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을 삼킨 수학여행
행전 박영환
산골에서 자란 내가 바다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이다. 그런데 그 바다란 것도 지금 내가 매일 건너다니는 영도다리 밑 바다이다.
아무튼 바다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가슴은 한없이 뛰고 설레었다. '바다는 얼마나 넓을까? 색깔은 푸르다고 했지. 푸른 바다에 푸른 하늘은 어떻게 비칠까? 배는 어떻게 그 큰 바다를 두둥실 떠서 다닐 수 있는가? 하이얀 거품을 물고 파도가 출렁이면 우리는 무슨 노래를 부를까? 갈매기도 볼 수 있겠지’ 등등 내가 할 수 있는 상상은 전부 다 동원하였다.
학생 수가 전부 83명이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빠지는 사람도 생겼다. 당시는 월사금(공납금)도 내기가 어려운 집들이 많았기 때문에 경제적 형편으로 불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간혹 여학생의 경우 '딸아이와 접시는 내돌리면 깨어진다.’는 봉건적 주장 때문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자칫하면 여행을 못 갈 뻔했다. 나의 경우는 경제적 이유라기보다는 과잉보호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어머니께서 종갓집 큰며느리로 시집을 오셔서 대를 잇지 못해 애를 태우시다가 겨우 10년 만에 나를 낳게 되었다. 그 동안 삼신단을 쌓고 공을 많이 들였는데 그 일을 맡아 주신 분이 중동할매란 분이었다. 이 분은 이웃마을에 사는 점을 치는 분이었다. 내가 태어나게 되자 우리집은 그 분의 말을 철저히 믿게 되어 모든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특히 나에 관한 일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그분께 물어보고 결정을 했는데 그만 그분이 내가 여행을 가게 되면 신상에 해를 입을 것이란 점괘를 내고 말았다. 그러자 그분의 말씀을 거의 법으로 여기시던 우리 할머니께서 절대로 여행을 갈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셨다.
생후 처음 수학여행이라는 것을 하며 새로운 풍물을 접하기도 하려니와 말만 들어왔던 바다까지 본다는 꿈에 부풀어 있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이 말을 들은 담임선생님께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급장인 내가 안 가면 곤란하다고 하면서 집에 찾아오셨다. 담임선생님께서 방문하셔도 할머니께서는
“갸는 절대로 안됩니더.”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참 답답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체념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여행일이 가까워 오면서 친구들이 여행 준비를 하며 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보니 괜히 배알이 뒤틀어졌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미신에 흠뻑 젖어 있는 할머니 등 우리 집 어른들이 너무 미웠다. ‘중동 할매면 대순가? 왜 그렇게 잘 알면서 자기는 점만 치는데. 대통령이 되지’등등 구시렁거리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불만이 쌓이자 입맛이 떨어져 밥도 먹기 싫었고 잠도 오지 않았다. 며칠 사이에 눈이 퀭하니 들어가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어른들은 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여행 대신 새 옷과 좋은 운동화를 사준다는 둥 설득을 했다. 실제 옷과 운동화를 사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새 옷과 새 운동화를 거들떠보지 않고 모든 것이 싫다고 했다. 급기야 설득이 힘들다고 생각한 할머니께서 나를 데리고 중동 할매를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중동할매도 사정이 딱한지라 솔가지를 펴들고 몇 번이고 고개를 갸우뚱 하시더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꼭 그렇다면 가기는 가되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할 수 있니?”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심더”
갈 수 있다는 말에 나는 크게 대답했다.
“소금을 좀 많이 가지고 가서 장소가 바뀌거나 새로운 것을 볼 때마다 조금씩 입에 넣고 주변에 뿌리기도 해라. 그리고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한 발 늦게 행동해라. 차를 먼저 타도 안 되고 배를 먼저 타도 안 되느니라.”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허락을 한 뒤에도 걱정이 되어 몇 번이나 다짐을 했고 나는 그 때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다.
드디어 새 옷에 새 운동화를 신고 여행길에 오르니 뛸 듯이 기뻤다. 물론 할머니께서 챙겨주신 소금 봉지도 조심스럽게 가방에 챙겨 넣었다.
기차를 타고 와서 영도다리 앞에 섰다. 그 때만 해도 영도다리는 좌우 바다의 배들이 통행을 할 수 있도록 하루에 두 번씩 높이 들었다. 정말 신기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과 달구지 아니 전차까지 지나가던 다리이다. 그 때도 꿈쩍 않고 있던 큰 쇠다리가 서서히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켜듯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감격을 한 아이들이 탄성을 지르며 말을 주고받았다.
“진짜로 굉장하다.”
“천 길은 되겠제.”
“하무하무.”
“저거 뭐같이 보이노.”
“무지개”
“그래 맞다 무지개”
우리는 우뚝 선 다리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지금도 그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보면 그 때의 감격이 되살아난다.
다리를 보고 난 뒤 바다가로 내려가 통통배를 탔다. 지금 생각하니 조그마한 어선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옛 시청 앞에서 송도 쪽으로 한 바퀴 돌아올 작정이었던 것 같다. 야호. 우리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바다 물에 손을 잠그기도 하고 갈매기를 따라 너울너울 춤을 추기도 했다.
난생 처음 보는 바다에서 난생 처음 타보는 배, 정말 신기했다. 나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여러 사람이 탔는데도 무겁지 않는가.’'저기 빙빙 돌고 있는 줄은 무엇인가.’‘또 손잡이가 있는 저것은 무엇이고.’'그리고 길쭉하니 천천히 돌고 있는 저 것은 또 무엇인고.’ ‘한 번 당겨 봐.’‘그래 당겨 봐야지’‘어영차.’ 그 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장난삼아 당긴 것인데 그만 그것이 큰 사달이었다. 줄을 당기는 순간 그렇게 신나게 통통거리던 엔진이 약간의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숨을 거두어 버린 것이다. 나는 와락 겁이 나서 재빨리 다른 아이들 속에 숨어 버렸다. 다행히 모두들 제 신명에 취해 있을 때니 내가 줄을 잡아당기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볼에 화상 입은 자국이 선명한 선장 아저씨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꺼진 엔진을 살려놓기 위해 여기저기를 매만지고 두드리며 조이고 닦는 등 무진 애를 썼지만 배는 꿈쩍도 않았다. 아까운 시간만 흘러갔다. 가슴이 탔다. '제발 좀 살아 다오.’ 나는 두 손을 모았다. 분명히 어느 놈이 손을 댄 것 같다고 선장 아저씨가 말을 하자 담임선생님 역시 미간에 주름을 잔뜩 지으며 말했다.
“어느 놈이냐.”
아이들을 무섭게 바라보셨다.
“나는 갈매기만 보았어요.”
“나는 바다만 보았어요.”
“나는 줄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고 했다. 말인즉 옳았다. 아는 사람은 나뿐이니.
나는 끝내 내가 한 짓이라고 밝히지 못했다. ‘저 무서운 눈들을 봐. 내가 지금 밝힌다면 선생님과 아이들은 나를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그래 바다에 빠뜨릴 거야.’이런 생각을 하며 피하고 있을 때 그때, 아차. 나는 중동 할매의 처방을 따르지 않은 것을 알았다.
처음에 얼마간은 잘 했다. 기차를 탈 때는 물론이고, 조금 전 영도다리 밑에서도 분명히 소금을 입에 넣고 주변에 뿌렸다. 그런데 그 놈의 배가 문제였다. 산골 촌놈이 처음 배를 타게 되자 정신이 홱 돌아 간 것이었다. 다른 사람 보다 언제나 한 발 늦게 행동 하라고 부탁을 받았건만 그것을 잊어버리고, 늦게 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것도 제일 먼저 배에 뛰어올라 갔던 것이다.
‘완전히 돌았어. 이런 돌박. 돌박.’ 뱃전에 머리를 박고 싶었다. 이 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소금을 먹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급한 김에 빨리 고치려면 되도록이면 많이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남은 소금을 죄다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소금이 목구멍을 채 넘어가기도 전에 꽥, 구역질이 올라왔다. 갑자기 많은 소금을 빈속에 털어 넣었으니 견딜 수 있었겠는가. 정신이 어찔했다.
“이를 우짜노.”
담임선생님은 연신 나의 이름을 부르며 등을 두드렸다.
“체하기라도 했니.”
선생님은 줄을 당긴 놈이 원망스럽다는 듯
“어느 놈이야. 어느 놈.”
하면서 왕방울 눈을 굴리며 아이들을 계속 훑어 보셨다.
아이들은 아무 죄가 없다. 전부 나의 죄였다.
“선장 어른 빨리 나가요. 이 아이는 내가 억지로 데리고 온 아인데. 만일 탈이 나면 큰일입니다.”
담임선생님이 독촉을 했다.
선장도 도저히 고쳐낼 방도가 없었던지 지나가는 배를 잡았다. 아이들이 투덜대면서 배를 갈아탔다. 뭍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속은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속이 풀린 뒤에도 친구, 선생님, 선장님께 미안한 마음에 내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 이후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이 통통배 사건은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때 고백을 해야 했는데….’ 그것은 삭지 않는 바늘로 잠복하고 있다가 이따금 예리하게 찔렀다. 거기에다가 뒷날, 하필이면 부산에 내려와 솥을 걸어 두고 그 바다 위를 넘나들게 되자 그 정도는 더 심했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나의 고해 성사가 이루어질 기회가 왔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을 우연하게 부산에서 해후하게 된 것이다. 선생님을 모시고 영도다리가 보이는 횟집에 앉아 소주잔을 권하면서 못난 제자가 실토를 했다.
“선생님, 그 때 줄을 잡아 당겨 고장을 낸 놈이 바로 저입니다.”
“아니, 줄을 당기다니.”
“그 때 우리 초등학교 때 여기에 수학여행을 온 것 생각이 안 나십니까? 그 때 어떤 놈이 줄을 당겨서 배가 고장 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응,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생각나는군. 참 그 때 난감했었지. 배는 고장이 나서 꼼짝도 않는데 억지로 데려온 귀한 아들은 구토를 하지”
“그게 전부 저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내내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하하하 별것을 다 기억하고 있군, 자자, 소주 한잔하고 잊어버리게.”
“감사합니다.”
넙죽 절을 올렸다.
비로소 바늘 하나가 바다 속으로 시원하게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