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주지 않으리
행전 박영환
유행가 가사 같은 제목이 갑자기 지나간다. 그러다가 나도 몰래 피식 웃고 만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지. 내가 생각해도 왜 이런 말을 뇌이고 있는지 궁금하다.
혁이가 우리 집에 온지 벌써 일년이 넘었다. 혁이는 처남의 아들이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 부모와 같이 있지 못하고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우리 집에 올 수밖에 없었지만 제 부모의 사정만 풀리면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그 동안 너무 정이 들었다. 이 아이는 시키지 않았는데도 나를 ‘아빠’라고 부르고 있다. 참, 세상에 고모부를 보고 ‘아빠’라고 부르는 녀석도 이놈밖에 없을 듯하다. 간도 크지. 거기가 어디라고. 제 고모가 깔깔거린다.
때로는 황당할 때도 있다. 늘그막에 어디 작은 집에서 얻어온 아이가 아니냐는 친구나 주변 사람들의 농담도 있지만 - 하기야 그것은 혁이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의 농담이기에 괜찮다 - 그보다 정말 딱한 것은 낯선 곳에서 일이다. 손자입니까? 아닙니다. 처조카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 녀석은 거침없이 ‘아빠’하고 불러 버린다. 이상하다는 눈치다. "제 부모는 서울에 있고 우리와 일년 이상을 같이 생활하다가 보니..." 이나마 이렇게 변명할 수 있을 때는 낫다. 정말 딱한 것은 변명도 할 수 없는 상황. 지난 여름 설악산 콘도에서 있었던 일. 내가 잠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녀석은 현관에 있다가 너무 반가워 호들갑을 떨며 ‘아빠’라고 콘도가 떠나가도록 외치며 20여 미터를 달려오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아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제 20개월 짜리 아이와 늙은 아빠. 석연치 않다는 듯 떨떠름한 주변 사람들의 모습. 그 이외도 지하철이나 시장통 아무 곳이나 녀석은 마음껏 ‘아빠’라고 외친다. ‘고모부’라고 시켜도 녀석은 아직 ‘고모부’란 발음을 하지 못한다. 설사 ‘고모부’란 발음을 한다고 해도 지금 녀석의 기세로 보아서는 ‘고모부’라고 수정하기는 글렀다.
제 아버지가 와도 나를 ‘아빠’라고 부른다. 제 아버지가 자동차에 태우려 하면 기겁을 한다. 엉덩이를 한껏 빼며 내 자동차를 두들긴다. 내 자동차 문을 열어 주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급하게 기어오르며 ‘어쉬’하고 내뱉는다. 그런 고약한 말은 언제 배웠는지. 이번에는 제 아버지가 나의 운전석에 앉아 버린다. 녀석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끝내는 울음을 터뜨리며 제 아버지를 밀어낸다. 다시 내가 운전석에 앉으면, 눈물로 범벅이 된 까만 눈동자에 미소를 짓는다. 어쉬, 죽을 뻔했지. 녀석은 나를 끌어안는다. 네 이 놈, 아빠도 모르는 놈.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것이 밉지 않은 것은 어쩐 일인가? 정말 녀석이 제 아비가 나타나면 그 아비에게만 꼭 안기고 나를 모른 체라도 했다면 섭섭할 뻔도 했겠다. 또 나는 요즈음 이 아이의 ‘아빠’소리를 들으며 무한한 의무감 같은 것을 느낀다. 정말로 아빠의 구실을 잘해야 한다는 것. 나름대로 혈육 이상으로 정을 퍼붓는다.
뻐꾸기의 탁란(託卵)을 다룬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프로가 있었다. 뱁새가 뻐꾸기 알을 품고 사랑을 퍼부을 때, 그의 눈치 없는 무지가 얼마나 미련스럽고 밉게 보였던가? 그는 심지어 자기 새끼를 밀어내도 마냥 그의 재롱을 사랑했다. 이제 생각하니 뱁새는 그 음모를 다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왜? 그 놈의 정 때문에. 우리가 혁이에게 헤어나지 못한 것처럼 뻐꾸기의 재롱에 매료된 것이지.
지난 여름은 혁이와 내내 같이 있었다. 여행도 많이 했다. 지리산, 남해, 설악산, 청도 고향에 갈 때도 꼭 데리고 갔다. 내 동생들도 삼촌과 고모의 구실을 했다. 동창회 등 모임에도 혁이를 데리고 다녔다. 궁상맞다고 생각할는지 몰라도 개의치 않기로 했다. 가덕도에 떨어져 있을 때는 혁이가 궁금해 못 견딜 정도다. 전화통을 붙들고 있다. 대화도 되지 않는 녀석을 수화기 앞에 불러 ‘아빠’라고 부르게 한다.
하기야 우리라고 어찌 이 아이가 마냥 재롱둥일 수만 있겠는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긴장과 아픔. 급한 일이 있어 부득이 아이를 떼놓지 않을 수 없을 때는 발을 동동 굴린다. 제 고모는 건강이 좋지 않아 자주 병원에 가야 한다. 그때 정말 난감하다. 하는 수 없이 업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점차 덩치도 커지니 힘에 부대끼는 모양이다. 내가 무슨 업보지. 혀를 찰 때도 있다. 올케가 공연히 미워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우리는 제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가기 전에는 다른 곳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을 한다. 아이가 무슨 죄가 있어. 이 집 저 집 전전을 하다가 정서가 불안해지면 어떡할라구. 정말 그것이 걱정이다. 늦어도 5-6 개월만 참으면 제 집에 갈텐데. 그래서 명절에도 제 집에 보내지 않고 우리 집에 붙들어 두고 있지 않는가.
아내도 제 올케를 원망하다가도 녀석의 재롱이 한창이면 아이를 떼어놓을 수밖에 없는 제 어미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가진다. 불쌍한 것. 이 귀여운 재롱도 보지 못하고. 녀석이 할 수 있는 말은 겨우 엄마 아빠, 밥밖에 없다. 그러나 알아듣기는 잘 한다. 우리는 그의 눈치를 보면 그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잘 안다. 응 밖에 나가자는 말이지? 맘마 줄까? 과자 달라고. 신을 신겨 달라구. 쉬를 한다고. 그때마다 의사가 통하면 입을 크게 벌리고 좋아라고 웃는다. 요즈음, 이 녀석 장난이 대단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악수를 하자면 손을 내밀고, 안마를 하라 하면 나의 다리에 앙증스런 손으로 두들겼는데 어느 순간 엉뚱한 짓을 한다. 악수를 하자면 손을 등뒤로 감추고, 안마를 하라면 제 다리를 두드리거나 밥그릇을 두드린다. 뽀뽀도 의자에 대고 한다.
녀석은 하늘에 있는 그 모든 것을 좋아한다. 달을 좋아하고 별을 사랑하고 새를 손짓하며 비행기가 뜨면 모든 것을 중지하고 하늘을 향해 비- 하며 손뼉을 친다.
하필이면 하늘에 있는 것을 이렇게 좋아할까요? 제 어미를 그리워하는 것 아닐까요? 제 고모가 심각하게 말한다. 너무 비약인데. 아녀요. 말은 못해도 달이나 별은 제 어미를 보고 있고, 새도 자유로이 어미 쪽으로 날아가며 비행기를 타면 그곳은 지척이 아닌가요.
갑자기 아이가 불쌍해진다. 그래. 잠깐이야. 아무렴 우리가 네 부모 만할까? 섭섭해서 어떻게 보내지.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 어떡하지. 발버둥은! 신나게 빠이, 빠이를 할텐데. 어우할꺼야. 그러게 뭐랬소. 정(情)주지 말라고. 이 놈 그럴 테야. 우리 미워합시다. 하하하. 정(情) 주지 않으리라. 녀석과의 이별을 한없이 기다리면서도 녀석과의 이별을 지금부터 슬퍼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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