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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그 곳의 전신주

              그 곳의 전신주

 

 

 

 

 

 

 행전 박영환

 

  P 여고에 을 때, 시내  입시 학원에 들른 적이 있었다. 졸업생들을 격려하기 위한 이른바 ‘추수지도’였다.

  재수생들은 학원 복도에서 만나자마자  나의 가슴에 기대어 울음부터 먼저 터뜨렸다. 갑자기 코끝이 매웠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초조한 모습에 구름을 잔뜩 머금고 수척해진 얼굴들이었다.

  학원을 방문하기 얼마 전, 대학에 진학했던 아이들의 모교 방문이 있었다. 그 아이들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분명히 2월에 똑같이 졸업을 한 동기생이지만 고등학교 4학년과 대학생은 너무 달랐다.

  모교를 방문했던 여대생 아이들은 바로 개선장군인 양 의기양양했다. 우선 모양부터 몰라보게 달라졌다. 잘 손질한 머리, 쌍꺼풀 수술, 귀걸이, 목걸이, 매니큐어, 미니스커트, 손가방, 가죽 구두. 숙녀 티가 완연했다. 후배들에게 줄 선물 보따리만큼이나 자랑 보따리를 들고 온 그들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선생님, 전신주 뒤에 숨지 않아서 좋습니다.”

  한 아이가 잔뜩 미소를 머금고 한 마디 툭 던졌을 때 같이 온 아이들이 한꺼번에 까르륵 웃었다.

  전신주 뒤에 숨는 일, 내가 수업 여백으로 자주 하던 농담이었다. 약간은 의도적으로 재수생이 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대학에 떨어지면 비참한 꼴을 많이 당한다. 대학에 진학한 녀석들은 꼭 재수생들이 다니는 학원 골목에서 으스대기 위해 데이트를 한다. 그 때 낙방을 한 아이는 고등학교 4학년 가방을 늘어뜨리고, 학원 문을 나서다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 때 숨을 곳이 어디인가? 전신주 뒤다. 못 본 척 지나가면 오죽 좋아. 고 앙큼한 것들은 꼭 친구를 찾아내어 애인 인사를 시킨단 말야. -

  “선생님, 지금도 후배들에게 그 농담을 하셔요?”

  “지금도 전신주는 있잖아….”

  “합격하던 날, 선생님의 그 말씀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저두요”

  서울에 진학한 아이들은 어느새 상냥한 서울 말씨로 바뀌었다. 참 재주도 용했다. 19년 동안이나 사용하던 우악스런 경상도 사투리를 3개월 만에 거뜬히 바꿀 수 있다니. 그들은 언어 마술사였다. 미팅을 벌써 열다섯 번이나 했다고 떠벌리는 아이도 있었다. 후배들에게 대입 격전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그들은 벙어리 말문이 터지듯 그칠 줄 몰랐다.

  그러나 이곳 학원에서 만난 재수생들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떼지 않았다. 일부러 농담을 해도 그저 고개만 잠깐 들다가 이내 어두워져 다시 숙였다.

  그 때, 우리 반에 부급장을 했던 경이가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했다. 

  “선생님, 분명히 재수생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제가 이 끔찍한 재수생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경이는 서울 Y대에 원서를 내었지만 실패했다. 전교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가던 아이로 충분히 합격할 수 있는 성적이었는데 예기치 못한 실수를 하는 통에 떨어졌다. 운이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당장은 이 기간이 매우 어렵게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길게 보면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도 있단다. 실제 재수를 한 덕분에 처음에 합격한 것보다 더 좋아진 경우가 얼마나 많니? 경이도 분명히 그렇게 될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있지만, 주위에서 패잔병 취급을 하며 값싼 동정을 빙자하여 아픈 곳을 찌를 때는 정말 견디기 힘듭니다.”

  “그런 일들도 있었니?”

  “선생님 혜정이의 편지를 한 번 보시겠습니까?”

  가방 속에 편지 하나를 꺼냈다.

  혜정이는 경이보다 성적이 약간 떨어졌지만  Y대에 합격한 아이다.

 

  사랑하는 친구 경에게

  경아,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 불과 두어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수업이 없는 시간, 교정 곳곳을 둘러보며 이 좋은 캠퍼스에서 푸른 꿈을 키우게 해준 하나님께 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남학생이 많은 학교라서 모든 모임에 술이 빠지는 일이 없다. 나는 아직까지는 기지를 발휘하여 술을 피하고 있지만, 배기지 못할 날이 곧 올 것 같다.

  서클에 가입도 하고 철학 공부도 틈틈이 한다.

  지금 기숙사 방에서 글을 쓴다. 창밖에는 분홍빛 봄비가 새봄을 조용히 어루만지고 있다. 라디오의 볼륨을 적당하게 조절하고 깍지를 끼고 침대에 훌렁 드러누워 본다. 여고 시절, 동경하던 나의 모습이다.

  경이도 나와 같이 이 캠퍼스를 거닐며 대화를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안타깝다.

  대학은 과목마다 생소하고 어렵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의 문제집 - 그 생산성 없는 공부들-이 아니고 그래도 원하던 공부가 되어 일변 뿌듯할 때도 있다. 지금 만일, 다시 그 문제집들의 퀴퀴한 냄새 속에 살아야 한다면 나는 금방 질식하고 말 것 같다.

  그럴 때마다, 경이의 인내심이 부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단다. 성공을 빈다. 파이팅.

                                                                                                                                            서울에서 혜정이가

 

  경이는 긴 한 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혜정이까지 저의 마음을 이렇게 처참하게 휘저어 놓을 줄은 몰랐습니다. 편지를 읽는 순간 박박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받았지만, 억지로 참았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오해를 할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경이는 누구보다도 혜정이를 잘 알고 있잖니? 심성이 얼마나 착한 아이니? 그런 혜정이가 설마하니 일부러 경이의 아픈 곳을 겨냥하여 이런 글을 썼겠니?, 제 딴엔 위로와 격려를 한다는 것이 그만 표현이 좀 미숙해서 그렇게 된 것 같구나.”

  “아무리 순수한 내용이라 해도, 혜정에게 비친 저의 모습은 동정과 연민의 대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산성이 없는 퀴퀴한 문제집 속에서 질식을 하지 않으려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저의 모습이 너무 비참하여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점은 혜정이가 실수를 한 것 같구나. 그러나 근본 취지는 잘 이겨내는 경이를 격려하려 한 것 같구나.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아무튼 재수의 승패는 심적인 갈등을 얼마만큼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아니겠니, 마음을 굳게 먹도록 하렴.”

  경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학원 문을 나섰다.

  그런데 그 골목에, 전신주가 왜 그렇게 많던지. 빨리 벗어나려고 걸음을 재촉했지만, 전신주는 불쑥불쑥 내 앞을 가로막았다.

 

* 입시 철입니다. 재수를 하며 마음 고생을  하던 아이가 생각이 나서 올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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