴로 나타났다.

박 소위, 일이 이상하게 되었어.”

심상찮은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니?”

, 곤란하게 되었어.”

곤란하게 되다니. 연대장님 안 오셔도 괜찮아.”

그게 아니고 문맹 교육대를 폐교하라는 거야.”

깜짝 놀랐다. 내용인즉 근래 북쪽의 동태가 심상찮아 병력을 증원해야 하는 터에 병사들을 빼내어 문맹교육대를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안타까웠다. 그러나 지시이니 어쩔 수 없는 일. 급히 나도 군장을 꾸려 차에 올랐다.

복귀하는 대원을 태운 트럭이 서서히 언덕을 내려갔다. 이때 누군가에 의해 김 일병과 박 상병이 연필 들었네 하고 선창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합창이 되었다. 아직도 음정과 박자는 제멋대로지만 힘찬 함성은 그 어느 코러스보다 감동적이었다.

트럭이 위병소를 지나려는데 고사리 같은 손이 보였다. 천우의 손이었다. 왼쪽 손은 아버지의 손을 꼭 붙들고 오른 손을 부지런히 흔들었다.

천우의 아버지 이 상병은 며칠 전, 2대대로 전출이 되어 천우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제대 특명을 얼마 남겨 두고 연대에서 특별히 배려한 것이다. 땀을 말리기 위해 햇볕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아이, 아직도 그의 어머니 소식은 없다.

교관님.”

크게 외치는 또렷한 목소리가 아프게 찔렀다.

천우야.”

나도 모르게 눈가에 물기가 매달렸다.

천우야 잘 살아야 한다.”

병사들이 함께 외치며 손을 흔들었다. 먼지가 안개처럼 부옇게 일어났.

 

(위의 글은 1960년대 말, ROTC 소위로 최전방 군 생활 중 문맹교육대 교관을 맡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중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군 면제 사유가 되지만 당시는 문맹자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들이 글자를 모르고 시계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보초 교대까지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문맹교육대 창설을 상부에 청원하여 허락을 얻어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때 적었던 일기를 정리하여 1971, 영남일보사 신춘문예, 넌픽션 부분에 응모하게되었습니다. 그때 이 글이 수상을 하여 신문에 연재 될 때 저는 수상 소감을 적으면서 그 당시 대원들이 이 글을 읽고 답장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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