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이 익을 무렵
행전 박영환
쓰르라미는 아직도 여름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요란했지만 풋감은 계절의 문턱에서 꼭지부터 조금씩 붉은 빛을 더하고 있었다.
1970년 구월 어느 날, 경북, 아담한 시골의 남녀 공학 고교에 1학년 담임으로서 교단 초년생이 되었다. 시리도록 초롱한 눈망울의 시선을 받으며 첫 교단에 섰다. 급장의 '차렷, 경례' 구령이 있고 '반갑습니다'하는 인사가 있을 즈음,'쿡'하는 웃음 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교실에 일순간 유리창에 부딪치는 폭소가 일어났다. 얼른 옷 매무새며 머리를 쓸어 보았으나 별반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억지로 태연한 체 정중한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급장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더 크게 '차렷'를 외쳤다. 잠시 진정되는 듯 하던 교실은 또 다시 까르르, 껄껄. 이유 모를 웃음의 사연이나 알려고 몇 번이나 까닭을 물어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대답뿐이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겨우 인사를 마치긴 했지만 쓴 약을 먹고 물을 마시지 않은 것처럼 개운치 못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차렷, 경례'를 하는데, 내가 군인들이 하듯이 손을 재봉선 위에 얹고 빳빳한 부동자세를 취했던 것이, 아이들의 눈엔 너무 이상하여 웃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R.O.T.C. 장교로 군 복무를 하다가 땀 냄새도 가시기 전 바로 교단에 서고 보니 잠재된 습관이 그런 모습을 연출한 모양이었다.
그 이후, 인사 받는 자세도 점차 세련(?)되었고 이 아이들이 3학년이 되었을 때는 적어도 손을 재봉 선위에 올려놓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손은 교탁 위에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그러나 이번엔, 손 놓을 자리가 문제가 아닌 발 놓을 자리로 고민하게 되었다. 이들의 담임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시골 학교이지만 그들의 이름은 역시 고3이었다. 불과 일년 반의 일천한 교직 경험, 그들의 교실에 발을 들여놓을 자신이 없었다. 3학년에 다른 반이라도 있다면 상의도 하며 눈치로 따라갈지 몰라도, 한 반밖에 없으니 모든 사항을 혼자 처리해야 할 형편이었다.
몇 번이나 사양을 했지만 막무가내로 맡기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여 놓았다.그러나 막막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고심하던 차에, '발로 뛰어라' 하던 말이 생각났다. 육군 소위 시절, 사단장은 우리들을 모아놓고 일갈했다.
"초급 장교는 발로 뛰고 영관급은 머리로 뛰고 장군은 배로 뛴다" 즉 초급 장교인 소대장은 근면성이 가장 요구되며, 참모들인 영관급은 두뇌로 보필해야 하며, 장군은 두둑한 뱃심으로 부대를 통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 담임도 발로 뛰는 거다. 상황이야 다르다 해도 근본적인 자세야 무엇이 다르겠는가?, 곡식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에 자란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선 학급의 급훈을 '불가능을 극복하자' 라고 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무계한 용기이다. 아니, 용기라기 보다는 만용에 가까웠다. 어찌 불가능을 극복한단 말인가?. 그 이후, 나는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하루를 하루 되게 하자' 란 급훈을 사용했다. 이는 이성을 되찾아 현실로 돌아온 것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용기가 그만큼 줄어든 결과로도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그 당시엔 그렇게 극약 처방(?)을 해야 할 이유도 있었다. 이 학교는 겨우 4회만 졸업했을 뿐이며 그 동안 입시 성적도 변변치 못했다. '입시 성적이 좋을 수 없다' 는 선입견이 지배했다. 선생님들도 그러했고 더구나 학생들은 자학에 가깝도록 자신을 비하하고 있었다. 그도 탓하지 못할 것이, 저들의 또래 중 가정 환경이나 성적이 괜찮은 아이들은 모두 도회지의 학교로 진학한 터인데 무슨 재주로 그들을 따라 잡느냐는 것이었다. 다른 선생님들도 발을 동동 굴리는 내 모습이 너무 순진하여 안스럽다는 듯, 잘되면 좋고 아니면 그저 사고 없이 한 해만 잘 넘기면 본전은 된다는 투의 의미 있는 농담을 던졌다. 그런 말들에 충분한 사유가 있다는 것은 이해가 갔지만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싸움도 하기 전에 항복을 생각한다 말인가?'
'불가능을 극복하자' 는 그런 안일하고 타성적인 생각에 대한 항변이며 아이들에게는 자기 비하로부터 빨리 벗어나 강한 집념을 가지게 하려는 복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나 자신을 채찍 하는데 더 비중을 두었는지 모른다. 그 때, 나는 갓 결혼한 신혼 시절이었다. 드세게 일던 열의도 이내 식어 현실에 순치될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급에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은 50명 정도가 되었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학습량과 성적이 비례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 학습량을 늘이는 방법으로 야간 자율 학습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역 여건상 그것이 어려웠다. 대부분 학생들이 오솔길을 따라 원거리 통학을 했다. 남학생들도 무리지만 더구나 여학생의 경우는 밤길을 혼자 다닐 수도 없었다. 또, 한 동네에 다른 남학생이 있다해도 남녀 학생이 같이 다니게 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학교 근처에 숙소를 정하도록 권유했다.
숙소를 학교 근처로 옮기는 것은 자율 학습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지만,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절실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는 내심 이를 격리작전(?)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로부터 떼어놓는 것이었다. 얼른 생각하면 부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험생을 부모곁에서 떼어놓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못할 일이지만 시골의 여건상 지속적인 학업을 위해선 꼭 필요한 조치였다.
대부분의 농촌 가정이 그러하지만, 대가족으로 생활하다 보니 공부방이 따로 있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농촌의 일들이 좀 많은가?. 입시를 절실하게 체험하지 못한 부모들은 주경야독(晝耕夜讀) 시절을 생각하며 수험생이란 생각은 뒷전이고 우선 일손이 부족하니 일부터 거들게 했다. 죽은 시체라도 일어난다는 농번기에 수험생이라고 책만 보고있는 것은 심한 사치였다.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강행군이었다. 나름대로는 의욕에 찬 시도였다. 그러나 많은 모험도 내포하고 있었다. 영어, 수학 선생님도 자율 학습 시간에 나와서 틈틈이 수업도 하고 질문도 받으셨다. 영어, 조 선생님, 수학, 박 선생님 정말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 분들 역시 교단 초년 시절이라 아이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 열심이었다. 돈 따위는 아예 생각하지 않는 무료 봉사, 아이들이 열심히 따라주는 것만으로 신바람이 났던 분들이었다.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대부분 첫 교단으로, 아주 젊었다. 청년 교사들의 열강은 고 3 교실을 후끈하게 달구었다. 시행 착오도 있었지만 열의만은 대단했다. 아이들도 열심히 따랐다. 처량하리 만큼 종이들을 죽여내며 눈동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나 학습량과 성적이 비례할 것이란 가설은 좀처럼 제 위치를 찾지 못했다.
그 당시 술도 많이 마셨다. 술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겹겹이 쌓인 밤안개 속에 좌표를 가늠하지 못할 때도 많았기 때문이다. 주로 영어, 수학 선생님과 많이 마셨다. 밤늦게까지 세 사람이 많이 남았고, 또 주량도 비슷했다. 거의 막걸리를 마셨지만 때로는 정종 됫병을 하나씩 차고 앉을 때도 있었다. 책임 분량이었다. 학교 일을 잊는다고 시작했지만 어찌어찌 화제는 줄곧 아이들 쪽으로 돌려지고, 끝내는 스트레스를 더 받는 꼴이 될 때도 있었다. 횡설수설, 안개를 벗어나지 못해 언어와 몸짓이 물구나무 서기를 했다. 술기운이 거나해지면 조 선생이 어깨를 툭 쳤다.
"박 선생, 밤 안개가 아무리 짙어도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데는 지장이 없소"
"하하하"
술기운 속에 용기가 불쑥 일어났다. 낙하산을 접듯이 안개의 꼬리가 술잔 속에 자취를 감추면 다시 갑옷 입은 무사가 되었다. 젊은 무사들의 예리한 칼날은 아이들의 성적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잘게 잘게 썰어 나갔다. 술잔은 계속 오르내리고. '술꾼'이 '일꾼'이란 객기(客氣)와 궤변을 늘어 놓았다.
일요일도 수업을 했다. 국.수.영. 중 두 과목씩 조를 짜서 오전 4시간, 오후 4시간씩 분담을 했다. 그런데 어떤 날은 한 사람이 8 시간을 전부 맡을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국어, 영어가 한 조로 되어 있다가 영어 선생님이 갑자기 일이 생기면 국어로 8시간 수업을 하는 것이다. 나의 교직 생활 중, 한 반에서 내리 여덟 시간 수업을 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인 것 같다.
한편, 성적도 성적이려니와 생활지도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이성에 호기심이 많은 철부지 남녀가 섞여 있고, 더구나 많은 학생들이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지 않는가?. 잔기침에도 촉각을 곤두 세웠다. 몇 번이나 다짐하여 귀가를 시켰고 영 마음이 놓이지 않을 때는 유치원 아이들처럼 대문에 밀어 넣고 난 뒤에야, 별을 빨아들이듯 심호흡을 했다.
한 번은 교실에서, 남녀 학생들을 데리고 밤을 꼬박 밝힌 적도 있었다. 저녁 11시 자율 학습이 끝날 즈음 소나기가 퍼부었다. 조금 있으면 그치겠지 하고 기다렸으나, 오히려 천둥 번개와 함께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아침에 날씨가 맑았기에 우산을 준비한 학생은 없었다.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남학생과 여학생의 좌석 한복판에 내가 앉았다. 눈을 좀 붙이라고 했다. 처음엔 뒤척거리던 아이들이지만 심신이 지쳐 있는 상태이니 이내 모두, 소록소록 잠이 들어버렸다. 그렇다고 나마저 잠을 청할 수가 없으니 영락없는 불침번이 되었다.
긴장의 연속, 나의 심신이 피로한 것은 젊음으로 견뎠는데 정말 내가 홍역을 치르게 된 것은 중도 포기자들 때문이었다. 눈에 드러나게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에,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제자리에서 벅찬 숨을 헐떡이는 아이들이 있었다. 능력에 한계를 실감한 아이들은 고개를 떨군 채 가슴을 펼 줄을 몰랐다. 어찌 그 심정들이야 모르겠는가마는 의도적으로 동정의 눈길을 피했다. 급훈을 가리켰다. '불가능을 극복하자', 목덜미에 심줄이 드러나도록 힘차게 외쳤다.
"여러분들의 괴로운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어느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만큼, 만족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약간의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실망하지 말자. 우리는 이 시기를 꼭 입시의 차원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인생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생각하자. 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나면 앞으로 다가오는 어떤 인생의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결전의 입시, 대학 예비고사가 끝났다. 발표 날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아무리 노력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저, 달음박질 좋아하는 아이가 짚새기를 신고 달려온 꼴이니 결과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정말 기대 이상의 결과였다. 50명 중 서른 명이 넘는 숫자가 합격했다. 거기에다 경북 도내 '예비고사 우수 학교' 중에 하나가 되었단다. 숫자야 얼마 되지 않지만 비율로 따지면 그렇게 된 것이었다. 나는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품안에 덥석 안기며 감격의 어깨를 들썩이는 아이들-. 나도 모르게 콧잔등이 시큰해지며 더운 눈물이 주루룩 쏟아졌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그래, 드디어 해냈구나. 정말 고맙다."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잔치를 벌였다. 이사장님은 당신의 친필로 쓴 표창장과 함께 상금도 주셨다. 그 날 정말로 햇병아리 촌놈답게 불가능을 극복했다고 기고만장(?)하여, 오리야, 기리야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정말 겁없이 100미터 선수처럼 내달렸던 한 해였다. 그 이후 다른 학교에서 3학년 담임이나 부장을 맡았을 때는 그런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다. 교육이란 단거리가 아니고 마라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별로 자랑거리도 아니다. 다만 교단 초년 시절에 순수하게 불태웠던 한 추억만은 될 것 같다.
지금도 감이 익을 무렵이면 유난히도 교정에 감나무가 많던 그 학교가 떠오르곤 한다. 그 때 나는 그 한 해가 지나면 나의 감도 익으려니 생각했지만 정년이 다 된 이 시점까지 아직 풋감 냄새가 가시지 않고 있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속이 꽉차 붉게 익는 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