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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10)고운(孤雲) 선생의 영정을 모신 학남서원(鶴南書院)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10)

고운(孤雲) 선생의 영정을 모신 학남서원(鶴南書院)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향교 홍보장의. 청도문협 회장

 

 

<2019년 11월 8일, 청도신문>

 

  청도문화원 문화지킴이 회원들과 함께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 경주(慶州) 최씨 문중의 학남서원을 찾았다.

이곳의 배향인물은 문창후(文昌候)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 선생이다.

고운 선생은 일찍이 12세에 당() 나라에 유학하였으며 18세에 과거에 급제(及第)하였다.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를 비난하는 토 황소격문(討 黃巢檄文)’을 지어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29세 때 신라에 귀국하자 헌강왕은 시독겸 한림학사 수병부 시랑지서서감(侍讀兼 翰林學士 守兵部 侍郞知瑞書監)을 제수(除授)하였다. 그 뒤 부성군(富城郡) 태수 등을 봉직했으며 38세 때 문란한 정치를 해결하고자 시정 수습책 십여조(施政 收拾策 十餘條)’를 진성여왕에게 올리면서 아찬(阿湌)에 올랐으나 정치적 개혁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42세엔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입산하여 은거 중 생을 마쳤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계원필경(桂苑筆耕)’ 20여권과 사육집(四六集)’등이 있다.  난랑비 서문(鸞郞碑 序文)’은 화랑도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원래 이곳은 경주최씨 입청도 선조인 경산(耕山) 최여준(崔汝峻) 공이 후진을 길러내던 장구지소였는데 1977년 고운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승호되고 또한 고운의 영정(경북 유형문화재 제166)을 사당인 계동사(啓東祠)’ 봉안하고 있다.

영정의 규격은 105× 74이다. 다른 곳에 봉안된 선생의 상은 대부분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은 모습인데 비해 이 영정은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에 있어 중국풍의 문인 상 형식을 취했다. 안면묘사와 옷 주름 처리, 바닥에 깔린 자리의 형태 등으로 보아 이 그림은 조선 후기에 다른 초상화를 본떠서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좌우에 동자, 동녀상이 곁들어지고 선명한 색을 사용했다. 원래 이 영정은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후손인 최한룡 의병장이 해인사 방장회의에서 허락을 얻어 이곳에 모셔 온 것이다.

서원 강당 옆 충효각에는가선대부 판의금부사 경산 최공지 충효비(嘉善大夫判義禁府事耕山崔公之忠孝碑)’가 있다. 경산은 효심이 지극하여 임진왜란 때 노모를 안전하게 피신시켰으며, 또한 의병을 일으켜 많은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1626(인조 4)에 충효로 천거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으며 충효각에 비를 세워 향사하고 있다. 경산재 및 충효각은 2002년도에 복원 및 개축을 했다.

 

정면 3칸 규모의 앙원문(仰遠門)’을 나서며 고운 선생이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가야산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고운 선생/ 일곡리에 오셨다/ 다시는 벼슬을 살지 않으리 / 천년의 다짐 아직도 잊지 않고/ 평상복 차림으로 동자, 동녀의 손을 잡고 계동사에 여장을 풀었다/ 동국 18현 큰 스승 앞에 제자들이 엎드려 배움을 청한다/ 잔에도 향불에도 숨어있던 가르침이 쉬지 않고 걸어와/ 일곡리를 곱게 비치는 햇살이 되고 있다.

 

 

 

<고운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계동사>

 

 

<청도문화지킴이 방문 기념 촬영>

 

 

 

<백일홍 속의 계동사>

 

 

<계동서원 전경>

 

 

<충효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