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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16)백세의 사표(師表)인 오졸재와 망헌을 배향한 석강서원(石岡書院)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16)

백세의 사표(師表)인 오졸재와 망헌을 배향한 석강서원(石岡書院)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향교 홍보장의. 청도문협 회장

 

 

석강서원 전경

 

 

                                                       

<2020년 2월 11일(화) 청도신문>

 

 

  밀성 박씨 집성촌인 풍각면 흑석1리 안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왼쪽 산기슭 무성한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석강서원이 있다. 배향 인물은 오졸재(迃拙齋박한주(朴漢柱)와 망헌(忘軒) 이주(李冑) 선생이다.

두 분 모두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과 실정을 바로잡기 위해 직언을 하다가 무오사화에 유배를 가고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은 충절로 이름 높은 분들이다. 이미 남강서원과 차산서원 방문 시 그 행적을 소개한 터라 석강서원 편에서 오졸재의 학구적인 태도, 지극한 효심, 청렴한 일면을 소개하려 한다.

공은 젊어서부터 성리학에 침착하여 매진하였고 제자백가(諸子百家) 산경(山徑), 지지(地誌)노장(老莊) 불교의 학설까지 섭렵하였다. 종일 똑바로 앉아 독서를 하니 비록 한집 식구라도 게으른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언행이 한결같아 예의를 따랐으며 아무리 급할지라도 말을 빠르게 한다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부모를 섬김에 늘 공경하고 기쁜 낯빛으로 극진(極盡)하게 받들었다. 날마다 첫닭이 울면 반드시 세수하고 빗질한 다음 의관을 정제하고 부모님을 뵈었다. 창녕현감으로 있을 때 본가인 차산리와의 거리가 반나절이지만 공무로 여러 날 뵙지 못하면 마음이 편안하지 아니하여 초저녁 때 혼자 말을 타고 달려가 조용히 뵈옵고 새벽이 되면 곧 돌아오곤 했는데 사람들이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1501(연산군 7)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에 있을 때 부친의 부음을 듣고 보내준 의복으로 자리를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소리 내어 통곡하는 통에 기절했다가 소생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의()가 아니면 취하지 않고 도()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다. 거처하는 집을 단장하지 않았으며 늘 가난한 살림살이였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의복은 몸을 가릴 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한번은 어느 친구를 찾아 갔을 때 그 집 하인이 주인에게 문밖에 손님이 왔는데 키가 크고 베옷을 입었는데 꼭 거문고집 같습니다.” 했다. 하인이 조롱할 정도의 남루한 차림이었는데 그 때 주인이 틀림없이 박 모이다.” 하고 신을 거꾸로 신고 뛰어나가 맞아들이니 그 집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고 한다.

뒷날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은 충과 효가 모두 극진하고 체()와 용()이 겸비된 분으로 진실로 백세의 사표(師表)라고 할 수 있으니 천년토록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청도는 물론 경남 밀양에서도 오현으로 숭앙하고 있으며 함안에도 여표비가 있다.

 

사당인 구인사(求仁祠)를 나서며 거문고 집이란 시제로 몇 줄 올렸다

 

처음부터 거문고가 되기보다는 거문고집이 되고 싶었다

당신께서 지키고 싶었던 거문고는 부모님이고 군주였다

부모님께서 마음 편히 기쁜 마음으로 사신다면 자식으로서 더 바랄게 뭐가 있으리

군주께서 바른 정사를 베풀어 태평성대가 된다면 신하로서 더 바랄게 뭐가 있으리

헤진 옷 부끄럽지 않지만 거문고가 제 소리를 내지 못할 세라 두려워하던 당신

마침내 새로운 거문고집을 지어 올리고 형장의 이슬이 되시다.

 

 

 

사당인 구인사 

 

석강서원 묘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