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15)
사화에 목숨을 잃은 오졸재, 망헌, 탁영을 모신 차산서원(車山書院)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향교 홍보장의. 청도문협 회장

<차산서원 전경>

<청도신문, 2020년 1월 22일(수) 657호
겨울바람이 매섭게 귓불을 따갑게 하는 1월 중순,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 뒤편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차산서원을 찾았다.
이곳의 배향인물은 오졸재(迃拙齋) 박한주(朴漢柱, 1459 ~1504), 망헌(忘軒) 이주(李冑, 1468∼1504),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세 분 선생이다.
이 세 분은 같은 시대, 같은 길을 걸어 온 사람으로 공통점이 많다. 나이는 오졸재,탁영, 망헌의 순인데 오졸재와 탁영은 다섯 살, 탁영과 망헌은 네 살 차이이며, 오졸재는 46세, 탁영은 35세, 망헌은 37세에 목숨을 잃었다.
세 분 모두 사림파의 거두로 강직한 성품을 지닌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는데 그 영향으로 세 분 모두 절의와 의리를 중시한 삶을 살게 된 것 같다.
조선 10대 연산군(1476- 1506)은 군주의 본분을 망각하고 실정(失政)을 거듭하며 아무 때나 용봉장막(龍鳳帳幕)을 치고 연회를 즐기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다.
1479년(연산군 3), 사간원 헌납으로 있던 오졸재는 “용봉장막은 중국 사신이 왔을 때나 큰 잔치 할 적에 치는 것인데 계속 걷지 않고 잔치를 벌이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때 왕이 화를 내어 용봉장막이 네 것이냐고 하니 이는 신민(臣民)의 것이라고 했다. 이때 주변에서 몸조심 하라고 하자 “신하 된 자가 어찌 내 한 몸 보전하자고 임금을 의롭지 못한 지경에 빠뜨릴 수 있겠소?"라고 했다. 그 이후도 노사신과 임사홍의 권력 농단에 대해 차자를 올리는 등 극간(極諫)을 멈추지 않았는데 결국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는 귀양을 갔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극형을 당했다.
망헌 역시 정언(正言)으로 있다가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진도로 귀양 갔다가 이어 갑자사화 때 궐내에 대간청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로 사형에 처해졌다.
탁영 역시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훈구파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고, 춘추관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는 세조찬위의 부당성을 풍자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다가 무오사화 때 참형을 당했다.
그 뒤 중종반정 이후 세 분 모두 신원이 되면서 관직이 추증(追贈)되었다. 오졸재는 도승지 겸 예문관 직제학으로 망헌은 이조 참의에 이어 승정원 도승지로 탁영은 중종반정(中宗反正)이 되고 신원복작(伸寃復爵), 그 뒤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사당인 숭인사(崇仁祠) 앞에서 ‘사표(師表)’란 시제로 몇 줄 올렸다
바른 길을 가야 한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쉽게 동의하지만
정작 바른 길을 위해서 목숨을 버려야 한다면 당당하게 나설 사람 얼마나 될까
하나밖에 없는 목숨
기꺼이 던진 삶
오졸재, 망헌, 탁영 선생의 그 고고한 충절
세월이 갈수록 더 푸르게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데
흩어져 굽어지다가도 깜짝 놀라 다시 옷깃을 여미게 한다
어둠을 밝혀주는 영원한 등불, 거룩한 사표(師表)이어라.

사당 '숭인사'

사당

오졸재 여표비각

오졸재 여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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