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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8)군자정 강학계 100주년을 맞이한 추원재(追遠齋)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8)

군자정 강학계 100주년을 맞이한 추원재(追遠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향교 홍보장의. 청도문협 회장

 

 

 

<2019년 10월 9일, 청도신문>

 

2019 9 16(), 화양읍 유등리, 고성 이씨 가문의 추원재(追遠齋)를 찾았다. 이날은 마침 군자정 강학계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 강학계는 고성이씨 청도 입향조인 모헌공(慕軒公) 이육(李育) 선생을 따르는 유림들이 1919년에 창계하여 금년에 100 주년을 맞이했으며 700 여 유림들이 참석한 가운데 향사 및 백일장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모헌(慕軒) 공은 5대조 행촌(杏村) 이암(李嵒) 이래 대대로 문장가(文章家)가 배출된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양친(兩親)의 상()을 당했을 때 각 3년 동안 여막(廬幕)에서 시묘하였으며 순 임금의 효도를 본받아 자호(自號)慕軒이라 하였다.

공은 성종 24(1493) 안기도 찰방(察訪)에 제수되었으나 연산군 4(1498) 무오사화가 일어나 맏형인 쌍매당(雙梅堂) 이윤(李胤)과 중형인 망헌(忘軒) 이주(李冑) 두 형이 거제도와 진도로 각각 유배되었고 다시 연산군 10(1504) 갑자사화 때는 망헌이 참형을 당하였고 형의 외아들마저도 처형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 갑자사화 때 선친 승지공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동생 수찬공(修撰公) 이려(李膂)도 진도로 유배되고 숙부인 이굉(李浤)과 이명(李洺)도 영해와 영덕으로 각각 유배되었으니 한 가문의 수난이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공은 이 난세를 개탄하면서 세상을 피하여 은거(隱居)하고자 안동에서 남하하여 청도 유곡(柳谷) 죽림촌(竹林村)에 정착하였으며 마을 앞에 연못을 만들고 정자를 지어 君子亭이라 하였다.

그후 중종(中宗) 반정으로 난정이 종식되고 공은 중종 2(1507)에 사마시(司馬試) 진사과에 합격했으나 가문이 엄청나게 겪은 화()를 생각하며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후진교도(後進敎導)에만 진력하였다.

후손들은 본거지인 유호(柳湖)를 중심으로 늑평(勒平), 연지(蓮池), 무동(舞洞), 거연(巨淵), 관곡(館谷), 명대(明坮), 방지(芳旨) 등에 분포되어 있다.

묘소는 유호연지를 바라보는 곳 원산 기슭에 있는데 자손이 번창할 태백산 지맥의 신령스런 땅, 영남명기(嶺南名基)로 세칭되고 있다.

추원재는 1818년에 건축되었으며 정면 5칸이다. 그 뒤 장소가 좁아 5칸의 유호재와 7칸의 원산재를 더 짓고 5칸의 전사청을 마련하였다.

나도 그날 백일장 뒷자리에 앉았는데 君子亭 講學契 一百週年記念이란 시제에 따라 글을 올렸다.

創契君亭百歲時 군자정 강학계 백주년 기념시에/ 慕翁懿蹟孰無知 모헌공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누가 모르겠는가/ 文章卓犖養鄕士 뛰어난 문장으로 향토의 선비를 길러내고/ 性學隆崇爲大師 융숭한 성리학으로 큰 스승이 되셨네/ 常禮興仁千世繼 예를 숭상하고 인을 일으켜 천세를 이어가고/ 修風導俗萬年垂 풍속을 닦고 이끌어 만년 동안 드리우리/ 先生自適吟詩處 선생께서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읊던 곳에/ 此會綿綿發展熙 이 모임 끊임없이 발전하여 빛나기를 바라네.

 

 

 

추원재 앞에 있는 유등연지 '군자정'

 

 

강학계를 열기 전 모헌공께 향사를 올리기 위해 유림들이 도열해 있다.

 

 

초헌관 전작

 

 

배례

 

 

모헌공 유허비

 

 

한시 백일장 시제 

 

장원작품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