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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62)진무원종(振武原從) 일등공신이었던 기포 박우(杞圃 朴瑀) 선생의 경포재(景圃齋)

경포재(2016년)
청도신문(2026년 3월 25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62)

진무원종(振武原從) 일등공신이었던 기포 박우(杞圃 朴瑀) 선생의 경포재(景圃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인협회장,  교장

 

  청도군 이서면 수야1(중촌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경포재(景圃齋) 찾았다. 이곳의 배향인물은 기포 박우(杞圃 朴瑀 1576~1637) 선생이다. 공의 7대조는 조선 태조(李太祖)가 좌의정의 벼슬을 하사하며 다섯 차례나 불러도 나가지 않았던 여말 중신 송은 익(松隱 翊)이며 6대조는 함안군수(咸安郡守)를 지낸 우당 융(憂堂 融)이고 증조는 소요당 하담(逍遙堂 河淡)이며 아버지는 참의공(參議公) 경연(慶延)이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밀성 박씨 소고공파 14의사는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섰다. 의사들은 부자(父子), 형제, 숙질(叔姪), 종형제 사이로 청도읍성 탈환을 비롯하여 청도 곳곳에 침투한 적들을 소탕했고 때로는 인근 고을까지 원정하기도 했다. 의사들은 문중이 전멸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구국의 일념으로 몸을 던졌다. 전쟁 때마다 의병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한 일가가 집단으로 의병 창의에 참여한 것은 시대를 통틀어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이 열네 명의 빛나는 행적은 14의사 묘정비에 새겨져 있는데 기포공도 형님인 찬(), 동생 숙()과 같이 공을 세웠다.

그 뒤 공은 1603년 별시과(別試科)에 합격하였으며 1624(인조 2)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振武原從) 일등공신에 녹훈되고 남포현감을 지냈으며 얼마 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꽃과 대나무를 벗 삼고 거문고와 바둑을 즐기며 여생을 마치려 하였다. 그러나 1636(인조 14) 뜻하지 않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공청 병마절도사 이의배(李義培)와 함께 출전하여 경기도 광주 쌍령 전투에서 앞장서 용맹하게 적을 무찌르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으며 전쟁 뒤 호조참의贈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1963년에 창건한 경포재는 정면 5칸이며 3칸 규모의 솟을 대문이 있고 3칸 관리사가 있다.

  1971년 문학박사(文學博士) 이가원(李家源)이 후손 해탁(海鐸)과 찬묵(燦默)의 청에 의해 경포재기를 찬하면서 나는 일찍이 14의사를 기리는 비문을 읽고 감탄했다. 어찌 한 집안에서 이토록 많은 의롭고 장렬한 장부가 나올 수 있었단 말인가? 이 재실의 이름인 景圃 景杞圃를 말함이다.- ‘ 우러러보다’ ‘숭배하다의 뜻이 있으니 기포공을 사모하여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고증에 밝은 금대 이가환(錦帶, 李家煥, 조선 후기의 학자)이 말하기를 임진왜란 때 의병이 많았으나 박씨가 가장 많이 앞장섰고 그 거점 또한 가장 요충지였다고 하였다. 일일재 김시찬(一一齋, 金是瓚, 안동출신의 유학자) 14의사 묘정비문에 박씨는 고경명 삼부자(高敬命, 창의하여 금산에서 장남, 차남이 순절)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말들은 모두 문헌에 근거한 말이니 공경할 만하고 믿을 만하다. 나는 감히 앞선 두 분의 말을 인용하여 이 고을 사람들 가운데 이 재실을 찾는 자로 하여금 읽고 나서 반드시 공경심을 일으키게 하고자 한다.“ 했다.

  기포공의 13세손 종상(宗相)은 외무부 주 루마니아 대사를 지냈고 14세손 성호(性鎬)는 삼성전자 부사장이며 성우(性宇)는 삼성증권 부사장이다. 또 성일(性馹)은 경북 교육청 행정국장(3)이다.

  이날 후손인 창상(昌相, 전 우당종친회장)씨가 문중의 자료를 내어놓고 안내를 해주었다.

 

경포재기
경포재 전경(2016년)
드론사진(이정식 시니어 기자 202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