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꽃
행전 박영환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꽃은 모란이다. 당신께서는 모란을 닮았고 모란처럼 사셨던 것 같다. 지금도 고향집 뜰에는 어머님이 손수 심으신 모란이 몇 포기 있다.
원래는 여러 포기가 있었으나 우리 형제들이 곳곳에 떨어져 살면서 어머니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 나누어 가고 이제는 몇 포기만 남아 있다.
나도 부산에 내려오면서 한 포기를 가지고 왔다. 처음, 셋방살이를 할 때는 이사도 많이 했지만, 모란을 그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하게 옮겼다.
모란은 오월이 되면 꽃을 피운다. 꽃망울이 어머님의 젖무덤처럼 피어날 때쯤 나는 아련한 어머님의 젖가슴과 살내음을 느끼며 어머님을 그리워한다.
모란은 여느 꽃보다 부피가 듬직한 꽃이다. 겨우내 앙상한 맨몸으로 추위를 견디다가 새봄이 되면 고목 같던 등걸에 새순을 만들고 이내 자줏빛 꽃망울을 맺는다. 모란은 꽃 중의 꽃이라고 부르듯이 보기만 해도 정정하고 시원하다. 그러나 모란은 정정하고 시원한 망울에 비해 향기가 적은 것이 흠이다.
어머님도 모란처럼 체격이 헌칠하신 분이다. 1m 65cm 정도가 된다. 현대 여성들에 비하면 별로 큰 키가 아닐지 모르지만 어머니 연배로는 상당히 큰 키에 속하신다. 이 큰 키도 시집 어른들께 향기 없는 꽃으로 대접받던 시절은 큰 흠이 되기도 했기에 키를 작게 하기 위해 허리를 구부리는 습성이 생기셨다고 한다.
어머니 세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저마다 시집살이의 애환이 있지만, 우리 어머니만큼 쓰라린 시집살이를 견디신 분도 드물 것 같다. 어머님은 천성이 모란만큼 유순하고 정직하신 분이시지만, 이를 채 평가받기도 전에 뜻하지 않은 시련 속에 호된 시집살이를 하신 분이다.
어머님이 시집을 온 이후 공교롭게도 우리 집에는 걷잡을 수 없는 액운이 꼬리를 물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유독 우리 집만 흉년이 연속되는가 하면 멀쩡하던 어린 시동생이 둘이나 갑자기 생목숨을 잃었으며 시어머니마저 원인 모를 심한 관절염에다가, 또 눈뜬 당달까지 되셨다. 그 뿐인가 도저히 이해 못할 불가사의한 일도 일어났다. 섣달 그믐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의 밤중이었다. 고요한 정적을 깨고 담 무너지는 굉음이 들렸다. 놀랜 식구들이 등불을 높이 켜 들고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런데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담은 어느 곳도 무너진 곳이 없이 멀쩡했다. 서로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다른 식구에게 확인을 했으나, 모두들 분명히 들었다고 했다.
그 이후도 날씨가 궂은 날이나, 그믐 때쯤은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귀신의 장난이 아닐까! 등골이 오싹한 식구들은 질식할 것 같은 불안감에 오들오들 떨었다고 한다.
터를 누르기 위해 굿을 하고 개를 열 마리나 키웠다. 그러나 그 개들마저 터를 누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견디지 못하고 하나 둘 죽어 버렸다. 흉가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 분명히 변고로고, 멀쩡하던 집이 갑자기 흉가로 변하다니.... 사람이 들고 삼 년, 나가고 삼 년이라 했는데...
모든 액운을 어머니가 몰고 온양 곱지 않은 눈길들이 어머니께 쏠렸다. '애물단지' 취급의 매운 눈총. 거기에다 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가 미움을 받을 일이 또 하나 더 있었다. 어머니는 시집을 온 지 몇 해 되어도 태기(胎氣)까지 없었던 것이다. 어른들의 화롯전에 담뱃대 두드리시는 횟수는 점차 늘었고, 그 때마다 어머니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으니 죄인의 모습으로 주눅이 든 그 처참한 상황이 눈에 선하다.
마침내 마을 뒤편 탁영산 아래 새 터를 잡아 이사를 했다. 아무튼 이사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 여러 가지 변고들은 잠시 멈추었다. 그러나 어머니께 태기는 역시 없었다.
- 아들을 낳지 못하면 우리 식구라고 할 수 없지. 새장가라도 들여야지.. . 이른바 '七去之惡'이 오르내렸다. 의원과 약방도 별무 효과, 마지막으로 믿나니 중동 할매의 점괘. 중동 할매는 인근 마을에 점을 치던 분이었는데, 이 분은 태기가 없는 것이 어머니 탓이 아니고 우리 집 운수 때문이니 10년만 기다리면 틀림없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 중동 할매가 치방을 해주는 대로 뒤뜰에 삼신단을 모시고, 어머니는 새벽마다 목욕재계를 하고, 정화수를 바쳐, 지극하게 치성을 드렸다.
당시, 마을에는 우물이 한 곳밖에 없었다. 우리 집에서 300m나 떨어진 공동 우물이었다. 그 물을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뜨기 위해 밤잠을 설치며 꼭두 새벽부터 물을 긷는 고충은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저런 우여곡절 끝, 삼신 할매도 그 지극한 정성에는 어쩔 수 없었던지, 어머님이 시집을 온지 꼭 10년만에 아들 하나를 점지시켜 주었다. 그게 바로 나란 존재다.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이건 엄연한 실화다.
-이 짜석아 어데 있다가 이렇게 늦게 나왔노. 니가 태어났기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너거 엄마는 영원히 골방 신세가 될 뿐 한기라. 니가 효자데이 효자고 말고... 암암, 낳을 때부터 효자지... 나의 머리를 쓰다듬던 외할머니의 손길은 항상 가볍게 떨고 있었으며 눈에는 늘 물기가 젖어 있었다.
효자-. 참 민망한 말씀이다. 아직도 마음만 있을 뿐, 항상 걱정만 끼치는 불효가 아닌가?
어머님은 내가 태어난 뒤도 마음 고생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처럼 '애물단지' 신세는 조금 벗어나고 심신이 약간 안정도 되었지만, 너무 오래 소외되어 있던 당신의 위치는 좀처럼 제자리를 잡지 못하셨다. 어른들의 눈에 비친 당신의 유순한 삶은 미련하거나 우둔하게 투영되곤 했었다. 그런 수모도 원래 말이 없으시던 어머니는 불평이나 원망 대신에 항상 운명으로 수용하셨다. 그저 한없이 참으시다가 아픔이 너무 아리면 큰 눈에 눈물을 가득 담으셨다. 그때마다 나를 꼬옥 껴안고 나의 볼을 비비셨다.. - 무럭무럭 자라거래이. 훌륭하게 자라거래이.
여든에 가까우신 어머님은 아직도 심한 해소 기침을 앓고 계신다. 토해도 토해도 남을 사연들이 기침으로 자지러지는 것 같다. 어머님의 기침은 해묵은 기침이다. 그 많던 매듭들이 안으로 안으로 잦아들었으니 호흡인들 순조로웠겠는가? 젊은 시절 어머님은 기침도 죄스러워 뒤꼍에 나가셔서 눈물이 범벅이 되도록 토하곤 하셨다. 평생을 토해도 못 다한 사연들로 해마다 모란꽃을 붉게 물들이시는 것 같다.
-어머니 이제 크게 고함을 한 번 치세요. 언젠가 잠꼬대를 하시는 것을 들었어요. 그때처럼 나도 속이 있는 여자라고 마음껏 고함을 쳐보셔요. 아들딸도 낳고 살림도 사느라고 살았다고 큰 소리를 한 번 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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