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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66)수많은 저서를 남겨 명망이 높았던 박윤(朴潤) 선생의 오수정(吾守亭)

오수정
청도신문(2026년 5월 28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66)

수많은 저서를 남겨 명망이 높았던 박윤(朴潤) 선생의 오수정(吾守亭)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인협회장,  교장

 

  청도군 이서면 칠곡리에 자리 잡고 있는 오수정 (吾守亭)을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오수당 박윤(吾守堂 朴潤, 17111780) 선생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뛰어나 젊어서 이미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백불암 최흥원(百弗庵 崔興遠), 인촌 우재악(仁村 禹載岳) 등과 교유하였으며 태극논기질성설(太極論氣質性說)’,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성명설(性命設)‘, ’성경설(誠敬說)‘, ’도통설(道統說)‘, ’자경칠즉(自警七則), ‘훈자사칙(訓子四則) 등 여러 저서를 남겨 유림에서 명망이 높았다.

  공의 7대조는 농암 난(聾巖 鸞)이며 5대조는 호조좌랑(戶曹佐郎)을 지냈던 상()이며 고조는 수헌 희장(守軒 希章)이다.

  팔작지붕 정면 5칸인 오수정은 후손들이 공께서 수양하던 옛터에 정자를 세우고, 공이 평소 명명한 '吾守'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이곳에서 조상을 추모하고 문중이 모이며, 손님을 맞이하고 자손을 교육하였다. 고을 선비들이 돈을 모아 매년 한 번씩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가 되었는데 이를 통해 공의 학덕이 멀리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에 중건을 했지만 1950년대에 이건을 한 것은 옛 터가 좁고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김해(金海) 김용희(金容禧) 1920년에 쓴 오수정 중수기에서 오수정은 박공이 은거하여 이름을 지은 것인데 당시 사람들은 당나라 문장가 유종원(柳宗元)이 이름을 붙인 우계(愚溪)에 비유하였다. 공은 선대 농암공의 시례(詩禮) 가르침을 이어받아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자신의 분수를 지켰다. 공은 나의 증조모 할아버지가 되신다. 세월이 오래되어 이 재실이 장차 무너지려 하여 5세손 용한(龍漢)을 비롯한 내외 족척(族戚)들이 힙을 합쳐 중수하게 되었으며 나도 이 일에 참여하였기에 기문을 부탁받았다. 이를 계기로 더욱 가다듬어 조상의 덕을 잊지 않는다면 문호(門戶)의 광대함이 끝이 없을 것이다.” 했다.

  광주 노상직( 光州 盧相稷) 1927년에 쓴 오수정 중수기 공께서 저술하신 글에는 천도(天道)와 인간의 성품, ()에 관한 설득력 있는 말씀이 많으니 이것이 바로 공께서 자신을 지키셨던 큰 가르침이다. 고을의 여러 군자들이 공을 위해 계()를 맺고 해마다 한 번씩 이 정자에 모이니, 그들은 공이 남기신 법도를 지키기로 약속한 것이다.”

  하산(夏山) 성순영(成純永) 1959년에 쓴 오수정이건기에서  요즈음 조상을 공경하는 인생 본연의 도덕에 미치지 못하는 일이 많은데 이번 박씨 문중의 정자 이건은 오수공의 정신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이니 큰 귀감이 된다. 그리고 김용희 참봉의 아들인 김경곤이 이번에 큰 힘을 보탰다. 그는 오수공의 외손이다.” 했다.

  오수당의 증손인 세주(世冑)는 여러 저서가 있고 현손인 규동(奎東)은 도천 주사(道薦主事)이며 5세손 용수(龍琇)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6세손인 길수(吉秀)는 청도향교 전교를 지냈고 성균관장의 문묘수호 공적표창을 받았으며 춘수(春秀) 8세손 준규(駿圭)도 청도향교 전교를 역임했고 10세손 종하(宗河)는 변호사이다.

이날 후손인 춘규(春圭, 청도향교 이사), 성배(聖培, 오수정 대표), 근배(根培, 이서면 새마을문고 회장), 충배[忠培,  청도군청 행정복지국장(서기관)]께서 문중의 자료 등을 기반으로 설명해주었다.

오수정 중수기(김용희)
오수정 중수기(노상직)
오수정 이건기(성순영)
칠곡리(사진: 이정식 시니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