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
궁예란 이름을 기억하는가?
눈이 하나라서 외로웠던 사람.
조각난 노래 귀퉁이에 천년을 낙서했는데
이 무슨 형벌,
흰 옷 한 벌도 용서받지 못하고
석양 드리운 이 들녘에 깡통들이 뒹군다.
철의 삼각지
백마 능선에 불쑥불쑥 일어나는 파편 조각들.
달리고 싶은 철마의 염원을 누가 막는가.
이 도시의 좌표를 읽어라.
불빛이 삭은 땅.
주춧돌이 남아 있어 위안이 될까
恨歎일래, 정말 恨歎.
6월은 이상하게 달력의 종이가 무겁게 느껴진다. 특히 25일 아침은 더 그렇다. 나는 빛바랜 군사 수첩에 메모된 40 년 전 시를 읽으며 한탄강을 생각한다.
철원 평야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뱀처럼 휘어져 흐르는 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탄강'이다. 나는 처음에 이 강의 이름은 따로 있고 전쟁 중, 젊은이의 피가 처절하게 흘렀기에 '한탄강(恨歎江)'이란 별명을 얻었으려니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물론 처음부터 한탄스러운 뜻을 가진 '한탄강'은 아니었다. 원래 '한탄'은 '은하수처럼 깊고 아름다운 강'이라는 뜻의 '한여울'을 한자로 옮겨 '한탄강(漢灘江)'이라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의 '한탄강' 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오히려 정감이 넘치는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6.25 의 처참한 참상 속에 젊은이의 피로 붉게 물들이면서 기어이 '恨歎江'으로 바뀌고 말았으니 음 따라 전이된 비극 앞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 강의 생김새도 여느 강과 다르다. 깎아지른 절벽을 안고 숨 가쁘게 흐르고 있다. 강폭도 8미터밖에 되지 않는 곳이 있는가 하면 가장 넓은 곳도 60여 미터에 불과하다. 넓이로 보면 강이라기보다 냇물에 가깝다. 그러나 길이는 110킬로미터나 되고 깊이 역시 30 - 50미터나 되는 곳이 많으니 강이라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한탄강이 흐르고 있는 철원 평야는 우리나라 5대 평야 중에 하나이다. 그야말로 지평선이 보이는 곡창지대이며 교통의 요새지였다. 금강산 행 전철과 경원선 철도가 이곳을 지나갔다. 이곳은 지정학적으로도 국토의 중간이기에 새로운 나라가 들어 설 때마다 늘 도읍지의 후보에 들어갔다. 실제 태봉국을 개국한 궁예는 이곳을 도읍으로 삼아 명실상부하게 국가의 중심으로 키운 적도 있다. 그런데 궁궐을 지으면서 방향을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금학산 주봉(主峰)에 맞추었으면 나라가 계속해서 번성했을 것인데 한 쪽 눈이 보이지 않던 궁예는 옆 봉우리가 더 높은 줄 알고 그 쪽으로 잘 못 맞춘 통에 나라가 오래 가지 못하고 18년 만에 망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니 이 땅의 한탄스런 비극은 궁예 시절부터 이미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이던 송강 정철이 이곳을 순시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는 궁예 왕궁터에 들러 '궁왕 대궐 터에 까마귀와 까치가 지저귀고 있구나. 저 까마귀와 까치들은 천고의 흥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고 그의 기행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 행간에 아픔을 새겼다. 지금은 그때보다 몇 만 배 더 비극의 땅이 되어 있다. 송강이 다시 살아 이 현장을 보게 된다면 지금은 붓이라도 들 수 있을는지!
전쟁은 이 철원 땅에 너무 심한 상처를 안겨주었다. 정말 이곳만큼 참혹한 전투를 벌인 곳도 드물 듯하다. 원래 삼십팔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될 당시 철원은 삼팔 이북, 즉 김일성 치하였는데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의 국군들이 평야의 반 정도를 수복했다. 김일성은 이 철원 평야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평야가 부족한 북쪽으로서는 이 땅이야말로 마지막 보루와같은 황금의 땅이었다. 그래서 이 땅을 잃고 난 뒤 김일성은 배가 아파 일주일 동안이나 밥을 굶었다고 한다.
북에는 평강, 남에는 철원 김화가 있어 선을 그으면 삼각지대가 되기에 이 일대의 전투를 이름하여 ‘철의 삼각지 전투’라고 했다. 밀고 밀리기를 수없이 거듭하던 땅, 이곳에 ‘백마고지’가 있다. 이것도 전쟁이 만들어 준 이름이다. 포탄에 산이 깎인 모습이 백마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것이다. 이 고지는 열흘 동안에 주인이 무려 스물 네 번이 바뀌었다. 그야말로 죽이고 죽는 혈전이었다. 그 공방의 포탄 속에 젊은 시신들은 산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전투에 희생된 장교들의 군번만 해도 한 트럭은 될 것이라고 한다. 장교 군번 양이 한 트럭이면 병사들의 군번 양은 계산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물론 과장이 다소 있겠지만 그만큼 젊은이가 엄청나게 희생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정말 恨歎, 또 恨歎이었다.
내가 ROTC 과정을 마치고 이곳에 복무할 때만 해도 증오와 살기가 가득했다. 단지 겉으로는 ‘휴전’이었기에 전면전은 없었지만 피아간의 총구는 상대편을 향해 항상 정조준 되어 있었다. 이따금 교전도 있었으며 백주에 납치되는 일도 많았다.
KAL기의 피랍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당시 나는 대대 정보관이었다. 그런데 워낙 갑자기 당한 일이라 정보관들의 피랍상황 보고가 대대마다 달랐다. 화가 난 연대장께서 대대정보관들을 집합시켰다. 그 날 완전군장을 꾸려 무릎을 꿇고 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얼마 후, 북쪽 GP의 집채 만한 마이크에 납치된 여 승무원들의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그곳에 와 보니 북쪽이말로 '낙원' 중 낙원이라고 했다. 공포에 질려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들은 20대 초반, 나와 나이가 비슷한 젊은 여성들이었다. 강압에 못 이기어 거짓 선전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억울하여 노리쇠를 몇 번이고 후퇴, 전진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철원 시가지는 포화로 불탄 이후 잿빛 도시가 되었다. 노동당사, 은행, 학교, 경마장, 공장 등등 모든 건물 및 시설들이 찢어지고 으스러졌다. 아직도 민간 통제선 안에 있기에 관람만 일부 허용될 뿐 주민들이 정착하여 살지 못한다. 잡초 우거진 속에 노을만 피어났다 사라진다. 적막의 공간에는 거미줄 칭칭 감고 박쥐들이 서식한다. 불임의 땅이 되었다.
월정리역, 안개비 질곡 속에 멈추어 선 기차가 팻말 하나 들고 애절하게 외치고 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그 세월이 벌써 60년이다. 정말 이대로는 안 된다. 달빛이 아름답다던 월정리, 이곳의 기차는 이름에 어울리게 달빛 낭만 속에 달려야 한다. 끊어진 신탄리역 - 철원역 - 평강역의 철로를 이어서 싣고 와야 한다. 억울하게 억류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 모두 만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철조망마다 더께가 된 붉은 이끼 걷어내고 사람의 향기가 가득한 땅을 만들어야 한다. 그날이 바로 '恨歎'이 아닌 '한여울', '漢灘江' 본래의 제 모습을 찾는 날이다.
다행히 아직도 열차는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있다. 아가를 등에 업고 남편을 찾아가던 아줌마의 찹쌀떡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그때의 승객들은 아줌마 곁에서 아가를 어른다. 언제라도 역장이 깃발을 힘차게 흔들면 기차는 기적소리를 우렁차게 울리며 출발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염원이다.

(사진은 박영환 소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