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강(吉江)에게
- 40년 전 최전방 소대장의 편지
7월 13일(토)
吉江
지금 나는 중부전선인 강원도 철원 땅에서 모기떼를 쫓으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놈의 모기들은 녹색의 제복에 달린 장교 계급장이며 수류탄도 겁을 내지 않고 면상을 성가시게 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6.25 전쟁 중에 가장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그 유명한 철(鐵)의 삼각지(三角地)란 곳입니다. 군사지도를 펴놓고 북쪽의 평강과 남쪽의 철원.김화에 선을 그으면 삼각형이 됩니다. 그 삼각의 능선 곳곳에는 전쟁 내내 고막을 찢는 포성 소리가 화약 연기를 뿜어냈으며 그 소리와 연기에 질식한 젊은이들의 처절한 비명이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전쟁으로 죽어간 이름 없는 병사들의 녹슨 철모가 산야에 힘없이 뒹굴고 있습니다.
이제, ‘휴전’이란 이름으로 포성과 화약 연기는 잠시 멈추고 있지만 언제 다시 이글거리는 활화산의 용암으로 바뀔 지 모릅니다. 전쟁 이후 ‘동족’이라기 보다는 안타깝게 ‘웬쑤’ 쪽으로 각인을 한 남북 병사들. ‘명령만 내리소서’ 눈을 부릅뜨고 정조준을 한 총구에서는 순식간에 불을 뿜을 것입니다. ‘아얏’ 이따금 위협 사격을 하는 총알이 눈앞을 스칠 때가 있습니다. ‘휴’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식은땀을 닦아냅니다.
고막을 때리는 대남 방송 마이크 소리는 철조망에 찢어져 귀청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바람을 타고 삐라들이 만국기처럼 펄럭이고 있습니다. 짐승들이 먹이를 찾다가 지뢰를 잘못 건드려 단말마를 터뜨리며 죽어 가는 소리가 애처롭습니다.
20일 전, 초록색 제복을 입은 애송이 장교는 소위 계급장 하나를 달고 이 무서운 곳에 도착했지요. 처음에는 동서남북도 구별하기 힘들었으나 지금은 군사분계선 너머 적 진지의 동태도 어느 정도 가늠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吉江
한탄강 기슭에서 ‘좋은 강’이란 의미를 가진 ‘吉江’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지 모르겠습니다. 한을 품고 탄식을 하고 있는 한탄강(恨歎江)에서 ‘한탄(恨歎)’이란 비극적인 이름을 가진 아가씨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다면 얼마나 괴롭고 슬픈 일이겠습니까?
물론 한탄강은 처음부터 한탄스러운 뜻을 가진 '한탄강'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의 '한탄'은 '은하수처럼 깊고 아름다운 강'이라는 뜻의 '한여울'을 한자로 옮겨 '한탄강(漢灘江)'이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한탄강' 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오히려 뜻이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태봉국을 세웠던 궁예의 회한에 찬 눈물과 6.25 의 처참한 참상 속에 젊은이의 피가 붉게 흐르면서 기어이 '恨歎江'으로 바뀌고 말았으니 음 따라 전이된 비극 앞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吉江
나는 오늘도 소대원들과 함께 벙커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김신조 일당의 기습 작전이 있은 후, 우리 군은 비상이 걸렸습니다.
남북의 허리를 가로지른 155마일 전선에 겹겹이 쇠고리 철조망을 만들고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아 견고한 진지를 만들었지요. 콘크리트로 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집채만큼 덮어 포탄이 떨어져도 안전하게 하는 영구 벙커. 부임을 하자마자 소대원들을 이끌고 내내 이 작업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이러다간 아주 토목공학 박사가 되겠는데. ”
제1소대장 박영수 소위의 말을 들으며 같이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박 소위는 나와 중학교 동기이기도 하려니와 이름도 비슷한데 생각하는 점도 일치하는 바가 많아 내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약학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약사인데 이렇게 최전방 소대장으로 지내는 것이 안쓰럽기도 하다오. 아무튼 아직도 전쟁의 잔재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이곳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게 되다니, 인연치고는 꽤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구레나룻 수염이 텁수룩한 박 소위와 나의 옷에는 흙과 콜타르가 범벅되었습니다. 전쟁은 상대가 있는 것. 지키지 못하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방어진지 구축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이따금 씁쓸합니다.
“박 소위, 전쟁이 끝나고 나면 뒷날 우리의 자손들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지난 날 전쟁의 역사를 배우는 것처럼 이 벙커 사진도 책에 실리고 그 밑에 ‘남북한 시대의 방어 진지 벙커’라고 설명하겠지.”
하자 박 소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습니다.
吉江
광주의 보병학교로 가기 얼마 전 우리는 대구의 어느 극장에 갔었지요. 그 때 영화가 시작되기 전 ‘대한 뉴스’를 보았죠. 그 뉴스 첫머리에 대통령께서 최전방을 방문하셔서 브리핑을 듣던 장면을 기억하는지요. 그 장면을 보면서 앞으로 나도 저런 곳에서 근무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하자 갑자기 상기한 얼굴로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여기가 바로 그곳이랍니다. 그 때는 그저 농담이었는데. 말이 씨가 된 모양입니다.
작업장에는 이른 바 ‘높은 분들’이 계속 드나드시며 수많은 병사가 며칠 간 애써 한 일이라도 조금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헐어버립니다. 그 때 현장에서 감독을 했던 소대장은 민망함이 상하로 겹쳐 괴롭습니다.
15일부터 시작하는 종합 교육을 위해 어떻게 하든지 오늘은 기어이 작업을 종료하고 철수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그야말로 모든 힘을 다하여 서둘렀습니다. 땅거미가 지고 밤 9시가 되어야 가까스로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7월 15일(월)
서쪽 하늘부터 무너지더니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동이로 퍼붓는 것 같습니다. 야영장에 비가 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吉江
오늘은 종합 교육의 첫날. 이 종합 교육은 우리 부대가 최전방 GOP 부대에 투입되기 직전에 실시하는 훈련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비가 쏟아져도 강행을 한다는 대대장님의 지시에 따라 첫 시간부터 구보로 시작했습니다. 나 역시 같이 뛰었습니다.
“하나 둘, 하나 둘”
매일같이 곡괭이만 들고 다니던 이들에게 ‘앞에 총’ 구보가 어울리지 않아 혼자 웃습니다. 발이 맞지 않습니다. 환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소대장님 저는 치질 환자입니다.’, ‘저는 기관지염 환자입니다.’, ‘저는 맹장염 수술자리가 아직도 아픕니다.’ 거짓말 같은 환자들이지만 어쩌면 전혀 거짓말도 아닌 것 같습니다.
* *
저녁 시간 소대원들 면담시간을 가졌습니다. 우선 화기분대부터 시작했습니다.
분대장 이일수 하사, 부분대장 이경일 병장, 그 다음 박정영 일병 - 나이가 34세입니다. 우리 부대에는 - 다른 부대도 마찬가지이지만 - 출생신고를 늦게 하여 이렇게 늦게 군대에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박 일병은 나보다 무려 10살이나 더 많습니다. 동안(童顔)이라서 그런지 나이보다 훨씬 적게 보이긴 하지만. 그런데 박 일병은 자기보다 어린 병사들 못지 않게 활동적이기도 합니다. 졸병생활이 싫어 하사관학교에 지원을 하기도 했는데 그 놈의 치질 때문에 낙방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내의 나이도 35세라고 합니다. 3남 1녀인데 장녀의 나이가 열다섯 살이랍니다.
“애로 사항이 없는가?”
하고 묻자
“없습니다.”
했지만 어쩐지 힘이 없었습니다.
“아내가 보고싶잖니?”
“아뇨. 그런 건 관계없습니다. 저는 원래 객지 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염전에서 5년 간 일을 하고 석공생활을 6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제 자녀 농사는 그렇게 잘 지었지?”
내가 농담을 하자 약간 홍조를 띤 그는
“글쎄요.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병 문안만은 꼭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가까운 친척도 없는 외동아들인데, 아버지가 제대를 하기 전에 돌아가실 것 같아 불안하고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그를 보며 나도 괜히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그러나 소대장에게는 휴가를 보내 줄 권한이 없습니다. 그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군대란 사회는 역시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곳 아니니? 사실 나이 서른 넷에 부모와 처자식을 고향에 두고 군대 생활을 한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겠구나. 특히 아버님이 병환 중이시라니 더더욱 그렇겠구나.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휴가를 보내주고 싶지만 소대장의 힘이 거기까지 닿지 못하니 안타깝구나. 그렇지만 기억을 해두었다가 기회가 닿으면 상부에 말씀을 드리도록 하지.”
그가 돌아간 뒤 나는 침상에 조용히 고개를 기대었습니다.
- 소대장님 저의 아들을 보게 해주셔요.
병상에 누워있는 수척한 그 아버지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이 때
“일병 오승무, 소대장님께 불려왔습니다.”
우람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습니다.
“응, 승무, 들어와.”
비를 맞으면서도 그 냥 밖에 서있는 그를 억지로 텐트 속에 들어오게 하고 담배 하나를 권했습니다. 승무는 소대장 부임 후, 전령 다음으로 기억한 이름입니다. 행동이 여느 다른 소대원들보다 민첩하고 또 싹싹한 품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기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임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벙커에 떼를 입히기 위해 병사들을 인솔하였는데, 7월의 오후 2시 햇살이 이마를 녹일 듯이 이글거렸습니다. 그곳은 사계청소(射界淸掃) - 사격에 방해되지 아니하도록 사격 진지 앞의 장애물을 없애는 일 -를 하는 곳이기에 햇볕을 피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 때
“소대장님 여기 오십시오.”
하는데 보니 어느 새 풀을 엮어 그늘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애교(?)있는 사나이 오 일병의 나이는 금년 29세. 남의 집 머슴살이로 전전하기는 했지만 고생한 것에 비해 얼굴이 깨끗하고 매우 명석했습니다.
“무슨 ‘승’자를 쓰지?”
하며 물었을 때 그는 손가락으로 ‘승’자를 썼습니다. 나는 그 때 그의 손가락 놀림을 보고 대충 <升>자를 쓰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럼 ‘무’자는?”
했습니다. 그런데 한글로 ‘무’를 썼습니다. 나는 한자를 물었는데 그는 한글을 생각한 것입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으며 겨우 한글로 자기 이름을 쓸 정도였습니다. 나는 정말 그가 ‘무학’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낮에 텐트를 칠 때도 우리 소대에서 제일 빨리, 그리고 제일 멋있게 쳐놓았기 때문에 우리 소대 표준 텐트로 삼자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결혼은?”
“결혼 후 8개월만에 입대를 했습니다.”
“아내가 몹시 보고 싶겠구나.”
“…….”
그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묻는 내가 바보지. 신혼에 얼마나 보고 싶을까요?
“아버지의 성함은?”
“ ‘동’자 ‘학’자입니다.”
“오동학 씨”
“그런데 사실은 삼촌이기도 하고 아버지도 됩니다.”
“그럼 양자라도 간 거니?”
“아뇨.”
“그럼?”
“사실 저의 이름은 오승규입니다. 승무는 죽은 사촌의 이름입니다. 그러니 저는 호적도 없습니다.”
이 무슨 말인가? 내용인즉, 승무의 아버지는 결혼한 지 일년만에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마저 재혼을 해버리자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부모들은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때이니 승무는 사생아 아닌 사생아가 되고만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동갑인 사촌 승무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자 그의 호적을 빌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처가에서도 이것을 몰랐는데 나중에 어떻게 알아 펄펄 뛰었습니다.”
오승무, 아니 오승규 일병의 소망도 ‘휴가’입니다. 역시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면담 내용에 적어 두었습니다.
7월 16일(화)
吉江
칠흑같이 어두운 밤, 나는 당직 임무를 마치고 이제 겨우 몸을 좀 누였습니다. 야전 텐트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대학 캠퍼스에 있을 때 길강과 나는 비의 색깔을 두고 다툰 적이 있죠? 나는 그때 비의 색깔을 갈색이라고 말하자 江은 갈색은 어두워서 싫다고 했죠? 그 때 초록색이라고 귀엽게 우기던 일이 생각납니다. 키는 별로 크지 않지만 마음만은 크다고 야무지게 말하며 초록색을 사랑하던 江. 웃을 때 옴팍 파인 볼우물이 너무나 매력적이던 江. 강이 좋아하던 초록색 제복을 입은 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지금 방학이죠? 학교에 다닐 때 그렇게 기다려지던 방학이 지금은 매우 두렵고 싫습니다. 나의 욕심을 말해줄게요. 바다나 산, 들 등 다른 초록색을 사랑하지 말기를. 하하.
누군가 헛기침을 컹컹하며 나의 텐트 문에 노크를 했습니다.
“누구?”
텐트의 단추를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서는 그는 현영택이었습니다.
“소대장님 주무십니까?”
“아냐, 들어와.”
나는 상반신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주머니에 감추어 온 과자 한 봉지와 사이다 한 병을 재빨리 내어놓고는 소녀처럼 부끄러워하다가 돌아갔습니다.
순간, 영택의 얼굴에 吉江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눈이 많이 내렸던 어느 산사. 우리는 우연하게 벽을 사이에 두고 기거를 했지요. 나는 그때 괜히 공부라는 것을 한답시고 그곳에 간 것 같습니다. 江을 만날 그런 연이 있었어 그런지 그 절에 공연히 가고 싶더라구요. 아무튼 그 겨울의 산사, 강처럼 예쁜 아가씨와 벽을 나란히 두고 누워있는 것만 해도 너무 따뜻하고 행복했는데. 어느 날 江은 장갑 한 켤레를 손수 짜서 나의 방안에 살며시 밀어 넣고는 급하게 문을 닫았지요. 그때의 행복감은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영택이가 전해주는 사이다 한 병과 과자 한 봉지. 돈이 없는 병사들에게는 큰 성의입니다.
“그런데……. 왜?”
‘아’하고 짚이는 것이 있습니다. 부임한 지 이틀째 되던 날인가, 그도 역시 휴가에 대한 간절한 청원을 했습니다. 나이 30세. 그는 결혼 후 2개월만에 군에 입대했습니다. 아내가 보고 싶은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 때 역시 수첩에 적지 않았던가?! 모든 병사들의 한결 같은 소망은 휴가입니다. 명색 장교인 나도 江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 간절한데 왜 병사들이 가고 싶지 않을까요?
7월 17일(수)
“소대장님. 소대장님”
처음에는 빗소리를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사람 소리였습니다.
“소대장님. 소대장님”
좀 어눌하지만 나름대로는 급한 소리. 눈을 비비며 시계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새벽 3시. 목소리의 주인공은 권봉구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니?”
“전화가 왔대유-.”
“어디에서?”
“모르겠시유-.”
참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권봉구에게 따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는 우리 소대뿐만 아니고 우리 대대에서도 최고 고문관으로 소문이 난 병사입니다. 고문관 - 군대에서 사용하는 은어. 매사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바보짓만 골라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일단 급한 김에 중대본부로 뛰어 갔습니다. 아주 조용했습니다. 아무도 그런 통보를 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어떻게 된 것일까? 아마도 누군가 화장실에 가다가 봉구가 보초서는 것을 보고 장난기가 발동한 것 같습니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향도에게 봉구는 가능하면 불침번을 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향도는 곤란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불침번을 세워야 한다면 맨 마지막에 배치하라고 했습니다. 그를 처음이나 중간에 세우면 글자를 모르고 시계도 볼 줄 모르기에 누구를 언제 깨워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마지막인 말번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몇 사람을 건너 뛰어 봉구 차례가 되었다고 인계를 하면 그는 꼼짝없이 몇 시간이고 멍청하게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도록 소대원들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했습니다. 손전등을 비추어 불침번 명단을 살펴보았습니다. 분명히 권봉구는 말번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권봉구, 차례가 맞아?”
“예, 지가 마지막이래유”
이럴 수가 있는가? 화가 났습니다. 고약한 작자들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장 ‘비상’을 걸 마음이 있었으나 꾹 참고 기다리고 있다가 평소보다 조금 일찍 기상을 시켰습니다.
“2소대 전원 연병장에 집합.”
병사들은 곤한 잠에 취해 있다가 눈을 비비며 텐트 문을 빠져 나왔
습니다. 향도가 급하게 줄을 세웠습니다.
“어제 저녁에 불침번을 서지 않는 사람 나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럼 권봉구는 누가 깨웠니?”
엄규열이 손을 힘없이 들었습니다. 그 역시 봉구보다는 조금 나아도 역시 문맹자로서 고문관 중에 한 사람입니다. 우리 소대에는 유독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새벽 3시에 말 번을 깨우다니. 말이 되는 일이니?”
“교대를 하여야 되겠는데 모두 불침번을 섰다고 하니 권봉구를 깨웠
당께요.”
그에게도 가장 만만한 것은 권봉구인 것입니다.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도 정말 이럴 수 있는가?”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전부 주먹 쥐고 엎드려.”
가랑비가 새벽녘의 살갗을 후빕니다. 일교차가 심한 지역이기에 비록 여름이래도 새벽에 맞는 비는 겨울 진눈깨비와 같습니다.
吉江.
내가 너무 심한 것 같죠. 나도 좀 심한 것 같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여기는 최전방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적들이 침입할지 모릅니다. 적들은 항상 우리들의 허점을 노리고 있습니다.
“경계는 우리 군인들의 생명이다. 불침번은 명단도 임의로 바꿀 수 없지만 시간도 잘 지켜야 한다. 꾀를 부려 마구 당겨버리면 말번은 몇 시간 동안 꼼짝 없이 서야 한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여 이런 행동을 한 것은 군인으로서도 물론이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겠지?”
“예”
“오늘 일을 깊이 반성하고 전우애로 뭉쳐 울 때 같이 울고 웃을 때 같이 웃는 소대원이 되도록 하자.”
“예.”
크게 다짐을 했습니다.
“*끼들 똑똑하게 서지 않고.”
송 하사의 금속성 목소리가 날카롭게 찢어졌습니다. 전 날 불침번들은 고개를 떨어뜨렸습니다. 애꿎은 담배만 죽여냅니다. 벌써 석 대째 연거푸 불을 붙입니다.
7월 19일(금)
“소대장님”
하고 누군가가 등뒤에서 불렀습니다. 진성우 하사였습니다. 진 하사는 얼마 전 작업장에서 TNT 파편을 입고 입원하였던 1분대장입니다. 그가 빨리 완쾌하기를 빌었는데 이렇게 무사히 부대로 돌아온 것을 보니 기뻤습니다.
“오늘 진 하사 퇴원을 축하하는 소대회식을 하자.”
막걸리 두어 말에 안주도 준비했습니다. 저녁 7시, 우의를 펴고 그 위에 소대원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았습니다. 술이 한 바퀴 돌아갈 즈음 신탄진 담배도 한 개피씩 권했습니다. 신탄진은 병사들의 화랑 담배보다는 고급담배입니다. 담배가루가 입안에 쏟아지는 화랑 담배를 피우다가 필터가 달린 고급담배를 피우게 되니 새로운 맛이겠지만 어쩌면 소대장이 직접 권하는 것이니 담배 맛이 좀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드디어 흥겨운 노랫가락이 흘러나옵니다. 음정, 박자가 틀리면 대수냐. 흥겨우면 그만이지. 박정영 일병의 진도 아리랑은 제대로 곡을 탔습니다. ‘아리아리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흥겨운 가락에 병사들 오금을 못씁니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병사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우리 모두 정든 고향을 떠나 산 설고 물 설은 이곳에 왔다. 민간인이라고 전혀 구경할 수 없는 이곳. 목숨의 위협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서 생활할수록 더 따뜻한 인정을 가져야 한다. 서로 돕고 합심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예”
목소리가 높습니다. 나는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7월 20일(토)
역시 비가 옵니다. 일기를 적다가 오늘이 토요일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吉江,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이지?"
언젠가 이런 질문을 했을 때 江은 나에게 조용히 되물었지요.
“글쎄. 무엇이 가장 무거울까요?”
나는 가장 무거운 것이 ‘시간’이라고 했지요. 시간은 계속 축적이 되고 있으니 얼마나 무거운가? 그러나 江은 아니라고 했지요. ‘시간’은 가면 갈수록 지워지는 것. 그래서 가볍다고 했지요. 정말 무겁고 가벼운 것은 무엇일까요?
‘진중 근무 교장’을 만들기 위해 이동을 했습니다. 한탄강가의 어느 벌판. 전쟁이 할퀸 이 상흔의 벌판. 봄이 와도 꽃이 피지 않고 열매 하나 제대로 달리지 않습니다. 억새풀이 죽창을 내밀듯 하늘을 향해 분노의 함성을 내지를 뿐입니다.
언젠가 민족 비운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영화를 촬영하였던 지점이 이곳에서 멀지 않습니다. 한탄-. 무엇을 한탄하고 있는가? 묵묵히 한숨만 받아먹고 살아온 강. 평원 따라 흐르면서도 평원보다 아주 아래에 숨어 있어 평원을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강이 한탄을 하면서 흐르고 있습니다. 강의 색깔도 검고 들의 색깔도 검은 이곳에 슬픈 대남방송만 황사처럼 쏟아집니다.
7월 22일(월)
“박 소위 내일 대대장님께 검열을 받아야 하니 밤이 새우더라도 교안 준비를 해야 되겠어요.”
중대장의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吉江, 나는 지금 촛불 앞에서 모기의 끈질긴 공격을 받아 가며 교안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나의 모습을 말해줄까요? 촛불 앞에 머리를 박고 배를 깔고 엎드려있습니다. 책상도 없지만 바로 앉으면 텐트의 지붕이 머리에 닿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교안’ 이라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대학 4년 때 교생 실습을 나갔을 때 오늘처럼 밤을 밝히며 교안을 작성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사람을 구하기 위해 교안을 작성했는데 지금은 사람을 잡는 연구를 하는 것. 지금 나는 선생에서 소위로 변하면서 이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7월 29일(월)
“비상”
“비상”
일요일의 새벽공기를 가르며 요란하게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비상이라니’ 나는 모포를 걷어차고 손전등을 찾아 옷을 입었습니다. 적침투에 대비한 훈련 중의 하나인 ‘진지 점령’ 비상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중대본부에 올라가 명령을 수령 받고 중대병력들을 집합시켰습니다.
‘진지 - 이곳은 바로 우리의 무덤이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 한다.’
우리 사단장님은 늘 그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진지에 출동하여야 하며 그곳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적을 막아야 합니다. 물러서서는 안됩니다. 이곳에서 최후를 마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묻힐 무덤을 오늘 미리 찾아가는 것입니다. 행군 종대로 늘어선 대열.
“동이 트는 새벽 꿈에 고향을 본 후 외투 입고 투구 쓰면 맘이 새로워…….”
군가를 부르지만 별로 신이 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동이 트는 아침, 병사들의 가쁜 숨소리. 그 거친 숨소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자연은 풍만한 초록색 가슴을 한껏 뽐내며 넘실대고 있습니다. 햇살이 눈부십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저 햇살은 남쪽은 물론 북녘 땅이라고 조금도 인색하지 않습니다. 철조망이 있기는 해도 이 초록의 평원은 너무 평화롭습니다. 되새김질을 하는 젖소 한 떼가 살아야만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이 평원에 무덤을 운운하며 총을 힘차게 잡다니.
吉江.
우리 언젠가 대구 근교에 있는 언덕에 올라 푸르고 넓게 펼쳐진 구릉을 바라보며 목장에의 꿈을 도란도란 나눈 적이 있었죠. 그런데 지금 이 평야는 그곳보다 훨씬 더 넓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젖소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 살아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을 듯한 땅. 그러나 이곳은 소가 없습니다. 먹이가 될 만한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도 소를 기를 수 없습니다. 평야 한 복판에 전설처럼 슬픈 역사를 가진 ‘아이스크림 고지’가 힘없이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름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동화같은 ‘아이스크림’이지만 황량한 흙무덤에는 지우고 싶은 슬픈 사연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달콤하고 부드럽다고 붙인 것이 아니고 6?25 전쟁 때 병사들의 시신이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렸다고 붙여진 이름이니 기가 막힙니다. 시신들이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린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무섭고 처참한 현장입니까? 정말 그렇게 싸워야 했던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싸웠던가? 싸우지 않을 수 없었기에 싸움을 했고 그러다가 총을 맞으니 죽게 된 것이고 그 시신은 힘없이 산비탈로 흘러내렸습니다. 오늘따라 한탄강의 물줄기는 더더욱 슬프게 흐르고 있습니다.
8월 20일(일)
아침에 눈을 뜰 때, 햇살이 비치는 날과 비가 오는 날은 기분이 다릅니다. 오늘 아침, 빗소리가 요란합니다. 비가 내려도 교육은 정상대로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비는 무섭게 느낄 정도로 심하게 퍼붓고 있습니다.
“비가 오는데도 교육이야.” 누군가 투덜대었습니다. 오늘 비는 모래가 섞인 강밥과 같습니다. 나도 병사들처럼 “그래 맞다. 뭐 때문에 비가 오는데 교육을 하지.” 하고 투덜대고 싶었지만 소대장은 엄숙하게 단 위에 올라 크게 외쳤습니다.
“비가 많이 오고 있다. 교육은 안 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을 해야 한다. 왜냐. 군인이기 때문이다. 비가 와도 적들이 쳐들어오면 전쟁을 해야 한다.”
‘군인’ - 참으로 편리한 단어입니다. 군인은 일요일이나 공휴일이 없습니다. 또 눈비도 쉬게 하지 못합니다.
8월 21일(목)
훈련을 하다말고 잠깐 휴식. 이때 느닷없이 송 하사가 뜬금없이 엉뚱한 부탁을 했습니다.
“소대장님, 저 중신 한 군데 해 주십시오.”
“갑자기 웬 중신?”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떠오르는 대상이 있습니다.
“응, 해주지.”
정영이가 딸이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난 것입니다.
“정영이 딸이 열다섯 살이라고 했던가?”
이 때 정영이의 대답이 있기 전, 송 하사가 말을 가로채었습니다.
“어이 정영이 너 나를 사위 삼을래.”
이때 진 하사가 끼어 들었습니다.
“짜식아 장인어른께 사위 삼을래가 뭐야.”
모두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때 정영이 히죽 웃으며
“향도님은 사위 삼지 않을래요.”
했습니다. 또 웃음.
“그럼 어떡허나. 참 엄기욱 너도 22살 먹은 동생이 있지?”
이 때 기욱이 대답했습니다.
“좋습니다.”
송 하사 입을 벙글거리며
“처남 한 잔하게. ”
하면서 막걸리 한 잔을 권하자 모두 크게 웃었습니다.
8월 22일(금)
잠결에 무슨 소리가 급하게 들렸습니다. 얼른 일어나 텐트 문을 열고 보니 밖은 아직 캄캄한데 병사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상입니다.”
안도의 숨을 쉴 수는 있었으나 좀 이상했습니다.
“왜 기상이 이렇게 빠르지?”
“작업을 나간대유.”
일직사관 이 소위를 찾았습니다.
“어떻게 된 거지?”
“전방 GP 작업을 나가라는 지시야.”
“뭐, 작업, 어제까지는 오늘 사단에서 나와서 전투력 테스트를 한다고 했잖아”
“누가 아니래”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 아무튼 갑자기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고개만 갸우뚱할 뿐 그것으로 끝입니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을 뿐이니까. 아직 잠이 덜 떨어진 병사들을 데리고 쇠고리 철조망 안 GP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30리가 족히 되는 길입니다. 병사들도 별 말이 없습니다. 그들도 항상 바뀔 수 있는 것이 군인들의 일정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는 것뿐입니다. 거의 뛰다시피 빠른 걸음 행진입니다. 옷이 젖고 숨이 찼습니다. 운반 급식으로 아침밥을 때우고 곧 진지 작업으로 들어갔습니다.
등짐을 진 병사들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오후, 병사들의 고생 덕분에 GP는 흙과 떼를 이고 편안하게 파묻혔습니다. GP요원들은 그들의 벙커가 적에게 완전 노출되어 있기에 언제 포탄 세례를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덮어 주니 그나마 약간은 덜 불안할 것입니다.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북쪽 GP에서는 김일성 장군 노래가 확성기를 타고 요란했습니다. 이제 좀 익숙할만도 한데 저 소리만큼은 늘 생경하고 을씨년스럽습니다. 언제 저 고약한 노래가 멈출지.
8월 24일(일)
吉江
비는 줄기차게 계속 쏟아지고. 여기에 바람까지 으스스 부니 체감 온도는 완전히 겨울입니다. 장작불을 피웠습니다. 불을 빨아먹으려고 비비적거리는 초록색의 사나이들. 아직은 여름이 진행 중, 낙엽보다는 오히려 활기찬 생명에의 찬가를 즐겨야할 즈음인데. 식기를 들고 불가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언제쯤 추억으로 떠오르게 될 거야. 쇠고리 철조망 안, 여름에 장작불을 지펴놓고 밥을 먹던 것.”
나의 말에 공감이 가는 듯 병사들은 따라 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