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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군자정(君子亭)과 유호연지(柳湖蓮池)

                   군자와 숙녀의 만남

 

                              - 군자정(君子亭)과 유호연지(柳湖蓮池)

 

    

                                                      행전 박영환  

 

        

 

 

 

 

 

 

 

 

  2010년 7월 18일 오후,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 소재 군자정(君子亭)을 찾았다. 오랜 장마끝에 쏟아지는 햇살인지라 더 따갑게 느껴졌다.

 

  

이 정자를 만든 분은 이육(李育) 선생인데 자는 원숙(元叔), 호는 모헌(慕軒)이며 본관은 고성 이씨이다. 형님은 쌍매당 이윤(李胤), 망헌 이주(李胄)이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안기도 찰방 벼슬을 지내기도 했지만 두 분의  형이  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유등리- 버드나무 골이란 뜻으로 ‘버드실’이라고도 한다. -에 은거하였다.

 

  ‘군자정’이란 정자의 이름은 주돈이(周敦頤)가 *“나는 유독, 연꽃이 진흙에서 나왔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잔잔한 물에 씻으나 요염하지 않으며, 줄기의 속은 비고 겉은 곧으며, 넝쿨도 뻗지 않고 가지도 치지 않으며, 향기는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지며, 꼿꼿이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서 만만하게 다룰 수 없음을 사랑하노라.”라고 하며 ‘꽃 중에 군자(君子)’라고 한 애련설(愛蓮設)에 기원한 것이다.

 

 

 

 

  모헌공 역시 연을 무척 사랑하여 원래 있던 못을 더 크게 파고 넓혀서  연꽃을 가득 심고 그 연지(蓮池) 속에 군자정을 세워 학문에 힘쓰고 많은 현사(賢士)들과 교유하며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이 정자는 일명  모헌정사(慕軒精舍)라고도 한다. 그리고 정자의 문 역시 주자(朱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구(詩句)를 상기하여 일감문(一鑑門)이라하였다.

 

  그리고 모헌공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고성 이씨 가문이 번창하여 그 자손들이 이곳 유등리뿐만 아니라 청도 지역 여러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선생을 기리는 추원재, 원산재, 유호재 등의 묘재를 군자정 가까운 곳에 지어 그 덕을 기리고 있다.

 

   군자정은 조선 중종 때인 1531년에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현재 건물은 1915년에 중건한 4칸 기와집인데 지금도 청도군에서는 1919년부터 음력 8월 18일에 경전(經典)을 강송(講誦)하고 시를 지어 읊던 전통의 '강학계(講學契)' 행사와 '반보기' 세시 풍속 등을 계승 발전시킬 명소로 조성하기 위해 연지 주변을 개발 정리하고 정자를 보수하는 등 보강공사를 계속하고 있다.

 

  유호연지(柳湖蓮池)’는 연지로서는 전국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무려 둘레가 700미터, 깊이 2-3미터, 넓이 21,000평에 이른다. 한 못 가득 심어져 있는 연꽃은 여름부터 피기 시작하며 가을에는 튼실한 연밥을 맺어 장관을 이룬다. 그래서 이 유호연지를 생각할 때 수려한 자태의 연꽃만 떠올리지만 사실은 못 아래 조성된 농경지 수백정보의 젖줄도 되고 있다.

 

  이 못은 이서국이나 신라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는 논에 물을 대는 저수지 역할을 했을 것인데  그 뒤 군자정이 들어서면서 못을 더 확장하고 연을 심으면서 점차 연지로 이름을 떨친 것 같다.  아무튼 유호연지는 시인묵객(詩人墨客)이 찾아와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청도팔경의 하나이다. 

 

  예로부터 유등 마을은  호복산(虎伏山)과 비학산(飛鶴山) 그리고  수려한 남산의 힘찬 맥이 닿아 있어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다. 또 주변 산에 옛 이서국(伊西國)의 성곽이 축조되었다고 하니 그 당시에도 주요한 거점이었던 것 같다.

 

  유호연지의 전신인 유등못에는 이서국과 관련된 애절한 이야기도 있다. 신라가 침공하여 나라가 패망하게 되었을 때 이서국 공주가 망국의 한을 안고 이곳에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청도출신 작가 정한길은 동화 ‘이서공주의 한’에 그 내용을 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다음은 동화의 마지막 대목이다.      

  “공주는 뒤를 쫓는 적군을 피해 유등연못으로 달린다. 적의 병사가 손을 뻗쳐 옷자락을 잡으려 하자, 하늘 우러러 두 손을 모으고 연못에 뛰어 든다. 향기로운 열다섯의 나이에 한 송이 연꽃으로 화한 것이었다.”

   이는 다만 정사(正史)가 아니고 당시의 정황을 유추하여 각색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픽션이긴 해도 이서국 도읍지였던 백곡 마을이 등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 마을이기에 그런 이야기가 생성될만한 조건은 충분히 구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곳은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아주 무더운 날씨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태공들이 고기를 낚고 있었다. 연꽃처럼 미끈한 고기들이 낚싯대를 흔드는 그 짜릿한 손맛 때문에 찌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또 이곳에 ‘반보기’란 풍속이 유명하다. 반보기란 말 그대로 반만 본다고 생긴 말이다. 이는 시집간 딸이 잠시 시간을 내어 유호연지에서 친정어머니를 상봉하는 과정에서 유래된 말이다.

 

  요즈음은 여자들이 시집보다 오히려 친정에 자주 가게 되지만 옛날에는 친정 가는 것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일단 시집을 가게 되면 '출가한 외인'이라 하여 시가에만 전념할 뿐 친정쪽에 괜히 마음을 두면 큰 흉이었다. 이런  때이니 아무리 친정 부모나 형제자매가 보고 싶어도 쉽게 친정 나들이를 할 수 없었다. 

 

   이런 환경 속에 여인들이 착안한 장소가 유호연지이다. 팔월 한가위가 되면 고성이씨 집안의 며느리들은 다음다음날 열리는 강학계의 준비를 겸하여 찾아왔고 다른 성씨의 사람들도 연꽃을 보기 위해 많이 몰려왔다. 이 기회를  타서 잠깐 친정 어머니를 만나 회포를 풀었던 것이다.  이처럼 중간에서 만난다고 '중로상봉(中路相逢)'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옛날 여인들의 애환인 반면 재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만남은 반만 보는 반보기에 끝났다. 정식으로 친정에 가는 것이 아니고 반 정도 가서 만나게 되니 반보기이며 다른 가족은 만나지 못하고 어머니만 만나니 반보기가 되며 끝내 눈물이 앞을 가려 어머니가 반밖에 보이지 않으니 반보기였던 것이다.

 

 

 

 

 

 

“잠깐 바람을 쐬러 가는 양 왔습니다”

 

“이렇게라도 만나니 다행이구나”

 

오랜만에 어머니 품에 안겨

 

반가워서 울고 서러워서 운다.

 

어머니는 딸의 눈물을 닦아주고

 

딸은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주고

 

우는 사이 훌쩍 시간이 지나버렸구나

 

외손자 외손녀도 보고 싶은데

 

친정아버님과 형제자매도 만나고 싶은데

 

아! 또 반만 보고 헤어져야 하나.

 

“어렵더라도 참고 견뎌야 뒤끝이 있는 거란다.”

 

“걱정 마셔요. 잘 살겠습니다.”

 

눈물 때문에 반만 보이던 어머니와 딸

 

완전히 보이지 않네.

 

그저 잘 가라고 허공을 긁어내리며 손만 젓고 있네.

 

 

 

   잠시 떠오르던 생각을 멈추고 정자에서 내려다보니 물속에 숨어 있던 연꽃 봉오리들이 등불처럼 기지개를 켜고 고개를 내민다.   

 

 

  어쩌면 이곳은 군자와 숙녀가 조화를 이룬 곳이다. 정자 이름 ‘君子’를 ‘꽃 중의 군자’에서 가져왔지만 이것을 바꾸어 ‘꽃 중의 숙녀’라 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향기는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지며, 가까이서 만만하게 다룰 수 없는 꽃’, 그게 바로 숙녀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니 정자가 군자라면 유호연지는 숙녀이다. 정자가 그림이라면 유호연지는 바탕색이다. 그것을 거꾸로 유호연지를 그림으로 정자를  바탕색으로 볼 수도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고  군자정과 유호연지가 그림이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바탕색이 될 수 있다. 또 위치를 바꾸면 사람이 주체가되고  정자와 연지는 객체가 된다. 이는 주객일체 합일의 만남을 지향한 이곳 특유의 조화이다.

 

   모헌공도 애초에 이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며 그리고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도 이런 감동적인 조화에 매료되는 것이다.

 

  이곳의 조화로운 만남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이를 알고 그 조화로운 마음을 가졌을 때 사람과 자연이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자연과 자연이 만나는 이곳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알게 될 것이다.  

 

 

 

 

 

 

 

 

* 予獨愛蓮之出於(여독애련지출어) 泥而不染(니이불염), 濯淸漣而不妖(탁청련이불요), 中通外直(중통외직), 不蔓不枝(불만불지), 香遠益淸(향원익청), 亭亭淸植(정정청식) 可遠觀(가원관), 而不可褻玩焉(이불가설완언).

 

 

 

 

* 고성이씨 - 원래 본관은 철성(鐵城) 이씨였으나 지금은 통상 고성(固城) 이씨로 부르고 있다.

 

 

 

 

 군자정 유래를 새긴 글

 

 군자정의 측면

 

 유호연지의 반보기 - 옛날 시집간 여인들이 친정 나들이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약식으로 추석명절을 전후하여 딸과 친정어머니가 잠깐 이곳 군자정이 있는 유호연지에서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중간에서 만나는 것이니 중로상봉(中路相逢)이었다. 이를 반보기라고 했는데, 친정을 반만 간다고 반보기, 다른 가족은 만나지 못하고 어머니만 만나니 반보기, 눈물이 앞을 가려 어머니가  반만 보인다고 반보기라 했다.  

 

 연꽃이 곱게 지태를 드러내고 있다.

 

 군자정의 현판 - 지금도 새로 보강공사를 하고 있다.

 

 모헌정사 현판

 

 군자정 입구의 정면

 

 수줍은 망울들

 

 더위를 식혀주는 연꽃들

 

 못가의 강태공

 

 유등리는 이육 선생이 정착한 이후 그 자손들이 대대로 뿌리를 내려  살고 있다.

 

 유등리 마을 입구의 애향비

 

 군자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추원재, 원산재, 유호재가 있다. 이곳은 모헌 이육 선생의 묘재이다.

이육  - 자는 元叔, 호는 모헌이며 본관은 철성(고성)이고 현감 이평의 아들이다. 쌍매당 이윤, 망헌 이주의 아우로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안기도 찰방을 지냈으며 형제들이 무오사화에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화양읍 유등리에 은거하며 군자정을 세워 학문에 힘쓰며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유등리

 

 유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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