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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65)임란에 창의하여 공을 세운 구은 이정한(龜隱 李廷翰) 선생의 모운재(慕雲齋)

모운재
청도신문(2026년 4월 13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65)

임란에 창의하여 공을 세운 구은 이정한(龜隱 李廷翰) 선생의 모운재(慕雲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인협회장,  교장

 

  청도군 화양읍 소라리에 자리 잡고 청도의 진산인 남산과 청도천을 바라보고 있는 모운재(慕雲齋)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구은 이정한(龜隱 李廷翰 15671628)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동생을 비롯한 동지 12인과 함께 민병을 모아 창의하여 운문산 일대에서 적을 물리쳤으며 전쟁이 끝난 뒤 나라에서 그 전공을 높이 사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이곳 소라리(所羅里)에 시거(始居)한 뒤 세속을 벗어나 자연과 벗하며 살다가 생을 마쳤다. 돌아가신 뒤에는 청도읍 운산리에 장례를 지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다.

  경주 이씨의 시조는 표암공(瓢巖公) 알평(謁平)이다. 중시조는 거명(居明)이며 국당(菊堂) ()이 공의 13대조이고 시호가 문정(文靖)인 제정 달충(霽亭 達衷) 12대조이다. 6대조는 국당공파 청도 입향조인 만송 휘(晩松 翬)이며 그는 문과에 올라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양주(楊州)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청도를 빛낸 사람들 175명 중 한 분이었다.

5대조는 만송의 장자인 문강공 사균(文剛公 思均)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 이르렀고 증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이다. 고조 ()은 무과에 급제한 뒤 평안도 관찰사(觀察使), 개성 유수(留守) 등을 거쳤으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아 향민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慕雲齋  운산리를 지칭하는 것이며 1959년에 창건했다. 그 뒤 운산 지역에 도로가 새로 개설되면서 공의 묘소를 부득이하게 이장하게 되었다. 이때 문중에서 협소한 옛 재실을 정리하고 그 옛 터 앞에 4() 5() 웅장한 팔작 건물을 중건(2009 9월 착공, 2013 10월 준공)하였다. 정면에 귀후문(歸厚門) 현판이 걸려 있는 솟을대문이 있고 별도의 공간에 관리사가 있다.

  문소(聞韶) 김황(金榥) 1959년에 쓴 기문에 이곳에 종원들이 모여 강론하고 손님을 맞이하여 접빈하면서 선조께서 남긴 업적을 일컫는다면 느끼는 점이 견고해서 어디에 간들 사모함이 계속될 것이다. 11세손 재준(在俊)이 이 일을 주관하였고, 아들 진호(震鎬)와 족인 규호(奎鎬)를 멀리 보내어 기문을 청하였다.”했다.

  고성(固城) 이승목(李承穆) 2012년에 쓴 모운재 중건기 이번 이 집안의 재실 중건은 근본을 잃어버리지 않는 모범이 될만한 일이다. 경주 이씨는 나라의 두드러진 성씨요 도주의 명망있는 가문이다. 오직 바라노니 선조의 충효지심을 거울로 삼아 후손들은 오래 힘쓸 것이니라. 이 일에 가사를 미뤄두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이는 해근(海根)과 준호(晙鎬)이며 12세손 정길(正吉, 玟鎬)이 기문을 청했다.” 했다.

  11세손 재준(在俊) 축하운에서  멀리 보이는 산과 가까운 물은 활처럼 휘어 책상 밑에 흐른다. 조상을 숭모하고 지키면서 후손들은 대처럼 푸른 빛 이어가리라 했으며 12세손 규호(奎鎬) 오랜 세월 염원하던 재사의 낙성을 보게 되니 기쁜 마음 금할 수 없도다. 조상을 추모하니 구천(九天)에 응당 빛나리라 했다.

  이날 후손인 정길(전 경주이씨 참봉파 문임) 준호(모운재 문중 대표, 경상북도 8대 광역의원, 백경 엔지니어링, 백경건설 대표), 해두(모운재 문중 수석 부회장) 씨가 문중 족보 등 여러 자료를 기반으로 설명해주었다.

 

모운재 옛 건물
모운재기
모운재 중건기
소라리
소라리 지명 유래
솟을 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