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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12)임란, 선무원종 공신인 독석암의 율강서원(栗岡書院)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12)

임란, 선무원종 공신인 독석암의 율강서원(岡書院)

 

                                          행전(杏田박영환(朴永桓)

                                 청도향교 홍보장의. 청도문협 회장

 

 

 

 

<포상비와 묘정비>

 

 

청도신문(2019년 12월 10일)

 

2018 5, 봄 향사에 종헌관을 맡아 각북면 삼평리에 소재하는 의흥(義興)예씨 훈련원판관공파(訓練院判官公派) 문중의 율강서원을 찾았다. 이 서원도 청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임진왜란 유적지이다.

배향인물은 독석암(獨石庵) 예인(芮仁祥,1562 ~ 1633) 선생이다. 독석암은 고려 문하찬성사(正二品)를 역임하고 부계군(缶溪君)으로 봉군된 예낙전(芮樂全)의 후손으로 1585(선조18)년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 벼슬에 있을 때 임진왜란을 맞게 되어 선조가 몽진(蒙塵)하여 서행(西行)할 때 호종하게 되었다. 이때 다른 신하들은 험악한 백성들의 분노를 두려워하였으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전란 내내 어가(御駕) 호위에 만전을 기하며 7년 동안 충성을 다했다.

종전(終戰)이 되자 선조가 그를 직접 불러 노고를 치하한 후 어모장군 훈련원판관(禦侮將軍 訓鍊院判官)에 제수하고 선무원종 공신(宣武原從 功臣) 2등훈에 책록했다.

그리고 ()씨는 보기 드문 성씨이니 채씨(蔡氏)로 바꾸는 것이 어떠한가?” 했다고 한다. 이 때 독석암이 엎드려 절하며 "신이 조상의 성을 물려받은 지 10여 세(, )를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나라의 은혜를 입어 세상의 공인을 받은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삼가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성씨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조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은 왕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가문을 중시하고 성씨에 대한 자긍심이 높았던 것 같다. 예씨는 지금도 전국적으로 보면 많지 않지만 청도지역에서는 자손이 흥하여 이서면 대전, 각북면 율정, 매전면 지전, 내동, 명대리 등에 집성촌을 형성하여 조상의 유덕을 기리며 살고 있다.

예인상은 1626(인조 4)에 직에서 물러나 율리(栗里)의 산수 간에 돌아와 '홀로 돌이 되어 도를 닦는 집'이란 뜻인 독석암(獨石庵)이라 부르며 세상일에 관계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율강서원의 전신인 경석재 기문에 박재시(朴在時) 여기 암자 하나를 짓고 인중방에 독석(獨石)이라고 이름을 걸어 임천(林泉)에 넉넉히 놀다가 홀로 늙어 세상을 마쳤으니 그 지조를 지키어 속세를 떠난 표치는 백세를 가도 갈리지 아니하였다.”라고 했다.

독석암 예선생 포상비 상충사 묘정비가 서원을 에워싼 푸른 대나무 숲속에서 당신의 큰 삶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은 1914년 경석재(景石齋)로 출발하였으나 1992년 유림들의 공의에 의해 율강서원으로 승호 되었다.

 

사당인 상충사(尙忠祠)’에서 술잔을 받들어 올리며 독석암은이란 시제로 몇 줄 올렸다.

 

 

때묻지 않는 바위입니다

그곳에 선비 한 분이 벼슬을 떠나

임천을 품에 안고 맑고 고운 길을 열었습니다

세월 지나도

그 바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 단단하게

홀로 우뚝하니 솟았습니다

 이름하여 독석암입니다.

 

 

율강서원 전경

 

사당

 

초헌례

향사 장면

 

향사 후 음복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