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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67)유림들이 경응계(景凝契)를 창계하여 향사를 올리던 박유(朴瑜)선생의 응천서당(凝川書堂)

응천서당
청도신문(2026년 6월 10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67)

유림들이 경응계(景凝契)를 창계하여 향사를 올리던 박유(朴瑜)선생의 응천서당(凝川書堂)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인협회장,  교장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에 자리 잡고 있는 응천서당(凝川書堂)을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응천자 박유(凝川子 朴瑜, 1549 ) 선생이다. 공은 낙천 배신(洛川 裵紳)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였으며 조선 선조 3년 성균관 식년시에서 합격하여 성균 생원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당시 사화(士禍)가 거듭하던 때이라 벼슬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대암 박성(大庵 朴惺),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하며 제자들을 길렀는데 충현공 송시영(忠顯公 宋時榮)과 같은 저명한 유현이 많이 배출되었다. 공의 8대조는 밀성부원군에 봉군된 행산 세균(杏山 世均)이며 증조부 사미 형달(四美 亨達)은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인이었다.

  공의 묘소는 원래 현풍 구지 모정산(茅亭山)에 있었지만 그곳이 공업단지로 변경됨에 따라 부득이 공의 12세손 성희(盛熙)가 조카 재문(載文) 및 여러 종원들과 함께 이곳 남산리 뒷산 도덕봉(道德峰)에 이장한 뒤 공의 재숙소(齋宿所) 첨모재(瞻慕齋)’를 건립하였다. 5칸 전퇴의 웅장한 본당 및 진수문(進修門)’ 편액이 걸린 솟을대문 3칸과 부속 건물이 있다. 1992년에 착공하여 93 10월에 준공했을 때 유림 천여 명을 초청하여 성대한 낙성식을 했다. 이때 낙성운(落成韻) 100여수나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원근 유림 700여 명이 참여하는 경응계(景凝契)를 창계하여 매년 춘추 향사와 계회를 열었다. 그 뒤 1997년 유림들이 결의하여 첨모재 대신 공의 학행을 기리는 뜻에서 응천서당으로 고쳐 불렀다.

  1993 12세손 성희(참봉, 창생의원 원장, 청도중·고 재단이사장 역임)가 쓴 첨모재기에는 부군(府君)이 늘 이 집에 계셔서 우리 자손들을 길이 비호하실 것이고 우리 자손들은 조선(祖先)의 음덕을 오래도록 추모하여야 할 것이다 했다. 그리고 2000년에 영양 이유민(永陽 李裕民)이 짓고 아산 장봉채(牙山 蔣奉埰)가 쓴 응천서당기에는 정성이 안으로 있고 예법이 밖으로 드러나면 신명께서도 흠향하실 것이고 종족 간의 우애가 두터워질 것이다.” 했다.

  마당에는 1995년에 전교 재령(載寧) 이병하(李秉河)가 짓고 숭덕전(崇德殿) 참봉 박희영(朴喜永)이 쓴 첨모재 낙성기념비 1997년에 세운응천서당 기념비가 있으며 대문 앞 좌측에 유인 창녕 조씨 정려비(孺人昌寧曺氏旌閭碑)’가 있다. 창녕 조씨는 공의 증손인 훈()의 부인이다. 부인은 결혼하기 전인 어릴 때 이미 어머니가 병마에 시달릴 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려 병을 낫게 했고 부모님이 병환 중에 계실 때 두 번이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수혈해 드리는 등 지극한 효성을 했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정려문을 받기로 논의되던 중 박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시댁에서도 시어머니를 모심에 있어 정성과 효도를 다했는데 안타깝게도 자식이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효행을 나라에서 알고 부인이 살던 묘동(妙洞)에 정려비를 세웠으며 그 뒤 건물이 노후되어 선영이 있는 모정(茅亭)으로 옮겼다가 또 주변 지역이 개발되면서 남편 집안의 선산이 있는 지금의 첨모재(응천서당) 경내로 옮기게 되었다. 이 내용은 방계 후손 찬영(纘永)이 지은 정려이건소서(旌閭移建小序)'에 기록되었다.

  이날 공의 후예인 재천(載泉, 문중 회장), 창희(昌熙, 문중 고문), 재후[載侯,  아라 해양 대표] 씨가 문중의 자료를 기반으로 설명해주었다.

 

첨모재 기념비
첨모재기
응천서당 기념비
응천서당기
창녕조씨 정려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