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울었다
행전 박영환
“자취할 수 있제”
대구에 있는 중학교에 합격하여 들떠 있는 나에게 아버지가 던지신 말씀이었다. 할머니께서 펄쩍 뛰셨지만, 자취를 시켜야 한다는 아버지의 생각은 매우 확고하셨다.
“…….”
“처음에는 좀 어렵더라도 조금 지나면 몸에 붙게 될 끼다. 니는 니대로 고생을 한다고 생각을 하겠지만, 니는 그래도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호강인기라. 덕준이는 공장에 다니면서도 자취를 한다 카더라.”
하기야 비록 자취라 해도 대구에 있는 중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만 해도 큰 영광이었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대구로 진학한 학생은 두 사람뿐이었다. 시골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도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 부모님의 농사를 돕든지 아니면 도회지 공장이나 점방에 취직을 했다.
아무튼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대구의 겨울 날씨는 무척 추웠다. 방안 윗목의 잉크병이 얼 정도였다. 이렇게 추운 아침에 일어나 우물가에서 쌀을 씻노라면, 손끝이 아리다 못해 마침내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찬물에 손을 넣는 것이 너무 싫어 숟가락으로 쌀을 휘휘 저었는데 덜 씻긴 쌀로 밥을 지으니 군내가 지독하게 났다. 거기에다 반찬까지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자취만 시킨 것이 아니라 용돈까지 주지 않으셨다.
“학생이 공납금만 있으면 되지 용돈은 무슨 용돈, 나는 군대 생활을 6.25 전쟁 중에 했는데 그 때도 돈 한 푼 쓰지 않았고, 심지어 지급 받은 비누 조각까지 아껴서 제대할 때 몽땅 가지고 왔다. 그런데 하물며 공부하는 학생이 돈이나 쓰며 노닥거린다면 공부는 언제 할 끼고.”
머리를 긁으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돈을 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친구들이 국화빵이나 사탕을 사 먹을 때 도저히 참지 못하고 같이 사먹고 말았으며 이따금 만화방에도 갔다.
용돈을 타지 못한 주제에 돈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반찬값을 그곳에 탕진(?)한 것이다. 그런 때 이 학생의 반찬은 ‘맹물 된장탕’이었다. 말하자면 순수한 맹물에 된장 덩어리만 두어 숟갈 넣어 끓이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주인집과 한 부엌을 사용하였는데 주인집 아주머니가 보아도 한창 먹을 나이에 ‘맹물 된장탕’을 끓여대니 딱하기 이를 데 없었던 모양이다. 아주머니는 혀를 차면서 이따금 썰다 남은 파라든지 멸치 대가리, 김치 등을 넣어 주었다. 비록 어쭙잖은 것이라도 얼마나 눈물이 쏙 빠지게 고마운 일인가. 그것들이 들어가는 날은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밥도 두 그릇이나 비우고.
자취 생활 중, 내내 ‘화두(?)’ 하나가 있었는데 ‘밥을 하지 않고 밥을 먹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해괴한 방법이 있을 법이나 한 일인가. 그런데 어느 날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가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튀밥’을 만들자. ‘튀밥’, 그러했다. 어차피 반찬이 없기는 마찬가지, 밥을 ‘맹물 된장탕’에 말아먹으나, 튀밥 먹고 물을 마시나 그놈이 그놈 아니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생각난 김에 저녁 해거름, 시장 통 튀밥 집으로 달려갔다. 한 되를 튀기니 튀밥이 한 말이나 되었다. 고소한 냄새가 코로 솔솔 들어왔다. 저녁 식사를 튀밥으로 했다. 입에 사르르 녹았다.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머리를 두드리며 쾌재를 불렀다. 아침도 튀밥을 먹었다. 저녁보다는 맛이 덜했지만 손가락이 시리지 않은 것만 해도 대성공이었다. 점심 도시락에도 튀밥을 가득 담아 갔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점심시간,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튀밥 냄새가 너무 비위에 거슬렸다. 입도 껄끄럽고 냄새가 역겨워 한줌도 입에 댈 수 없었다. 이렇게 쉽게 질리다니, 입이 이처럼 간사할 수 있는가. 탄식이 나왔다.
“야, 도저히 못 먹겠다. 누구 튀밥 먹을 사람 없나?”
“먹을 사람 여기 있지.”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순식간에 해치웠다.
“집에도 아직 많다”
집까지 따라온 녀석들은 깨끗이 청소를 했다. 공연히 아까운 쌀만 날렸다. 그 날 저녁 나는 울었다.
얼마 뒤 다시 꾀가 생겼다. 국수를 끓여 먹자. 국수가 그래도 가장 간단한 대용식이었다. 그 당시는 라면이 없었다. 라면이 있어도 사먹기 힘들었겠지만 아무튼 국수는 한 다발 있었는데, 내가 언제 말만 들었지 국수를 끓여 보았던가. 그런데 이 요리사 보게. 물을 한 솥이나 잡더니 처음부터 찬물에 국수 다발을 넣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열심히 불을 지폈다. 어서어서 끓어 주게. 이놈의 배에 쪼르락 소리가 나요. 그래, 이윽고 우당탕 끓기 시작했다. 되었구나 생각하고 뚜껑을 열었겠다. 그런데 젓가락을 휘휘 젓는데 우째 이런 일이. 국수 가락은 어디 가고 밀가루 범벅이구나. 이 어설픈 요리사야, 물이 끓고 난 뒤에 국수 다발을 넣어야지. 솥뚜껑을 쾅 닫았다. 그 때도 나는 울었다.
또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감자를 삶아 먹을 끼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주인아주머니께 부탁하기로 했다.
“이렇게나 많이 삶아서 우짤라고! 다 못 먹을 낀데.”
부탁하는 김에 좀 많이 삶아 두려 한 것이다.
“괜찮심더.”
주인아주머니는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숙달된 손놀림으로 이내 삶아 주었다.
“다섯 사람 정도가 먹어도 남겠다. 천천히 먹어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소쿠리에 받쳐놓고 보니 당장 부자가 된 것 같았다. 한 알 두 알 먹기 시작했다. 주린 배라서 그런지 이놈의 감자가 그렇게 맛이 있을 수 없었다. ‘내 정말 이렇게 맛있는 감자는 생전 처음이다.’ 중얼중얼. 내심 이틀 정도는 이것으로 배기려고 생각했는데 한 개 두 개, 먹다가 보니 그 날 저녁에 몽땅 다 먹어 치운 것이다.
이윽고, 밤중, 아니나 다를까! 뱃속에서 구라파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 많은 감자를 잘도 해치웠으니 뱃속인들 무심할까! 삼일 동안이나 결석을 하고 끙끙 앓았다. 그 때는 정말 정말 많이 울었다.
중학교 시절, 자취를 시키고 또 용돈도 주시지 않던 아버지가 매우 원망스러웠다. 그것이 나에 대한 아버지의 간절한 사랑이라고 안 것은 한참 뒤이다.
사실 나는 어머니가 시집을 온 뒤, 10년 만에 태어난 집안의 종손이다. 집안 형편도 가난한 편은 아니었으니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할머니의 손에서 응석받이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응석받이로 객지에 보냈다가는 자칫 빗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 염려하여 일부러 자취를 시키고 용돈도 주시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신 지금, 이따금 내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교훈으로 들려주며 추억과 그리움에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