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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 재실의 설립과 활동(2)

라. 재실

 

 군자정 강학계 100주년을 맞이한 추원재(追遠齋)

 

추원재

 

 1. 소재지 및 관리 문중:  화양읍 유등리, 고성 이씨 모헌 종중

 

 2. 배향 인물

모헌(慕軒)  이육(李育)

  5대조 행촌(杏村) 암(嵒) 이래 대대로 문장가(文章家)가 배출된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양친(兩親) 상(喪)을 당했을 때 각 3년 동안 여막(廬幕)에서 시묘하였으며 순 임금의 효도를 본받아 자호(自號)를‘慕軒’이라 하였다.

  공은 성종 24년(1493) 안기도 찰방(察訪)에 제수되었으나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가 일어나 맏형인 쌍매당(雙梅堂) 윤(胤)과 중형인 망헌(忘軒) 주(冑) 두 형이 거제도와 진도로 각각 유배되었고 다시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는 망헌이 참형을 당하였고 형의 외아들마저도 처형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 갑자사화 때 선친 승지공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동생 수찬공(修撰公) 려(膂)도 진도로 유배되고 숙부인 굉(浤)과 명(洺)도 영해와 영덕으로 각각 유배되었으니 한 가문의 수난이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망헌공 향사

공은 이 난세를 개탄하면서 세상을 피하여 은거(隱居)하고자 안동에서 남하하여 청도 유곡(柳谷) 죽림촌(竹林村)에 정착하였으며 마을 앞에 연못을 만들고 정자를 지어 ‘君子亭’이라 하였다.

  그후 중종(中宗) 반정으로 난정이 종식되고 공은 중종 2년(1507)에 사마시(司馬試) 진사과에 합격했으나 가문이 엄청나게 겪은 화(禍)를 생각하며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후진 교도(後進敎導)에만 진력하였다.

 묘소는 유호 연지를 바라보는 곳 원산 기슭에 있는데 자손이 번창할 태백산 지맥의 신령스런 땅, 영남명기(嶺南名基)로 세칭되고 있다.

 

3. 강학계 `100주년 행사

  2019년 9월 16일(월), 고성 이씨 강학계가 열렸다.  이 강학계는 고성 이씨 청도 입향조인 모헌공(慕軒公) 이육(李育) 선생을 따르는 유림들이 1919년에 창계하여 이날 100 주년을 맞이했으며 700 여 유림들이 참석한 가운데 향사 및 백일장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장원 작품 발표

 

4. 건물

  추원재는 1818년에 건축되었으며 정면 5칸이다. 그 뒤 장소가 좁아 5칸의 유호재와 7칸의 원산재를 더 짓고 5칸의 전사청을 마련하였다.

동앙 한문학 120차 하계 학술 발표대회(2015년 8월 15일)

 

 학문과 효행의 귀감인 병재 박하징(甁齋 朴河澄) 선생의 명동서사(明洞書社)

명동서사

 

1.소재지 및 관리 문중: 이서면 수야4리(귀일), 밀성 박씨 병재 문중

 

2. 배향인물은

병재(甁齋) 박하징(朴河澄, 1483-1566)

  충숙공(忠肅公) 송은(松隱) 익(翊)의 현손이고 입청도 선조인 소고(嘯皐) 건(乾)의 손자이다.

8세 때 ‘소학’을 해석했고 11세 때 시 짓기에 능숙하였고 그 뒤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 주자가례를 섭렵하였다.

  공은 학문이 이처럼 깊었으나 주변에 인척들이 사화(士禍)에 연루되던 때라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어사 이시백(李時白)이 그 인품을 높이 사 적극 추천 하게 되어 1515년(중종 10), 통훈대부사간원(通訓大夫司諫院) 정언(正言) 직에 제수되어 입궐하게 되었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었던 공은 임금님을 입대(入對)한 후 바로 사직서를 올리고 향리로 돌아와 오로지 성리학을 강론하며 저술과 학문 연마, 후진 교육에 힘썼다. 공은 영남 사림은 물론 충주, 기호사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들과 교유했다. 청송 성수침, 탄수 이연경, 삼족당 김대유 등과 도의상교(道義相交)했으며 남명 조식과는 인성에 대한 문답설을, 퇴계 이황과는 사(辭)와 이(理)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를 논의하였다.

  ‘병재(甁齋)’란 호는 남명 조식이 지어준 것인데 이는 ‘입 지키기를 병 틀어 막듯이 한다’는 뜻이다. 공은 효심이 깊었다. 두 살 때 어머니가 병을 앓자 젖을 먹지 않고 피하므로 주위 사람들이 ‘젖먹이 효자’라고 했다. 공은 3형제 중 막내였지만 큰 형인 소요당과 작은 형인 성와공이 금천면 신지(섶마리)로 이사를 했을 때도 홀로 남아 부모님을 봉양했으며 모친에 이어 부친이 돌아가시자 6년간을 여막에서 보내고 줄곧 선산을 지켰다. 삼족당 김대유가 조문을 와서 남긴 시가 있고 주세붕이나 남명 등이 직접 상주가 거처하는 집인 여차(廬次)까지 와서 조문했다. 명동서사가 있는 ‘귀일(歸一)’ 마을은 공의 3형제 중 한 분만 돌아왔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84세 일기로 졸하였는데 살아서는 형조참판(刑曹參判)의 관직이 내려지고 사후에는 학덕을 포상하는 특전으로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증 호조판서 교지

  저서로는 ‘병재선생문집’ 4권 1책이 있다.

명동서사는 1858년(철종 9)에 창건되었으며 1862년(철종 13)에는 명동사의 서원 승격을 위해 안동 유림들이 도산통문(陶山通文)을 돌렸는데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이루지 못했다. 1910년에 이어 1971년에 크게 중수했으며 그 후에도 몇 차례 더 중수했다.

도산통문

1862년 안동의 도산서원 상유사 이조순(李肇淳)외 24명이 청도지역의 향교와 서원에 보낸 통문.  병재 박하징을 제향하는 사우 건립을 결의하고 청도 지역 사림이 공론으로 추진해주길 바라는 뜻에서 작성하여 보낸 것이다.

 

3. 청도문화원 선비 아카데미 강좌 등이 열렸다.

문화원 선비아카데미 강좌(2022년 7월 14일)

 

 

 충절과 학덕이 이어지고 있는 람휘당(覽輝堂)

 

람휘당

1.소재지 및 관리 문중: 이서면 상대전리, 의흥예씨(義興芮氏) 

 

2.배향 인물

 예신충(芮信忠)

  공은 시조 낙전(樂全)의 12세손으로 훈련참군 무이만호(訓練參軍武夷萬戶)를 지냈으며 통훈대부(通訓大夫)이다. 아버지는 이곳 대전리에 새로 터를 잡은 입향조(入鄕祖)이며 어모 장군(禦侮將軍)을 지낸 극양(克讓)이며 장사랑(將仕郞) 회간(檜幹)이 아들이고 손자가 의병장 몽진(夢辰)이다.

3. 후손

 손자  몽진(1561〜1635)은 어릴 때부터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여 기개가 높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7일 만에 청도읍성이 함락하는 등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때 매형(妹兄) 박경신(朴慶新), 고종형(姑從兄) 박경전(朴慶傳)을 따라 분연히 의병 창의에 가담했다. 운문산을 중심으로 왜적과 전투를 벌이다가 마침내 청도읍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임란 선무공신(宣武功臣)이며 증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다.

또한 람휘당에서는 수졸헌(守拙軒) 재문(在文), 만취와(晩翠窩) 대열(大烈), 만성재(晩惺齋) 주명(周鳴) 3대 진사의 학행을 기리기 위한 모임인 ‘경삼계’가 열린다. 2019년 5월 20일에도 많은 유림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경삼계의 ‘景’은 사모하는 의미이고 ‘三’은 세 분 진사를 말하는 것이다.

경삼계에 참여한 유림들

  수졸헌은 1768년(영조 44)에 성균관 생원이 되었고 고을에 큰 업적을 이루었다. 만취와는 1835년(헌종 1)에 병과에 장원 급제했다. 그의 개명(改名)에 관한 일화가 지금도 문중에 전해지고 있다. 그는 67세가 되기까지 과거에 12번이나 응시하였으나 계속 낙방의 고배를 들게 되자 상심하여 한강에 투신하고자 난간을 잡고 있었다. 이때 등 뒤에서 어떤 젊은이가 어깨를 잡으며 “청도의 예 아무개는 과거에 12번이나 떨어지고도 마음을 다잡고 귀향했는데 그대는 어이 그렇게 마음이 약하오?” 하면서 성명에도 운이 따르니 이름을 바꾸어 보라고 했다. 그 권유를 받아들여 본래의 이름이던 ‘國烈’을 ‘大烈’로 바꾸어 석 달 뒤에 다시 과거에 응시했는데 과연 병과에 장원 급제했다. 그 때 만류하며 조언을 했던 그 젊은이는 과거시험에 낙방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미행을 했던 임금일 것으로 추측된다. 일설에는 용한 점술가라고도 한다. 아무튼 그는 67세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으며 이후 75세에 별세하였다.

  만성재는 1849(헌종 1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니 이 세분의 학행은 가문의 영광일뿐더러 나아가 청도 고을의 큰 자랑이요, 긍지라 할 수 있다.

 

4. 연혁

  람휘당은 1955년에 창건했으며 2008년에 크게 중수했다. 재사의 이름 ‘람휘(覽輝)’는 봉황이 천길 위에 나는데[鳳凰翔于千仞봉황상우천인] 덕의 빛남을 보고 내려온다.[覽德輝而下之람덕휘이하지]에서 나온 말이다.

 

 인재(忍齋) 반예(潘汭) 선생이 강학하고 수학하던 계명재(啓明齋)

계명재

 

1.소재지 및 관리 문중:  이서면 구라리, 기성반씨(岐城潘氏)

2.배향 인물

  기성반씨 입청도조(入淸道祖)인 인재(忍齋) 반예(潘汭, 1507〜1586) 

  공은 고려후기 밀직부사, 문하찬성사를 지낸 석암(石庵) 복해(福海) 의 9세손이며 동지중추부사·한성부 좌윤·우윤에 올랐던 옥계(玉溪) 우형(佑亨)의 아들이다. 삼족당 김대유 문하에서 수업하고 충순위 도정에 올랐으나 공명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에 전념하여 학문을 닦았다. 가의대부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3.삼용장

반씨 문중에는 삼용장(三勇將)이 있다. 효홍(孝弘) 의병장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창의하여 1592년 7월 9일, 박경신 청도 조전장과 함께 청도읍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 또 국해(國海) 장군은 임진왜란 중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병조참의를 제수 받고,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중경(仲慶) 장군 역시 임란 중 이 충무공 휘하에서 용전하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4.효자비각 

  계명재 옆에 환(瓛)의 효자비각이 있다. 종모재(終慕齋) 환(1767∼1829)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에 진력했으며 효심이 깊어 정성으로 부모를 섬기고 봉양했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산소가 있는 매전면 두곡리까지 왕복 80 리 길이었지만 3년을 하루같이 성묘를 다녔는데 아무리 춥고 덥고 비바람이 치는 날이라도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효자각

집에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그곳에만 머물지 못하고 산소와 집을 오갔는데 뒤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때는 아예 여막(廬幕)을 지어 시묘살이를 했다. 제삿날 이외는 묘를 떠나지 않고 조석으로 향을 피우고 피눈물로 애통하며 술잔을 올렸는데 이는 중국 상고시대 순임금의 효심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그 효행에 감복하여 달리던 말이 주변에 머물렀으며, 호랑이도 가축처럼 길들어져 그를 보살폈다.

  사후에 향리의 유림들이 그의 여막을 ‘종모재(終慕齋)’라 부르며 나라에 장계를 올리니 효의 귀감으로 삼아 후세 전하도록 하라며 표창했다. 김복한(金福漢)이 지은 묘갈명과 류필영(柳必永)이 쓴 유허비명이 있다.

연혁

  계명재는 1840년(헌종 6)에 지었고 효자각은 1925년에 건립하였다.

 

 

 경북 문화재로 임계량(林啓良) 선생을 기리는 기룡재(起龍齋)

 

기룡재

1. 소재지 및 관리 문중: 풍각면 금곡리, 평택 임씨

 

2.배향인물

평택 임씨 입향조 임계량(林啓良, 16401684)

 공은  공혜공 정()의 9세손으로 자는 진식(震植)이다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금곡리에 이거한 평택 임씨 입청도조(入淸道祖)로 증직은 통정대부 용양위 부호군(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이다.

  공의 아들은 건원(建元)이다. 그의 자는 술초(述初)이고 1670년(현종11)에 태어나 1764년(영조 40), 95세에 별세했다. 통정대부 용양위 부호군(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이며 증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다. 평소 효심이 지극했던 그는 부친을 추모하고 자신의 학업과 자손의 교육을 위해 기룡재를 창건했다. 1726년(영조 2)에 초창했으며 1881년(고종 18)에 중건하였다.

 

3.연혁 

건물은 임계량을 배향하는 기룡재와 아들 건원을 위한 영사당(永思堂영역으로 되어 있으며 좌측에 별동으로 죽림헌(竹林軒)이 있다. 기룡재의 건축물들은 조선 시대 청도 지역 재실의 구조를 잘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지방 재실의 학술적 역사적 가치로 인정되어 경북도에서 문화재자료 제625호로 지정하였다.

   순재(醇齋) 김재화(金在華)는 ‘기룡재기’에 “비슬산의 맥이 마치 용의 기세로 일어나 힘차게 내려오다가 금곡동의 북쪽에 이르러 누운 듯이 머물러 와룡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와룡산 가운데 묘소를 모시고 그 아래 재실을 지어 ’起龍齋‘라 했다.”고 적었다. 재사 앞에 용이 머물러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연못을 마련했는데 운치를 더한다.

 

4. 후손.

  임계량공의 손자 봉화(鳳和)는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이다금곡리에는 평택 임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재실만 해도 기룡재 외에 중화(重和)를 모시는 염수재(念修齋), 광협(光協)의 유연재(油然齋), 화서(華瑞)를 배향하는 용암재(龍巖齋)가 있다.

 

5. 임 효자 기적비 

  기룡재 동쪽에 효자(孝子) 순학(淳學, 일명 淳灝, 1878〜1930)을 기리는 ‘임 효자 기적비(林孝子紀蹟碑)’가 있다.

임효자 기적비

그는 임계량의 8대손이며 병현(柄鉉)의 아들인데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효심이 극진했다.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하고 궁핍했지만 어버이를 위해 막노동을 해서라도 입맛을 맞추고 품삯으로 술을 사고 풀섶을 팔아 고기를 사며 밤중에도 3회 이상 자리를 살피고 여름에는 평상 베게 머리에서 부채질을 했다. 부모님이 80 노령 짙은 병환으로 자리보전을 하고 있어 밤낮으로 약을 달일 때는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이 지극한 효행을 고을의 선비들은 문장으로 칭송하고 청도 향교에서는 큰 상을 내렸다. 비문을 찬한 덕천(德泉) 성기운(成璣運)은 ‘검은 땅에 흰 꽃이 피는 것과 같고 어두운 밤에 등불과 같다’고 하였다.

 

 

 

 창선대부(彰善大夫) 이우(李優), 남은(南隱) 이석(李晳) 선생의 혼천재(混泉齋)

 

혼천재

1.소재지 및 관리 문중: 각남면 옥산리, 전주 이씨

 

2.배향 인물

이곳의 배향 인물은 조선조 전주이씨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현손인 해양부정공(海陽副正公) 창선대부(彰善大夫) 이우(李優) 선생과 공의 5세손 입청도조 남은(南隱) 석(晳, 1562〜1623) 선생이다. 남은 공은 광릉참봉, 통진현감, 영평현감을 역임했고 삭녕현감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광해주의 혼란을 피해 옥산리에 우거했다. 향년 62세로 작고했다.

 

3.연혁 

  원래 이 재사는 1860년대 중반, 현재 위치로부터 서남쪽 1키로 지점인 속칭 서당골에 초가삼간으로 지었고 그 뒤 1939년, 4간 툇마루 팔작 와가로 개축하고, 혼천재 이름을 현액했다. 그러나 외진 곳이라 관리와 이용하기가 불편하여 2003년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재사 구조는 팔작지붕, 5간 툇마루, 겹처마이며 재질은 육송이다.

  ‘혼천재’란 맹자(孟子) 이루장구(離婁章句) 하편 “原泉이 混混하여 不舍晝夜라, 盈科而後進하여, 放乎四海하나니, 有本者如是라 - 근원이 좋은 물은 철철 넘쳐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 구덩이를 만나면 구덩이를 채운 뒤에 앞으로 나아가 사해까지 이른다. 근원이 있는 것은 이와 같다.”에서 혼혼(混混) 원천(原泉) 자구를 차용했다.

 

4.영귀정 

  혼천재 뒤에 영귀정(詠歸亭)이 있다. 이곳은 남은 공의 후예인 만우헌(萬愚軒) 회규(會圭, 1820〜1896)와 후손 4대에 걸쳐 수학하고 강학하던 서당이다. 1860년부터 1960년까지 1세기 동안 지역민의 한학 교육장으로 활용되었고, 1860년대에는 청도와 창녕을 오가는 유림들이 학문을 토론하며 유숙하던 곳이기도 했다.

 

영귀정

  만우헌의 유집으로는 ‘경전 강의록’이 있으며 제자들의 스승을 기리는 ‘영귀정 유계’가 있다. 1910년경에는 만우헌의 종손인 흠와(欽窩) 경의(京儀)가 1950년까지 강학을 했다. 그는 덕천(悳泉) 성기운(成璣運)과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도학이 고고했다. 평생 백의를 고수하고 단발령과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여 단아하고 엄숙했다. 문하생들이 ‘보인계’와 ‘동학계’를 조직해서 선생을 추모하고 동문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있으며, 은사를 추모하여 ‘흠와문집 건.곤’ 2책을 발간했다. 영귀정은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돌아오겠다는 공자의 제자 증점의 영이귀(詠而歸)라는 자구를 차용했다. 1850년대 중반에 서당골에 지었다가 1900년 초에 초가삼간으로 이건했고 1940년초에 와가로 개축했으며 그 뒤 2004년에 새로 지었다.

5. 영모재

  혼천재 동쪽에 있는 영모재(永慕齋)는 만괴(萬愧) 득재(得裁)를 배향하는 재사이다. 만괴는 남은의 현손으로 덕망이 있는 유학자로 후학 지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5년에 지었으며 그 뒤 1965년에 새로 중건했다.

 

 

 

 경주 이씨 조상의 유덕을 추모하고 종친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화수정(花樹亭)

화수정

1.소재지 및 관리 문중: 청도읍 고수 2리 냉정(冷井) 마을, 경주 이씨

 

2. 경주 이씨 내력

  경주 이씨의 시조는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이다. 공은 신라의 6촌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으로 혁거세(赫居世) 왕을 옹립하여 신라를 세웠으며 아찬(阿餐)에 올랐고 유리왕(儒理王) 9년에는 급량부장(及梁部長)이 되었으며 이씨(李氏)로 사성(賜姓)을 받았다. 그 이후 경주 이씨의 중시조는 이거명(李居明)이다. 그는 신라 때 십칠 관등 중 귀족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었던 관직인 소판(蘇判)을 지냈다. 경주 이씨의 세계는 중시조 거명의 16대손(고려 말기)에서 크게 8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70여 파로 분파된다. 8대파는 성암공파(誠菴公派), 이암공파(怡庵公派), 익재공파(益齋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국당공파(菊堂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상서공파(尙書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이다.

2. 국당공파 입향조 및 후손

  청도에 자리를 잡은 국당공파 입향조(入鄕祖)는 국당(菊堂) 천(蒨)의 후예인 24세(世) 만송(晩松) 휘(翬, 1466〜1515) 선생이다. 1484년(성종15) 문과에 올라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양주(楊州)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청도를 빛낸 사람들 175명 중 한 분이다.

  만송의 장자인 문강공(文剛公) 사균(思均, 1483〜1544)은 1496년(연산군2)에 1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에 이르렀고 증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이다. 호는 일매당(一梅堂)이며 ‘문강’은 시호이다. 기묘사화 뒤에 냉정에 돌아와 시유(詩遊)하다가 62세에 졸했다. 만송의 손자 령(柃)은 1503년(연산군9) 출생하여 1524년(중종19) 22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현감(縣監), 도호부사(都護府使), 평안도 관찰사(觀察使), 개성 유수(留守)를 거쳤으며 평안도 관찰사 때 양병(養兵)과 치산치수(治山治水)에 힘을 쓰고 청백리로 이름이 높아 향민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3. 연혁

  이 재사는 1917년에 익재공파, 국당공파, 상서공파 33명이 2240원(당시금액)을 출몰하여 창건했으며 1922년에 새로 중수한 이래 수차에 보수하였으나 다시 노후하여 종친들의 협찬금으로 2008년 11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정자와 축대등을 크게 정비하였다. 2009년 4월 29일 청도군 화수회(당시 회장 이복수)는 화수정 보수공사 표지명 제막식을 가졌다.

보수공사 내역

  통훈대부 홍문관 이중구(李中久)는 상량문에 “화수정은 땅이 숨기고 하늘이 아끼는 곳에 마련한 경주 이씨의 화려한 집”이라 했고 승지 김홍락(金鴻洛)은 화수정기에 “경주 이씨는 대대로 이곳에 살아 깊은 뿌리에 무성한 잎, 굳은 줄기와 번성한 가지가 되었으며 윤리의 돈독하고 두터운 풍속이 끊이지 않았다. 그 가운데 정자를 짓고 이름을 ‘花樹’라 하였으니 여러 종친들은 집 이름의 뜻을 체득하여 뿌리를 같이하는 우호를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경북 지사와 청도 군수의 선대인 이인구(李仁龜) 선생의 모암재(慕巖齋)

모암재

 1.소재지 및 관리 문중:  이서면 대곡1리(한실마을), 경산(京山) 이씨

 

2.배향 인물

이인구(李仁龜, 1686∼1758) 

 공의 본관은 경산(京山)이며 자는 응여(應汝)이다.  고려 낙거부정(樂居副正) 덕부(德富, 시조), 양양부사(襄陽府使) 번(蕃),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흥문(興門), 정한강(鄭寒岡), 장여헌(張旅軒) 양 선생의 문인이며 여헌 선생의 행장을 모두 지었고 남전 향약을 만들어 향촌 사회의 발전을 주도했던 학가재(學稼齋) 주(糸+宙, 증조부), 생원(生員) 형만(亨萬, 조부), 증광사마(增廣司馬) 규태(奎泰, 父)가 공의 선대들이다.

  공의 조부는 경산 동계(東溪)에 살았다. 청도 입향조인 공은 1730년(영조6) 경에 자손들의 복지가 될만한 좋은 땅인 이 마을에 터를 잡은 뒤 조상의 유덕을 추앙하며 후손과 후학들을 훈도했다.

공의 증손 원수(元壽)는 수직으로 가선대부중추부사(嘉善大夫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현손 병업(秉業)은 효행과 덕행이 높았고 5세손 회곡 국준(晦谷 國埈)은 학행이 높은 선비였으며 박효수가 묘소의 갈명(碣銘)을 지었다.

 

3. 경북 지사와 청도 군수

  8세손인 의근(義根,1938∼2009)은 1993년 경상북도 관선 도지사를 지내고, 대통령 행정 수석 비서관을 역임한 후에 1995년 지방 자치제의 시작과 더불어 경상북도 도지사를 3선 역임하였다. 경상북도 도지사 재임 동안 지방 자치 단체로는 처음으로 국제기구인 동북아 자치 단체 연합[NEAR]의 창설을 주도했으며 세계 최초의 문화 박람회인 경주 문화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의근 지사의 동생인 중근(重根, 1941∼)은 청도군수를 지냈다. 2008년부터 민선 4기와 5기 6년을 재임하면서 '함께하는 군정, 도약하는 새 청도'란 슬로건으로 모든 군민에게 희망을 주는 행복 도시 청도건설을 위해 2020 비전 전략의 큰 틀을 제시했으며 새마을운동 세계화 사업, 신화랑 풍류체험벨트 조성 등을 했다.

지사와 군수가 자란 집

연혁

  모암재는 목조와가 정면 4칸 건물이며 하당과 정면 솟을 대문이 있으며 1946년 후손들이 합심하여 창건했다. 마루에는 장우원(張右遠)이 쓴 ‘모암재기’와 방후손 기영이 근찬한 ‘모암재 상량문’과 재실의 낙성을 축하하는 후손 달호(達浩)의 축시 원운(原韻)이 걸려 있다. 가까이 현재는 다른 사람의 소유이나 전에 의근, 중근 등 형제들이 살던 집도 있다.

 

4.생원시 시험 답안지

  이날 공의 9세손인 희부(熙阜)씨가 재실을 안내하며 족보 및 여러 자료 등을 펼쳐놓고 문중에 대한 내력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특히 그는 11대조 형만이 1657년(효종8)에 생원시(生員試) 합격한 교지와 생원시 ‘역이’시험 답안지’ [易義 君子 愼密而不出也 -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傳)에 나온 말로 ‘군자는 비밀을 신중히 지켜 집 밖을 벗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를 보관하고 있었다. 이는 무려 367년이나 되는 가보로 오동나무 상자 속에 특별히 잘 보관하고 있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생원시 답안지

 

 

 

 

 세거지와 묘소 두 곳에 건립한 증 병조판서 윤종충(尹宗忠) 선생의 태안재(泰安齋)

용산리 태안재

1.소재지 및 관리 문중:  매전면 용산리(龍山里)와 덕산리(德山里) 두 곳에 있다. 파평윤씨   

용산 재실은 후손들의 세거지에 창건했고 덕산 재실은 공의 묘소인 덕산리 장승산(長承山) 아래 묘재(墓齋)로 건립한 것이다.

2. 배향 인물

윤종충(尹宗忠1503〜1588)

  자는 효겸(孝謙), 호는 태안(泰安)이다. 삭주부사(朔州府使),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올랐으며 선치(善治)하여 우러러 따르는 자가 많았으며 충직하고 강직했다.

  공은 청도에 입향한 뒤 벼슬이 덧없음을 회고하며 남은 인생은 자연과 벗하며 참 성품을 기르겠다는 글을 남겼다

天地交生否與泰 하늘과 땅 어울려 생겨나 막히거나 통한다關通萬物各隨辰 만물을 관련하여 통하니 각각 시절을 따르고文章道德曾留意 문장과 도덕에 일찍이 뜻을 품었으나富貴功名暫誤身 부귀와 공명에 잠시 몸이 잘못되었네栗里歸來園事業 (도연명이돌아온 율리 전원처럼 살아가며龍淵潛伏兩精神 (시조 탄강용연에 엎드린 듯 정신을 가다듬네泰安二字從爲號 태안 두 글자를 호로 삼아 따르고只以林泉養性眞 임천(숲과 샘자연)으로서 참된 성품을 길렀도다증 병조판서(兵曹判書)이며 유헌 장석용(游軒 張錫龍)이 찬한 묘비문이 있다.

 

3. 공의 선대 및 후손

  공의 시조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용연(파주시 향토문화유산 10호)에서 탄강한 신달(莘達)이며 파조(派祖)는 평안도 관찰사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으며 파평군(坡平君)에 봉군된 소정공 곤(昭靖公 坤)이다.

  10세손 한계 경발(閒溪 景發)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숭정대부 도첨의(崇政大夫 都僉議)에 이르렀고 11세손 운암 형일(雲巖 衡一)은 학문에 전념하였고 통덕랑(通德郞)을 지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사림에서 포상하였다. 13세손 용은 주병(龍隱 周炳)은 학문이 높았으며 유고 3책(遺稿 三冊)이 있다.

  인와 경범(仁窩 景範)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계백(戒伯) 역시 효자로 고을에서 포상했으며 참봉을 지냈다. 도일(道一)도 효심이 지극했으며 지평(持平)을 지냈고 익후(益厚)는 가선대부 용양위 절충장군(嘉善大夫 龍驤衛 折衝將軍)이었다.

 

4.연혁

  1890년에 창건한 용산리 재실은 정면 4칸이며 대청에는 류도승(柳道昇)의 ‘태안재기(泰安齋記)’, 12세손 화중(華重)이 쓴 ‘상량문(上樑文)’, 태안 선생의 시가 걸려 있다. 청도문헌고(淸道文獻考)에는 후손인 도일(道一), 좌일(佐一), 문병(文炳), 경중(敬重) 등이 의논해서 집안의 여러 선조(先祖)들을 위하여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60년에 지은 덕산리 재실도 정면 4칸이며 마루에 12세손 형병(亨炳)이 쓴 ‘태안재기’가 걸려있다. 이곳은 ‘파평 윤씨 태안공파 종회’이기도 하다. 대문 옆 별도 공간에 ‘증 병조판서 태안윤공 신도비(贈 兵曹判書 泰安尹公 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덕산리 태안재

  

 밀성 박씨 12중조(中祖)의 한 분인 박중미(朴中美) 선생의 묘봉재(妙峯齋)

묘봉재

 

1.소재지 및 관리 문중: 풍각면 월봉리 묘봉 마을, 밀성 박씨 밀직 부원군파 

2.이곳의 배향 인물

1)죽은(竹隱) 박중미(朴中美)

 공은 밀성 박씨 12중조(中祖)의 한 분이다.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중서령(中書令)과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했다. 1361년(공민왕 10)에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홍건적이 국경을 넘어와 서경까지 침입하였을 때 안우(安佑), 정세운(鄭世雲), 홍언박(洪彦博) 등과 함께 적을 소탕하여 나라를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를 제수받았고,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다.

 

2. 사패지 표석  

  왕이 선생의 공훈을 기려 사패지 수 친평을 하사했으며 이 토지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밀직부원군 사패지표석(密直府院君賜牌地標石)이라고 음각한 네 개의 표석을 세웠다.

사패지 표석

1965년 경까지만 해도 이 표석은 경계석에 더해 마을의 액운을 막아주는 경외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원래 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 어떤 사람이 표석을 뽑고 난 뒤, 이름 모를 병에 걸렸다가 표석을 도로 갖다 놓고 용서를 빌고 난 뒤 낫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지금은 산기슭 밭두렁에 겨우 하나 남아 있을 뿐 논 속에 있던 것도 없어지고 어떤 것은 도로가 확장되면서 매몰되어 버렸다고 한다.

 

3.묘역 

   묘역은 근래에 새롭게 사토를 하는 등 크게 보수하여 기품있게 단장되어 있었다. 그 아래 공의 아들이며 손자의 묘역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해마다 추향 때는 전국에서 수 많은 종원들이 묘소를 찾아와 시제를 올린다고 하니 면면히 이어지는 후손들의 조상에 대한 숭모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4.후손

  공의 장남 희는 안동부사로 화녕군(和寧君)에 봉해졌고 차남 해(晐)는 대사헌(大司憲)이다. 그가 살던 경산 내매동 집터에는 당시애 심어놓은 은행나무가 지금도 남아 있다. 희의 아들 등(簦)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였으며 해의 아들 울(蔚)은 단성 현감이었다. 영천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하고 있는 노계(蘆溪) 인로(仁老)도 공의 후예이다. 그는 임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과 항전했으며 수군 만호, 용양위 부호군이었다. 널리 애송하고 있는 조홍시가(早紅柹歌)를 비롯한 60여 수의 시조와 선상탄(船上嘆), 누항사(陋巷詞) 등 주옥같은 가사를 남겼다.

  공의 후손들 중에는 명망있는 인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국회의원만 해도 주현, 찬종, 상희, 대동, 재호, 민식 등이 있다.

 

5.연혁

 묘봉재는 1932년에 밀직부원군 묘재로 창건했으며 그 이후 여러 차례 중수했다.

 

6.제4회 전국 한시 지상 백일장(주최: 청도군, 주관: 청도향교) 시제: '追慕 竹隱 朴中美 先生 忠節'로 열림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묘봉산은 명당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산의 형세가 뾰족하고 기묘하게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교수(敎授) 겸 도훈도(都訓導)이었던 눌연(訥淵) 정민도(丁敏道) 선생이 강학을 했던 눌연정(訥淵亭)

눌연정
눌연정 연혁

1.소재지 및 관리 문중:  금천면 방지리(芳旨里) 우측 눌연천(訥淵川) 위에 자리잡고 있다. 나주 정씨

 

2.배향 인물

  눌연(訥淵) 정민도(丁敏道, 1553 〜1635) 

 교수(敎授) 겸 도훈도(都訓導)이었던 공은 이곳에서  강학을 했다. 공은 방지리에서 선무랑(宣務郞) 정복(丁復)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 살이 미처 되기도 전에 이미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여 막히는 곳이 없었을 정도이었으니 그 학문적 경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관직에는 뜻이 없어 과거를 보지 않고 자호(自號)를 ‘눌연’(訥淵)이라 하고 책을 벗 삼아 도(道)를 즐겼다.

그런데 1608년(선조 41), 조정(朝廷)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문란한 세속과 사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고심하던 차, 고결한 인품과 높은 학덕을 겸비한 눌연공의 명성을 듣고 공에게 특별히 전국 동서남북 네 학당 중 하나인 남학교수(南學敎授) 겸 구읍도훈도(九邑都訓導)를 제수했다. 아홉 고을은 청도, 영천, 신령, 양산, 경산, 하양, 자인, 언양, 기장이다.

  그 때 공은 사도(師道)로써 소임을 다하며 유생(儒生)들에게 “사람은 하늘의 명(命)을 받은 천성을 지녀서 도(道)와 더불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배우는 것인데 즉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이다.”란 요지의 흥학문(興學文)을 발표하고 그 이후 28년간 도훈도(都訓導) 직을 맡았다.

  눌연 선생은 이 도훈도 직 외에도 유림이나 지역 발전을 위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하나가 우연서원(愚淵書院) 창건이다. 1620년(광해군12) 매전면 동당(현재 당호리)에 신축하고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 경재(敬齋∙警齋) 곽순(郭珣)을 배향했다. 또 소요당과 삼족당이 매전면 동산리에 주민들을 위해 설치한 동창(東倉)이 임진왜란으로 무너지고 그 터가 어느 공신 집에서 부당하게 점유하는 일이 벌어지자 순찰 중이던 안렴사(垵廉使)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여 돌려받았다. 그리고 예부운략(禮部韻略)이 1615년(광해군7) 박경전∙박경윤 형제에 의해 만력본(萬曆本)으로 새로 복각(復刻)되었을 때 교정을 한 뒤에 발문(跋文)을 썼다.

  공은 사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증직 받았으며 ‘조선명인전’에 수록 되었다. 저서로는 집중예설(集中禮說)과 역경연의(易經演義)가 있다.

 

3. 연혁

  눌연정은 1591년(선조 24) 건립했으며 1608년(선조 41) 아홉 고을 향교를 대신하여 강학당으로 지정되었고 1826년 건물이 허물어져 유림들이 재건했다. 1896년 화재로 소실되어 1897년 재건했다. 또 1947년 화재로 전소되었으며 1948년 건물을 축소, 현재 정각으로 재건했고 1973년 2016년에 기와 교체, 담장, 도색 등 전면 보수를 했다.

 

 

 

 윤봉한 선생이 창건했으며 독립군 지원 모금을 했던 거연정(居然亭)

거연정

1.소재지 및 관리 문중: 운문면 공암리, 파평 윤씨

2. 배향 인물

 윤봉한(尹鳳翰)

원래 이곳은 공이 청도 8경 중 하나인 공암풍벽(孔巖楓碧) 빼어난 경치를 즐기던 장구지소(杖久之所)이다.

 

공암풍벽
공암

 공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판도판서(版圖判書) 승례(承禮)의 후손으로 자(字)는 기중(岐仲)이며 호(號)는 청수헌(聽水軒)이다

  공은 일찍이 관심도(觀心圖)와〮 경심도(警心圖)를 지어 좌우에 놓고 보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향리 사람들과 함께 향약을 세우고 학교를 설치했는데, 관찰사 이중하(李重夏) 澹於勢利勤於爲善하니 此非孟所謂一鄕之善士- 권세와 이익에는 담담하고 착한 일에는 힘썼으니 이것이 맹자가 말한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라고 서문을 썼다. 저서에는 유생들이 실천에 옮겨야 할 습속을 비교한 삼사비류(三事比類) 및 도행장록(桃杏腸錄) 등이 있는데 필독서가 될 만한 귀중한 책이다.

 3.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또한 이 정자는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던 이른바 ‘다물단군자금모집사건(多勿團軍資金募集事件)’과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권대웅이 연구하여 그 내용을 소상히 정리했는데 이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다물단(多勿團)은 1925년 4월 14일 북경에서 조직된 항일 비밀 운동 단체이다. 다물단의 ‘다물’은 용감, 전진, 쾌단(快斷) 등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입을 다물고 실행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

 

4. 민족 운동

  공암동은 민족 운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1906년에는 사립 유천 학교를 설립 운영하던 윤대섭(尹大燮)이 도동 학교(道東學校)를 설립하였고, 운문면의 최성희(崔聖熙)는 1919년 3월 18일 운문면 공암리에서 이용환(李龍煥), 김문근(金文根), 윤병림(尹炳林) 등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1924년 1월 12일 대구출신 서동일은 거연정에서 예안 군수 출신 윤영섭(尹瑛燮)과 그의 제자 윤병채(尹炳采), 윤병일(尹炳馹) 등을 만나 윤병채의 양가 맏형수인 이심동(李心東, 이여심)에게서 독립운동 자금 1,000원을 받았는데, 이는 윤병채가 나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재산이 넉넉한 윤병권(尹炳權), 최홍태(崔洪台), 최홍열(崔洪烈), 박순병(朴淳炳), 김일준(金馹俊) 등에게도 군자금협조를 얻어냈다. 그 뒤 서동일은 다시 국내로 파견되어 1925년 1월 8일 윤영섭을 다시 방문하고, 거연정에서 윤병채, 윤병일, 최성희 등과 이심동에게 현금 30원을 제공받았다. 또 3차로 청도를 거쳐 경산에서도 모금운동이 있었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서동일을 비롯하여 청도의 윤영섭, 윤병채, 윤병일, 최성희(崔聖熙) 대구의 배천택, 이종호(李鍾昊) 등이 제령(制令) 위반 혐의로 붙들려 1925년 6월 검찰에 넘겨졌다.

 

5. 연혁  

거연정은 퇴락하여 새로 지었는데 구조가 옛모습과 좀 달라 아쉽지만 주변 바위에 새겨진 ‘山高水長’, ‘活水源’은 그대로다. 현판과 안내판도 있었으면 한다.

‘거연정’이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학행이 빼어난 이요재(二樂齋) 삼형제의 화계재(華溪齋)

화계재

1. 소재지 및 관리 문중: 각남면 칠성리 향인촌, 아산 장씨

 

2. 배향 인물

이곳의 배향 인물은 이요재(二樂齋) 장방익(蔣邦翼, 양헌(養軒) 장방호(蔣邦豪), 국헌(菊軒) 장방한(蔣邦翰) 선생 3형제이다. 본관은 아산(牙山)이며 금자광록대부 신경위 대장군(金紫光祿大夫神慶衛大將軍) 장서(蔣壻)의 후예인데 아버지는 장사효(蔣思孝)이다.

 

1)장남인 이요재 장방익

  공은  9세에 이미 화산에 있는 ‘대운암(戴雲巖)’을 보고 시를 지었다.

“몇 년째 바라보던 이 바위 끝소에/ 오늘 오르니 바로 구월 가을이로구나/ 산은 그림 병풍되어 큰 골을 둘러싸고/ 냇물은 드는 칼 되어 평지를 가르네/ 마을에 즐비한 집 누구 누구네 집이런가/ 땅끝에 늘어선 곳 어느 고을/ 만약에 내 두 눈이 사해를 본다면/ 천리 안에 벼슬하려 애쓰지 않을 것을.”

  이렇게 어릴 때부터 시문(詩文)에 능하고 학문적 경지가 높았던 공이었기에 18세에 과거에 응시했을 때 댱연히 장원급의 좋은 글을 지었다. 그러나 서리(書吏)가 농간을 부려 방(榜)에 이름을 감추는 통에 낙방을 했다. 크게 탄식한 공은 고향에 돌아와 과거에 더 나아가지 않고 화계(華溪)에다 집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그때 각지에서 공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문도가 50여 명에 이르렀다.

뒤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북부장사랑(北部將仕郎)이 제수되었고 사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 되었다. 향년 62세로 작고했을 때 강고(江阜) 유심춘(柳尋春)은 “선생은 독실(篤實)한 행동과 선비다운 그윽하고 바른 지조를 간직하셨으며 후학들에게 은혜를 베푼 뛰어난 선비였네”하고 추모했다.

이요재 문집

2)  양헌 장방호

 장사재(蔣思悌)의 계자(系子, 생부 장사효)인데 큰 형인 이요재와 동생인 국헌공과 더불어 우애가 남달랐으며 화계정사에서 학업에 매진하여 도량과 학문적 식견이 뛰어났고 의롭고 너그러운 덕업은 도덕군자였다. 장사랑(將仕郞)을 지냈는데 향년 45세에 유명을 달리했다.

 

3)국헌 장방한

  공은 삼형제 중 막내이다. 천성이 순후하고 명석하여 나이 12세에 이미 많은 서책을 두루 섭렵하여 경학에 능통하였으며 16세에 과거에 오르고 37세에 성균관 진사가 되니 조정과 유림 사이에 그 명성이 높았다. 향년 76세였다. 화양읍 신봉리에 공을 배향하는 만향재(晩香齋)가 있다.

 

3. 연혁

  화계재는 1818년(순조18)에 건립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국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뒤 1958년에 새로 지었으며 그 동안 여려 차례 도색 및 기와 번와 등 중수했다. 대청벽에는 김필호가 찬한 ‘화계재 중건기’, 후손 장병구가 찬하고 서학균이 근서한 ‘화계재 중건 상량문’이 결려있다. 대문 앞에는 수령 400년이 된 보호수 은행나무가 있다.

 

4. 후손

  삼형제 후예들 중에도 학행으로 빼어난 인물들이 많다. 이요재의 아들인 장희국(蔣熙國)은 공조참의에 추증되었는데 어진 아버지에 훌륭한 아들이라고 주변에 칭송이 자자했다. 국헌의 아들인 장희재(蔣熙載)는 지방에서 실시한 과거 초시인 향시(鄕試)에 3번이나 합격하는 등 학문으로 명성을 얻었다. 역시 국헌의 후예인 복암(復庵) 장화식(蔣華植)은 조선 말기 청도의 삼학사 중 한 분이다.

 

 

 

마. 고택

 

 만석꾼 재산에 대대로 벼슬이 이어지던 원정리 죽산 박씨 고택

안채

 

1. 소재지: 청도군 청도읍 원정리

 

2.연혁

  만석꾼 재산에 대대로 벼슬이 이어지던 죽산 박씨 고택이5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의 팔작 기와집인 안채가 있으며 우측에 마당을 사이에 두고 큰 사랑채와 중 사랑채가 마주 보며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 집은 1300평 대지에 동서남북 발복'(發福)을 기원하는 전자형(田字形) 아흔아홉 칸 집이었지만 현재는 중앙에 있던 연회장, 광 등이 없어져 60여 칸 정도가 남아 있다. 지은 지는 약 150년 정도 된다.

 

박유붕 영정

은 1806년(순조 6)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전라우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으며 당시 영기(令旗)로 사용했던 “湖南右水軍司令”이라는 사령관 기(旗)가 이 댁에 가보로 보존되고 있다.

3. 박유붕(朴有鵬) 

이 집은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공은 장안에 제일가는 애꾸눈 관상가(?)였다. 일설에 그가 유명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원병을 온 명나라 무장이면서 풍수, 점술, 관상에 능했던 두사충(杜思忠) 장군의 후손 집에 장가를 들면서 전해오는 비전서(秘傳書)를 익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튼 신통한 혜안을 가지게 된 그는 마침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왕(고종)이 될 것을 예언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적중하자 대원군은 그를 크게 총애하고 신임하여 운현궁 옆에 45칸 저택을 지어주고 수선교에서 돈암동에 이르는 땅을 하사한 뒤, 책사로 삼고 모든 일에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그 뒤 대원군이 민비를 왕후로 책봉하려 했을 때 반대하고 궁인(宮人) 이씨 아들인 완화군(完和君)을 원자(元子)로 삼으려는 고종에게 반대하는 등 왕실과의 갈등이 생겼다. 그런 일로 스스로 자진하여 목숨을 버렸다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사약을 받았다고도 한다.

 

4. 대대로 이어진 인물

 박유붕의 아들 풍혁(酆赫)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장진(長津) 도호부사(都護府使)에 이르렀다. 그리고 장손 병숙(炳淑)은 울산 군수등을 두루 지냈으며 둘째 손자 병익(炳翊)은 경주 군수 겸 경상북도 독쇄관(督刷官)을 지냈고 형제 모두 종이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증손자 영재(英在)는 물려받은 1800석 정도의 재산을 바탕으로 만석 재산을 일구었다. 그는 큰 부자였지만 항상 검소하고 겸손하며 가난한 이의 사정을 살펴 한없이 관대하게 베풀었다. 독립군을 지원하다가 형을 살기도 했고 6.25 전쟁 중에는 수많은 피난민들을 구휼했다. 이러한 덕행이 있어 전쟁의 혼란 중 주변에 다른 집은 불에 타도 이 집만큼은 불을 지르는 이가 없어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었다. 또 그 인심 덕분에 아들인 종환(鍾煥)은 경북 내 최다득표로 청도 초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지만 애석하게도 6.25 전쟁 중 북으로 납치되었다. 이집은 박유붕공의 5대손이자 종환의 아들인 이수(貳洙)씨가 지키고 있다가 얼마전 작고했다

고택에 대한 설명

 

5)그런데 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집이 아직도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쉽다.

 

 

 박정주(朴廷周) 선생이 열었던 9동 80칸 규모의 운강고택(雲岡故宅)

 

안채

1.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2. 운강 고택의 자취

  이곳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의 11대손인 성경당(誠敬堂) 박정주(朴廷周,1789~1850) 선생이 1809년(순조 9) 분가하면서 살림집을 건축한 것이 이 고택의 시작이고, 성경당의 아들인 운강(雲岡) 시묵(時黙,1814~1875)이 크게 중건하였는데 그 이후 그의 호를 따서 운강고택이라 불려졌다. 또 1905년 운강의 증손자 박순병이 다시 중수하였다.

 

3. 건물 배치

  주택 전체의 건물 배열은 평평한 대지에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튼 ㅁ자형 건물군이 앞에 나서고 그 왼쪽 뒤편으로 안채를 중심으로 한, 또 하나의 튼 ㅁ자형 건물 군이 이어지며 사당(祠堂)이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형태다. 합하면 집채가 9동에 80칸이나 되는 큰 규모이다. 대지도 1,700여 평이나 되어 두 개의 넓은 마당과 안채와 사랑채의 뒤뜰 등 널찍한 공간을 여유 있게 두었다.

넓은 광

그야말로 짜임새 있는 건축 구조와 세분된 각 건물의 평면배치 및 합리적인 공간구성 등으로 조선 후기 상류 주택의 면모를 잘 갖추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106호이다.

꽃담

4.운강고택을 열게 된 박정주

  그는 큰 재산가이지만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도하고 우애가 깊었다. 문중 자제들을 위해 서숙(書塾)을 운영하고 선암서원에 문강계(門講契)를 설립하여 인재를 키우고 학문을 장려하니 향당(鄕黨)에서 그 행의(行誼)를 칭송하였다고 ‘교남지(嶠南誌)’에 실려 있다. 공은 3남 6녀를 두었다.

 

5. 박정주의 장남인 운강 시묵은 퇴계 학맥의 적통을 계승한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과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선대 우당 융의 ‘우당집’과 소요당 하담의 ‘소요당 일고’, 그리고 임진왜란 때 청도를 기반으로 창의했던 ‘14의사록’ 등을 간행했다. 부인 경산 이씨와의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그의 저술은 ‘운창일록(雲牕日錄)’ 25책, ‘중용절해(中庸節解)’, ‘대학차기(大學箚記)’ 등과 아들 재형이 간행한 ‘운강집’이 전한다.

 

6. 진계 재형

  운강의 장남 진계(進溪) 재형(在馨, 1838~1900)은 그의 아버지를 따라 유치명과 허전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3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뒤뜰에 석류 100 그루를 심고 ‘백류원(百榴園)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대비정사(大庇精舍)에서 강학활동을 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 ‘해동속고경중마방(海東續古鏡重磨方)’ 등 다수의 저술을 남겼다. 슬하에 7남1녀를 두었으며 ‘정학을 지키고 사학을 물리친다’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으로 충만된 통문을 각 문중에 보내어 창의를 호소했던 아버지 뜻에 따라 의병으로 출전하여 1900년 8월 12일 거제군 부안포 해상에서 순국하였다.

해동속소학

7. 후손들

 진계의 장남 지암(旨巖) 박래현(朴來鉉, 1861~1896)은 김흥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시문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박래현의 아들인 청초(聽蕉) 박순병(朴淳炳, 1893〜1944)은 매전에서 동창금융조합을 설립했으며 경상북도 도평의회 의원을 지냈다. 현재 주손인 성욱(性昱)이 고택을 관리하고 있다.

 

 

 

 400여 년 내시(內侍) 가문이며 거부(巨富)였던 운림고택(雲林古宅)

북향안채

1.소재지: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林塘里)

 

2. 고택 유래

국가민속문화재 제245호인 이 고택은 조선 중기부터 400여년 간 내시 가문이 살았으며 이 집이 여기에 자리 잡은 것은 당시 유명한 지관이 명당을 찾아 두루 답사한 결과 이곳을 최고의 길지(吉地)로 꼽았다고 하는데 그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이 집은 오랜 세월 동안 큰 부잣집으로 이름을 날렸다.

내시가(內侍家)는 근본적으로 혈손을 둘 수 없었기에 입양으로 대를 이었는데 그 동안 다른 성씨가 부자와 조손의 연을 맺어 가계를 이어갔다. 이때 16대까지는 생가의 성과 이름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데 16대에는 2명이 입양되었고 17대와 18대에 오면서 성씨도 김씨로 통일한 것 같다.

 

3. 김병익

  현재 건물은 구한말 내시로 상선(尙膳)의 품계를 받은 15대 운림(雲林) 김병익(金秉翼, 1842〜1925)이 건립했다고 전한다. 이 집에서 나온 가계 문서에는 2대부터 16대까지 이름과 실제 관직, 부인의 본관, 산소의 위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집은 큰 사랑채, 중 사랑채, 안채, 큰 고방채, 작은 고방채, 사당,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는 대궐 쪽 방향인 북향으로 놓여 있다.

 

4. 출입

  큰 사랑채에서는 대문부터 안채로 들어가는 동선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중 사랑채 좌측 문을 통해서만 안채로 드나들 수 있다.

사랑채

안마당에는 곡식을 나르는 등 특수한 때를 제외하고는 남자가 출입하는 것은 금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옥 구조는 보통의 사대부 가옥보다 더욱 엄격하게 안채의 노출을 최소화하고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구조이다.

 

5. 만석지기 재산

  청도 운림고택은 서울, 경기 지역 외에 남아있는 유일한 내시 가옥으로 조선 시대 가옥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바깥을 살필 수 있는 문

일설에는 이 집 만석지기 재산은 2대 이세륜(李世倫)이 서울에서 낙향하여 내려올 때 임금님께 받은 시업인 새들 논 30마지기가 그 시작이었다고 하는데 대가 내려가면서 계속 재산이 불어나 마침내 청도 지역은 물론이고 밀양, 대구, 경주 등 100여 리 밖에까지 광범위하게 논밭이 있었다.

그런데 이 집은 재산만큼 인심도 넉넉하여 배고픈 걸인이나 과객이 오면 내치지 않고 대접을 잘 했다. 한 번은 어느 과객이 돌연사하자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기도 했는데 그 땅이 명당이었다고 한다. 또 동리 앞 하천이 휘어져 비만 오면 홍수 피해가 막심했는데 막대한 사재(私財)를 출연(出捐), 냇물을 직선으로 흐르게 하여 이를 해결하는 등 동리의 숙원사업에 적극 나섰고 그리고 나라가 일제의 압박에 시달릴 때 거금의 독립운동 자금을 흔쾌히 내어놓은 애국심 또한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러나 이 집의 재산도 이승만 정부가 주도한, '토지개혁'이 전격 시행되면서 만석지기 시대도 끝이 나고 말았다.

 

 

 

 

 김경의(金慶誼) 선생이 건립한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0호인 운곡정사(雲谷精舍)

운곡정사

1. 소재지: 운문면 운문댐을 바라보며 서북방향으로 좌정하고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0호인 운곡정사(소雲谷精舍)를 찾았다. 원래 이 집은 운문면 순지리 406번지에 있었지만 마을이 수몰되면서 1993년 현재의 자리로 이건(移建)하였다.

 

2. 건물

 전면에 3칸 규모의 대문이 있고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二’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별도의 공간에 사당이 있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인데 좌측 온돌방에는 중간 설주 등 옛날의 자취가 남아 있다. 마루 앞에 ‘雲谷精舍’ 편액이 걸려 있으며 안쪽에는 ‘三石亭’도 걸려 있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우진각집이며 사당은 3칸 규모의 뱃집이다. 사랑채 전면의 일반형 가운데 설주가 있는 쌍영창 등은 건립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이다. 쌍영창은 17세기 후반부터 점차 줄어들어 18세기 들어와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나 남부 지방인 영천 등지에서는 18세기에도 쌍영창이 발견되고 있어 운곡정사는 쌍영창 사용의 하한 연대를 조명하는데 의미 있는 건물로 생각된다.

쌍영창 중간에 설주가 있다

3.김경의

  이 건물은 운문면 순지리에 정착하여 살고 있던 경주 김씨 종택으로 김경의(金慶誼,1696 숙종 22- 1751 영조 27) 선생이 건립한 1700년대의 건물이다.

김경의 공은 학덕이 높아 남천서원(경산 용성)에 봉향하고 있는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의 증손이다. 공의 후손들도 대대로 가업을 계승하여 번창했으며 공의 5대손인 경재(敬齋) 김몽로(金夢魯,1828 순조 28∼1884 고종 21)는 학행으로 고을에 존경을 받았으며 ‘경재유고(敬齋遺稿)’ 2권이 전하고 있다. ‘운곡정사’란 현판은 경재의 아버지 김지목(金志穆, 1810-1833)의 글씨이다.

 

4. 운곡정사 보고서

  건물 구조와 건축양식이 건축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기에 이건(移建)하기 전 청도군과 영남대학교 민족문화 연구소에서 실측조사(1991. 8.1 〜1992. 4. 30)를 실시하여 ‘雲谷精舍’란 보고서를 발간한 바 있다.

 

5.원모재

  운곡정사 옆에는 역시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232호로 지정된 경주 김씨의 재사인 원모재(遠慕齋)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4칸의 ‘ㄱ’자형 재사이다. 마루와 방은 사분합들문으로 필요에 따라 전 5칸을 하나의 공간으로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전면에 툇칸을 두어 마루와 방을 연결시켰으며 좌 툇간 뒤쪽으로는 온돌방과 마루방 2칸을 수직으로 연결시켰으나 온돌방과 마루방은 독립성을 주고 있다.

배향인물은 운계(雲溪) 김주(金柱, 1612 광해군4∼1678 숙종4)이다.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1593∼1647)의 막내 아들로 학행이 높았고 유고(遺稿)가 있다.

두 건물 모두 1990년 8월 7일 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종손인 김병돈(金炳暾)씨가 관리하고 있다.

 

 

 학문과 구휼(救恤), 숭선(崇先) 사업으로 큰 족적을 남긴 김용희 선생의 모계재(慕溪齋)

 

모계재

1.소재지: 화양읍 토평리 백곡마을 이곳은 만석지기 거부였던

 

2.사랑채

 이곳은 모계(慕溪) 김용희(金容禧, 1862∼1942) 선생의 사랑채였는데 지금은 터만 있을 뿐 건물은 없다. 그런데도 여기를 찾은 것은 학문과 구휼(救恤) 숭선(崇先) 사업으로 큰 족적을 남긴 선생의 위대한 체취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모계 김용희 선생

  3. 모계 김용희

  공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선생의 14세손으로,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지낸 백헌(栢軒) 김병두(金炳斗)의 다섯 아들 중 차남이다. 퇴계 학맥을 이은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의 문인으로 학문에 매진하는 한편 윤산(潤産)에도 크게 힘써 선친이 물려준 30 마지기 정도의 재산을 당대에 만석 재산으로 일구어낸 입지적 인물이다. 관직은 김수로왕 (崇善殿) 참봉(參奉)과 고종 국상 때 차비관(差備官)을 역임했다. 만년에는 도산, 병산, 서악, 자계 등 여러 서원에서 원장을 지냈다.

  공은 평소 근검절약하여 재산을 모으되 부자(富者)는 창고지기에 불과하니 항상 겸허한 마음으로 조상과 이웃을 위해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조로 살았다. 실제 당신께서 이런 삶을 살았다는 것은 곳곳의 수많은 사적비 및 기적비, 송덕비가 이를 말해준다.

 

4. 숭선사업

  단독 사비를 들여 창건, 중건, 중수한 숭선 사업만 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자계서원 복원, 함양 청계서원 창건, 김해 수로왕릉 내의 회로당 중수 및 전사청 건립, 경남 산청 양왕릉의 수정궁 건립, 전북 부안의 흥무왕 김유신의 영정각인 개암사 건립, 각북면 명대리 나복마을 분릉군 김서(金湑)와 절효 김극일(金克一) 묘재인 유연재(현, 모암재) 중수 및 하당 건립, 이서면 수야리의 탁영 산소 앞에 경모재(현, 영모재)를 창건하고 수야 산 110번지 22,800평을 매입 삼현파 종중에 기부했고 매전면 금곡리의 삼족당 김대유의 별서인 삼족대를 중수했다. 선친 백헌공을 위한 일취정 창건, 전북 남원 김대장(金大壯)과 김장(金鏘)의 묘재인 감모재(感慕齋) 창건하고 위토답 600평 봉정, 토평리 백동사(栢洞祠)를 중건, 백곡 탁영 종택의 묘우(廟宇)를 이건하고 정침(正寢)을 신축하는데 재정을 전담, 그 외도 많으며 외선조만 해도 유등리 이벽(李碧) 묘소의 상석을 놓고 묘 위토답 400평 봉정하는 등 여러 건이 있다.

  뿐만아니라 ‘성리대전(性理大全), 입학도설(入學圖說)등을 목판으로 간행하고 선대의 문집을 간행하여 보급했다. 이 목판의 일부는 안동, 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있다. 구휼사업으로는 백동강당을 건립하여 의장(義庄)이라 이름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관혼상제 장소로 이용하게 하고 흉년이 들거나 춘궁기에는 양곡을 내어주고 소작료를 감면해주었다.

 5. 관재 김경곤

이러한 공의 정신은 후대까지 이어져 아들 관재(寬齋) 김경곤(金景坤)도 해방후 귀환 동포들을 위해 닌민 주택 100동을 건립했고 영남대 도서관에 황소 150 마리에 해당하는 장서를 희사했다. 그리고 마지막 사업으로 1947년 전 재산을 정리하여 아버지의 호로 이름을 붙인 모계중학교를 설립했다.

모계중고등학교

6) 2019년 모계 선생의 문집인 ‘모계집’을 증손인 김형수(현, 모계학원 이사장)가 발간했다.

‘모계’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바. 정자

 

 '강학계(講學契)' 행사와 '반보기' 풍속의 명소인 군자정(君子亭)

군자정

1.소재지: 화양읍 유등리

 

2. 모헌 이육

  이 정자를 만든 분은 고성이씨 청도 입향조인 모헌공(慕軒公) 이육(李育) 선생이다. 공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안기도 찰방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두 분의 형이 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에서 내려와 유등리에 은거하게 되었는데 그 때 원래 있던 못을 더 크게 파고 넓혀서 연꽃을 가득 심고 그 연지(蓮池) 속에 정자를 세워 학문에 힘쓰고 많은 현사(賢士)들과 교유 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군자정은 모헌의 호를 따서 일명 모헌정사(慕軒精舍)라고도 한다.

  ‘군자정’이란 이름은 중국 송나라 주돈이(周敦頤)가 연꽃이 진흙에서 나왔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꽃 중에 군자(君子)’라고 한 애련설(愛蓮說)에 기원한 것이다.

3. 중수

  이 정자는 조선 중종 때에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후 연못 속에 지은 집인지라 부식이 심하여 1915년에 중수하고    1970년에 중건했으며 2009년부터 2010년 12월에 걸쳐 도비와 군비를 들여 대대적인 중수를 했다. 원래 방 2칸 마루 10칸으로 되어 있던 것을 전면 마루바닥으로 바꾸었다.

 

4.강학계

  이곳은 시인묵객(詩人墨客)이 찾아와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청도팔경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전국 백승에 들어가는 곳으로 지금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919년부터 음력 8월 18일에는 전국의 많은 유림들이 모인 가운데 '군자정강학계(君子亭講學契)'를 열고 있는데 올해는 107주년 행사를 했다.

 

5. 연지의 크기

  유호연지(柳湖蓮池)’는 둘레가 600여 미터, 깊이 2미터, 넓이 21,000평에 이른다. 예로부터 유등 마을은 호복산(虎伏山)과 비학산(飛鶴山) 그리고 수려한 남산의 힘찬 맥이 닿아 있어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다. 또 이서국의 도읍지가 바로 옆에 있고 주변 산에 성곽이 축조되었으니 그 당시에도 주요한 거점이었던 것 같다.

 

6. 반보기 풍속

  이곳은 또 ‘반보기’란 풍속이 유명하다. ‘반보기’란 말 그대로 반만 본다고 생긴 말이다. 옛날에는 여인들이 시집을 가게 되면 '출가외인'이라 하여 친정 부모나 형제자매가 보고 싶어도 쉽게 친정 나들이를 할 수 없었다. 이런 환경 속에 여인들이 연꽃 구경을 하는 양 시집과 친정의 중간 지점인 유호연지에서 만난 '중로상봉(中路相逢)'이었는데 이는 옛날 여인들의 애환이 서린 그야말로 반만 보는 ‘반보기’ 만남이었다. 친정에 바로 가는 것이 아니고 반 정도에서 만나게 되니 반보기이며 다른 가족은 만나지 못하고 어머니만 만나니 반보기가 되며 끝내 눈물이 앞을 가려 어머니 얼굴도 반밖에 보이지 않으니 반보기였던 것이다.

 

 

 

〇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선생이 후학을 교육했던 삼족대(三足臺)

 

삼족대

 1.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우연(愚淵) 언덕 위에 동창천을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는 한국 100대 별장의 하나이다.

 

2. 연혁

  이 정자는 1519년(중종 14)에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1479〜1552) 선생이 후진을 교육하기 위해 건립하였고 공의 호를 따라 삼족대라 불렀으며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71호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사방에 토담을 쌓고 일각문을 두어 그 안에 정자를 배치했다. 대청 벽에는 1918년에 중수를 맡았던 모계(慕溪) 김용희(金容禧)가 쓴 ‘삼족대중수기(三足臺重修記)’,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짓고 김희연(金熙淵)이 쓴 ‘삼족당서(三足堂序)’ 후손 김용정(金容正) 등이 쓴 ‘삼족대운(三足臺韻)’ 등 여러 편이 편액 되어 걸려 있다. 한 단 낮은 곳에 ‘삼족당 김 선생 신도비(三足堂金先生神道碑)’가 있으며 그 앞에는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볼 수 있는 누각도 있다.

 

3.삼족당 김대유  

  삼족당 김대유 선생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직제학 동창공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고,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맏조카이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으로 1507년(중종 2) 정시(庭試)에 장원 급제한 이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정언(正言), 칠원 현감 등을 지냈다. 기묘사화(己卯史禍) 이후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돌아와 은거하며 자호(自號)를 “계산(溪山)이 족(足)하고, 풍월(風月)이 족(足)하고, 음아(吟哦)가 족(足)하다”에서 삼족(三足)을 취해서 삼족당(三足堂)이라 했다.

  또 공은 일찍이 1518년(중종 13)에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과 더불어 곰티재 동쪽 지역 주민들의 조세(租稅)에 대한 편의와 천재(天災)에 대비한 빈민 구호 기관의 성격을 띤 창고 즉 사창(社倉)을 매전면 동산리에 설치하여 군수와 향민(鄕民)들이 높은 경륜과 백성을 위하는 위민(爲民) 정신에 우러러 받들어 흠모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曹植)과 도의심교(道義深交)를 하였으며 삼족당 사후에 묘갈명(墓碣銘)을 썼다. “공과 같은 분은 재주가 세상을 덮을 만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운문(雲門)의 골짜기를 맡고 있다가 지금은 세상을 떠났으니, 아! 애석하다.”고 하였다.

증직(贈職)은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이다. 현량과(賢良科)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譜)』, 『삼족당 유고(三足堂 遺稿)』가 있다.

금천면 신지리 선암서원(仙巖書院)과 눌연(訥淵) 정민도(丁敏道)가 창건한 우연서원(愚淵書院)에 향사되었으며 현재는 이서면 서원리 자계서원(紫溪書院)에 배향되고 있다.

 

4. 유현재

  삼족대 밑 금곡마을, 삼족당 묘소 앞에 삼족당의 묘재인 유현재(惟賢齋)가 있다. ‘자은문(自隱門)’현판이 있는 솟을대문에 팔작지붕 5칸의 웅장한 재사로 1998년에 지었다. 대청에 이동영(李東英)이 근찬하고 방후손 김종쾌(金鍾快)가 쓴 ‘유현재기’가 걸려 있다.

유현재

 

박시묵(朴時黙)선생이 지은 운강고택의 별당인 만화정(萬和亭)

 

만화정

1. 소재지: 금천면 신지리, 동창천(東倉川)을 바라보며 서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2. 연혁

  이 정자는 이곳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운강고택의 별당으로 운강고택을 열었던 성경당(誠敬堂) 박정주(朴廷周)의 아들인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黙, 1814∼1879, 증 통정대부, 좌승지)이 1856년(철종 7) 건립하여 강론하던 곳으로 중요민속문화재 106호(1979년 지정)이다.

 

3.명칭

  만화정의 명칭은 이곳 들녘의 이름이 만화평(萬花平)인데, 박시묵 선생은 정자가 만화평을 굽어보는 점을 감안하여 ‘화(花)’를 ‘화(和)’자로 바꾸어 만화정(萬和亭)이라 이름 지었다. 중용(中庸)에 ‘중(中)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和)는 천하에 통용되는 도(道)’라고 했는데 이 뜻을 원용하여 중화(中和)의 정신에 근본을 두고자 했던 것이다.

 

4.건물

  만화정의 정문(正門)인 ‘유도문(由道門)’ 역시 ‘도(道)를 근본(根本)으로 한다.’는 뜻인데 박시묵의 아들 박재형(朴在馨)이 지은 ‘유도문 중수기(由道門 重修記)’에 설명되어 있다.

일각 대문인 ‘유도문’을 들어서면 높은 축대 위에 ‘ㄱ’자형의 정자가 배치되어 있다.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ㄱ’자형 건물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온돌방 2칸을, 좌측에는 온돌방 1칸을 연접시켰는데, 좌측 온돌방의 전면으로는 헌함이 있는 누마루 2칸을 달아내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마루는 정자의 방과 앞뒤로 통하는 통로이다. 처마를 받치는 활주가 보통 4개인데 누마루를 지탱하기 위해 하나를 더 둬 모두 5개의 활주를 두었다.

 

5.편액

  건물 정면에 정자의 이름인 「만화정(萬和亭)」 현판이 걸려 있다. 또 만화정의 들보에는 25점의 편액들이 걸려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꽃이나 새, 나무들의 그림을 넣어서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주옹만영(主翁謾詠)’ 편액은 박시묵이 지은 시(詩)를 새긴 것이다. 또 ‘만화정 중수 소지(萬和亭 重修 小識)’는 박시묵의 증손자인 박순병(朴淳炳이 1905년 만화정을 중수한 후에 그 경과를 1923년 9월에 기록한 것이다.

  만화정에 걸려 있는 현판들 가운데에는 당대의 석학들로 이름난 만귀(晩歸) 이주현(李周賢),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성재(性齋) 허전(許傳) 등의 기문(記文)이며 청도 군수들의 시판(詩板)도 있다.

동창천이 내려다 보이는 헌함

6. 자연 친화

  만화정은 정자 주변의 바위와 나무를 훼손하지 않고 자연을 그대로 살려 지은 자연친화적 정자로 시원한 그늘이 일품인 떡버드나무 숲이 운치를 더한다. 정자 뒤편에 세심정(洗心亭)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주변 바위에 여러 글귀들만 남아 있다.

 

7.이승만

  특히 만화정은 6.25전쟁 때 피란민 수십만 명이 동창천에 몰려 왔을 때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청도를 방문했다가 하룻밤 묵어 간 곳이기도 하다.

 

 

 청도 유림들이 풍월(風月)을 읊던 선유지(仙遊地)인 산수정(山水亭)

 

산수정
용항

 

1.소재지: 화양읍 동천리 

 

2. 창건과 재건

  이 정자는 1893년(고종 30) 단오날에 소강(小岡) 최익주(崔翼周) 선생이 청도의 진산인 화산(남산) 옥정동 계곡에 창건하여 청도 유림들이 모여 풍월을 읊던 선유지(仙遊地)였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쇠락하여 무너진 채 복원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1959년 최덕수(崔德壽), 박도야(朴道也)가 중심이 된 화양보승회(華陽保勝會)가 청도 지역 선조들의 풍류를 잇고자 복원을 했다. 그러나 장소는 동천리에서 교촌리 청도향교 뒤편에 있는 화강지 언덕으로 옮겼고 이름도 ‘화악루(華岳樓)’라 하였다. 산수정의 유지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옛 정자의 목재를 일부 활용했다고 최덕수의 아들인 의식이 전했다. 그 뒤 소유자인 의식이 관리하면서 한차례 중수했고 2006년에는 청도군에 기부하여 군민의 재산으로 남게 되었다. 현재 화산 본래 터에 자리 잡고 있는 이 ‘山水亭’은 2011년 청도군(당시 군수 李重根)에서 새로 지은 것이다.

 

3.최익주

  처음 산수정을 지은 최익주 공은 각남면 일곡리 출생으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화강(華岡) 학승(鶴昇)의 둘째 아들이다. 1882년(고종 19)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나서지 않고 아버지의 호에 이어 소강(小岡)이라 하고 초야에 묻혀 지내는 사람이란 뜻으로 ‘화악일민(華岳逸民)’이라고 부르며 산수정에서 시를 읊으며 지냈다.

 

4. 화산동문

  남산’의 입구 바위에 ‘화산동문(華山洞門)’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화산 골짜기 입구란 뜻이다. 이는 ‘남산’의 원래 이름이 ‘화산’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화산이란 이름은 중국 서안에 신선이 사는 산으로 알려진 화산의 이름을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화산에도 그 도교적 신선의 세계를 꿈꾸며 우리 선인들이 풍류를 즐기며 경치 좋은 계곡의 바위에 이름을 붙이기도하고 시를 새기기도 했다.

 

5. 화산 계곡의 여러 이름들

  물 밑의 흰 돌이 보석처럼 반짝인다는 백석뢰(白石瀨), 하늘의 구름이 맑은 물에 비치어 마치 수를 놓은 모습인 운금천(雲錦川), 11수의 시를 새겨놓은 취암(醉巖)과 봉화취암(奉和醉巖), “워이〜 워이〜 양들아 어서 일어나라” 하니 이내 흰 돌들이 모두 양으로 변했다는 질양석(叱羊石), 떨어지는 물방울이 마치 옥구슬같다는 만옥대(萬玉臺), 물이 용의 목덜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고 붙여진 용항(龍吭), 거울같이 맑은 못인 일감당(一鑑塘), 신선이 마시는 술을 의미하는 유하담(流霞潭), 당나라 문장가 한유의 ‘태화 산봉우리 옥정의 연꽃’이란 구절에서 따온, 옥정암(玉井巖), 중국 화산의 남쪽 봉우리 ‘낙안봉’에서 따온 낙안봉(落雁峯), 송나라 유학자 주희의 계속해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져 있음을 말한 “막언차지무가경莫言此地無佳景 자시유인불상래(自是游人不上來)- 이곳에 아름다운 경치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다만 유람객이 올라오지 않을 뿐이다”, 황금빛의 아름답고 고운 모래가 깔려있는 관세음보살의 거처지 금사계(金沙界), 계곡 가장 위에 있으며 신선을 사모한다는 뜻인 모선동(慕仙洞)이 그것인데 아무튼 도교적인 것이 많다.

 

6. 신선세계

  최익주 공의 ‘산수정’ 시 구절인 “春來莫放桃花水 봄이 왔다고 함부로 복숭아꽃 개울에 떠내려 보내지 말게/ 恐被漁郞世外傳 어부에 의해 신선세계 알려질까 두렵다네” 도연명(陶淵明)의 ‘桃花源記’가 연상되는 시이다. ‘산수정에 답함’이란 시제로 몇 자 적어 올렸다.

 

 

 

. 서당

 

〇복암(復庵) 장화식(蔣華植)선생이 후학을 교육하던 오천서당(吾川書堂)

오천서당

1. 소재지: 화양읍 유등리(오부실 마을).

 

2. 삼학사

조선말기 청도의 삼학사는 복암 장화식, 순재 김재화, 덕천 성기운이다. 이곳은 그 중에 한 분인 복암(復庵) 장화식(蔣華植, 1871∼1947) 선생이 후학을 교육하던 곳이다.

 

3.복암 장화식

  복암의 본관은 아산이며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비롯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년간 연구했고 심성이기론(心性理氣論)과 호락논변(湖洛論辨: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등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한 바 있다. 『췌옹선생문집(贅翁先生文集)』이 전한다.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했으며 돌아가셨을 때 많은 유림들의 애도 속에 유림회장(儒林會葬)을 치렀다.

서당전경(청도박물관 모형물)

4. 연혁

  원래 오천서당은 화양읍 신봉리에 있었으나 1960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대청벽에는 순재(醇齋) 김재화(金在華)와 중재(重齋) 김황(金榥)이 각각 찬기(撰記)한 2개의 오천서당기, 김희연이 쓴 오천서당 상량문, 아들인 겸산 병기의 ‘이이재기(二以齋記)’, 둘째 아들 병구와 문하생 서학균이 각각 쓴 ‘당성유감(堂成有感)’ 그리고 ‘二以齋’ 편액 등이 걸려있다.

 

 5.오천서당 소장 전적

  이병훈이 정리한 오천서당소장전적(吾川書堂所藏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은 다음과 같다. 소장된 전적은 총 213종 1,118책이다. 판본별로 분류하면 목판본 98종 657책, 석인본 37종 146책, 필사본 50종 60책, 목활자본 4종 4책, 신연활자본 22종 238책, 영인본 1종 12책, 탁본 1종 1점이다.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목판본은 경서(經書)와 성리서(性理書), 문집이 대부분인데, 특히 문집은 18세기 이전에 살았던 인물 즉, 성삼문, 김일손, 이언적, 이황, 조식, 송준길, 이상정, 홍여하 등 선현들의 문집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석인본(石印本)은 19세기 말 이래로 많이 간행되었는데 『율곡집(栗谷集)』과 같이 중간(重刊)한 경우도 있다. 필사본은 도기(到記)와 만제문(輓祭文) 등이다. 목활자본은 구양수, 소식의 글을 발췌하여 간행한 『구소수간초선(歐蘇手柬抄選)』[발문 예대희(芮大僖), 1908], 삼족당 김대유의 문집인 『삼족당 선생 일고(三足堂先生逸稿)』[발문 김재곤(金載坤), 1963] 등이다.

신연활자본(新鉛活字本)은 1932년에 간행된 『조선 환여 승람(朝鮮寰輿勝覽)』, 김도화(金道和)의 문집의 별집인 『탁암 선생 별집(拓庵先生別集)』[발문 장헌기(蔣憲基), 1956], 장화식의 문집인 『췌옹속고(贅翁續稿)』[발문 이우섭(李祐燮), 1968; 간행 1969] 등 주로 20세기 초반 이후로 간행된 문집들이 대부분이다.

영인본은 남공철(南公轍)의 문집인 『금릉집(金陵集)』이 있다. 탁본은 『우전구루비(禹篆岣嶁碑)』[가로 29.8㎝, 세로 49㎝] 1점이 있다. 지금은 청도박물관에 옮겨서 보관하고 있다.

 

 만우(晩愚) 박정형(朴廷瀅) 선생이 후학을 길러내던 일신재(日新齋)

일신재

1.소재지:  운문면 정상리(질머리 마을)

 

2. 배향 인물

  만우(晩愚) 박정형(朴廷瀅, 1876~1935)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밀성이며 소요당 박하담의 후예이다. 공은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와 향산 이만도에게 사사(師事)하였다. 두 분 스승 모두 안동 출신으로 당대의 큰 학자이며 의병장을 지낸 분이다. 향산 이만도의 저서인 ‘향산집’에 “박 수재(朴秀才) 정형(廷瀅)이 멀리서 일월산(日月山)으로 나를 찾아와 배우고자 하였으나 그 뜻이 부끄럽게도 나는 아픈 몸이라 그의 바람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대학(大學) 경 1장’을 써서 준다. 이것은 나의 학문의 큰 표준이니, 유교가 황폐해지는 날이 오더라도 이것으로 말미암아 학문을 굳건히 세운다면 덕으로 들어가는 문로(門路)에 차질이 생길 염려는 없을 것이다. 부디 노력하라.”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향산의 격려를 받은 박정형은 청도로 돌아온 뒤 대학경 1장의 ‘큰 배움의 길은 먼저 밝은 덕을 밝히는데 있고 다음은 그 밝아진 마음으로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데 있으며 그 결과 지극히 좋은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는 내용을 늘 새기며 독실하게 학문에 매진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 유학의 큰 경륜을 쌓았다.

 

3.기금을 모은 제자들

  이러한 공의 고매한 명성이 널리 퍼져나가자 가까이는 물론 경주, 경산, 영천 등지에서도 많은 제자들이 찾아왔다. 그런데 제자 수가 점차 늘어나 80 여명에까지 이르자 장소가 협소하여 도저히 수용하지 못할 형편이 되었고 이에 제자들이 계를 모아 기금을 마련하는 등 적극 동참하여 ‘일신재’가 창건되었다.

  4. 일신재기

  이 일신재 창건에 즈음하여 공의 또 한 분 스승인 김도화는 직접 ‘日新齋記’를 써주었는데 은나라 시조인 성탕(成湯) 임금의 목욕하는 그릇에 새겨져 있는 ‘구일신(苟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을 상기하며 날로 새롭게 일취월장하기를 빌었다. 이 기문을 쓴 때가 1912년이다.

 

5.중수

  그 후 ‘일신재’는 1984년에 새로 지었고 1994년 및 2016년에 대문채를 앞으로 물리는 등 크게 중수했다. 이곳에는 ‘일신재기’만 해도 셋이고, ‘일신재 중건기’ 하나 그리고 ‘삼체정기’까지 있다. 곁들여 ‘三棣亭’이란 현판도 같이 걸려 있는데 이 ‘삼체정’은 만우공 삼형제의 돈독한 효심과 우애를 기리는 것이다. 공은 상을 당했을 때 시묘 3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행한 보기 드문 효자이었다.

 

6. 벽에 걸린 시

  또 율재(慄齋) 이한걸(李漢杰)이 1926년 11월에 공을 찾아와 시를 남겼는데 이도 벽에 걸려 있다. 요약하면 ‘북풍이 나의 소매를 스치는데 남쪽으로 구룡산에 와서 지란(芝蘭)의 집에서 이별한 지 8년 만에 얼굴을 대했네, 언제 다시 자리를 만들어 함께 거문고를 다스릴고”하는 절절한 내용이다. 공의 저서로 ‘만우집(晩愚集)’ 2책이 있다.

 

 

〇호화리 학동(學童)들이 글을 읽으며 뜻을 세우던 미산재(嵋山齋)

 

미산재

1. 소재지: 매전면 호화리

 

2.학동 교육

  이곳은 1827년(순조27)에 모헌 이육의 9세손인 충의위 이동윤(李東潤), 동주(東柱), 동상(東尙), 동연(東淵)이 마을 학동(學童)들을 교육하기 위해 지은 서당이다.

 

3. 중건

  이 서당은 100여 년이 지난 뒤 페허되어 맞배지붕 정면 5칸으로 새로 중건했으며 이때 후대인 정우(庭宇), 진기(震基), 수기(壽基), 홍기(弘基)가 칠언율시 중건운(重建韻)을 지었다. 정우는 “새 집도 옛날 그대로 ‘미산’이라 불렀으며 건축함은 겨우 두 해 사이에 마쳤다.”고 했다. 그러나 진기는 “아! 중건의 느림이여 10 년이라네” 했다. 이는 10년 동안 폐허 되어 있었고 다시 짓는 기간은 2년 걸렸음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중건운은 무인년(戊寅年), 즉 1938년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청도마을지(2000년)에는 1936년에 중건한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이는 착오일 수도 있고 아니면 1936년에 중건하고 2년 뒤에 중건운을 지었을 수도 있다. 재실의 기문 같은 것도 창건한 뒤에 지어서 거는 경우가 더러 있다.

  수기는 “둥글게 모여 책을 익히니 즐겁고 기쁜 얼굴이다.” 했고 홍기도 “아침 저녁으로 글씨를 쓰고 밭을 가니 우리 가문 점차 운수가 돌아온다”고 했다. 아무튼 이곳은 오랜 세월 동안 마을 및 문중 자녀들이 유학(儒學)을 익히는 서당 역할을 해왔지만 온명학원과 공립 매전 보통학교가 생기면서 신학문에 자리를 내준 것 같다.

4. 인걸 배출

  호화리 호방(好方) 마을은 30여호 정도의 작은 마을이지만 자미산(紫嵋山)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활처럼 휘어져 흐르는 냇물이 아름다워 인걸을 배출할 적지라고 한다.

 

5.맹호 출림 

  한편 이 마을은 ’맹호출림(猛虎出林)의 마을, 호계(虎溪)‘로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근래 전개된 ’창조적 마을 만들기‘ 일환으로 마을 담 벽면에 호랑이 출현 장면을 그리고 있다. 실제 이 마을에 효자 박윤손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6. 대 화재

 호화리에 큰 충격을 주었던 대화재 사건이 있다. 1933년 3월 21일, 아이들의 불장난으로 시작된 당시의 대화재는 40여 호에 90여 채의 집을 태우고 236명의 이재민이 발생할 정도로 마을을 초토화 시켰으니 동민 전체가 상심이 매우 컸고 생계에 큰 타격을 받은 사람도 생겼을 것이다.

 

7. 이정기이 마을 출신 이정기(李貞基)도 1935년 경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일본 굴지의 가토오화학회사 등 여러 계열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 그는 그 자신 어려운 시절을 생각하며 고향에 거금을 희사하여 호화리 일대 10개동 20개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게 했고 사라호 태풍에 무너진 제방을 복구했다. 온막리 명대에는 ’이정기 시혜비(李貞基施惠碑)‘가 있고 호화리 호방에는 ’이정기 호계제 의연 불망비(李貞基虎溪堤義捐不忘碑)‘가 있다.

 

 

〇문집 43권 22책을 남긴 큰 선비 인암(忍庵) 박효수(朴孝秀)선생의 척첨당(陟噡堂)

척첨당

 1.소재지: 이서면 신촌리, 이곳은 1972년, 인암선생이 돌아가신 아버지 자초(紫樵) 정곤(珽坤)이 거처하던 곳에 창건하여 멀리 묘소를 바라보며 그리워하던 곳이다.

 

2. 인암 박효수

  인암은 성암(省庵) 박수곤(朴守坤), 덕천(悳泉) 성기운(成璣運), 기호 학맥을 이은 극재(克齋) 송병관(宋炳瓘)에게 수학하였다. 일찍이 전라도 보성(寶城)에 있는 회봉(晦峯) 안규용(安圭容)의 죽곡정사(竹谷精舍)에서 선현(先賢) 문집의 판각(板刻)과 고서(古書)를 익히기도 했다.

  평생 소학(小學)을 학문하는 근본[根基]으로 삼아 몸가짐과 법도에 맞는 행동을 하였다. 학문과 덕행이 깊고 문장이 뛰어난 그는 여러 명사들과 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서면 학산리에 개설한 학음서사(鶴陰書社) 서당에서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3. 방대한 문집

  인암은 43권 22책이나 되는 방대한 문집을 남겼다.

인암집

문집에서 효제충신(孝悌忠信)과 궁리실천(窮理實踐)을 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하였는데 공은 이를 몸소 실천에 옮겼다.

 

4. 지극한 효심

  평소 효심이 지극한 당신은 학음서사에서 신촌리 본가까지 왕복 20여 리 길이었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버님께 문안 인사를 드렸으며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3년 상 내내 매일 빈소와 산소를 찾았다. 상을 마친 뒤에도 초하루와 보름에는 꼭 산소를 찾아 성묘했다.

 

5.애인 정신

  또 공의 글 중에 만사(輓詞)가 214편인데 평소 많은 분들과 교유하면서 예(禮)로 대하며 두터운 정의를 나누었고 사후에는 그분들의 삶을 기리며 명복을 빈 것이니, 공의 두터운 애인정신(愛人精神)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정신은 한방약국(韓方藥局)을 열어 인술(仁術)을 베풀던 일이며 여러 묘소에 남긴 묘갈명이나 각 문중의 재실 기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6. 유림장

  1996년 12월에 향년 91세로 작고하였는데 장례는 이듬해 1월에 유림장(儒林葬)으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 때 전국 각지에서 공을 추앙하는 수많은 유림과, 후학들이 직접 찾아와 조문을 했는데 만사가 115편, 제문이 52편이나 되었다. 이때 신문이나 방송사들도 다투어 올곧은 큰 선비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집중적으로 보도 한 바 있다.

 

7. 양정계

  공을 따르는 양정계(養正契) 계원들이 약 200여 명이며 『주역』의 「몽괘(蒙卦) 단(彖)」에 “어렸을 때에 바르게 교양됨이 성인의 공부이다(蒙以養正 聖功也).”라는 가르침을 깊이 새기며 모임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공은 ‘효제돈목 승선유후(孝悌敦睦 承先裕後 : 효도 우애하고 일가친척 간에 화목하며, 선조의 정신을 이어가고 후손을 넉넉하게 할 것)’라는 가훈(家訓)을 남겼는데 주손인 철규(전 성균관 부관장)를 비롯한 후손들이 그 뜻을 받들고 있다.

 

 

아. 기타

 

 함박김씨(咸博金氏) 시조, 자헌대부(資憲大夫) 김성인(金誠仁) 선생

1.함박 김씨 시조

  함박 김씨의 시조는 김성인(金誠仁) 선생이다. 공의 본명은 사여모(沙汝某)로 일본인 장수였지만 임진왜란 때 귀순하여 공을 세워 사성(賜姓) 김해김씨(金海金氏)를 받았는데 뒤에 후손들이 혈통이 다른 김해김씨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공이 정착했던 청도군 각남면 함박리(咸博里)를 관향(貫鄕)으로 한 것이다.

 

2. 귀순

  1592년(선조 25) 왜군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발발하여 조선을 침공했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부장으로 참전한 김성인[사여모(沙汝某)]은 역시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인 김충선(金忠善)[일본 이름 사야가(沙也可)]와 함께 4월 13일에 동래성에 도착한 뒤 4월 20일 경 인의(仁義)의 나라인 조선을 해칠 수 없어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귀순했다. 그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 대첩을 이끌었던 김시민(金時敏) 휘하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웠다.

 

3.  여진족 물리침

그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평정된 뒤에도 북방 경비 수비를 자원하여 변방의 도적인 여진족(女眞族)을 물리쳤다. 이에 도원수 강홍립이 공의 충성심을 조정에 아뢰니 1620년(광해 12)에 인견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당상관)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했다.

 

4. 김씨 사성

그 이듬해에도 변방을 튼튼히 한 공의 충성심을 체찰사(體察使) 박승종이 조정에 보고하니 광해 임금이 후원에 큰 잔치를 베풀고 그 공로를 포상하여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함과 동시에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며 김해김씨로 사성하고 이름을 성인(誠仁)이라 했다. 그리고 교지에 ‘향화인에게 상으로 관직을 내린다’는 뜻으로 향화상직(向化賞職), 네 글자를 쓰고 조세와 군역을 면제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또 공의 아들 귀성(貴成) 역시 매우 용맹하여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며 많젯은 공을 세웠으므로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제수하였다.

 5. 자헌 대부 제수

  1622년(광해 14)에도 북방 전투에서 공을 많이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당상관, 현, 장관급)를 제수하고 특별히 교지에 ‘스스로 자원하여 변방에 나아감에 그 마음을 아름답게 여겨 한 품계 관직을 올려 제수한다.

自願仍防 其心可嘉 各陞一秩 事受 敎’를 적어 치하했다.

자헌대부 교지

6. 아들과 함께 활약

  아들 귀성 역시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호분위(虎賁衛) 상호군(上護軍)을 제수했다. 1624년(인조2), 인조 반정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충선과 함께 이괄의 수하로 선봉에 섰던 항왜 부장 서아지를 밀양에서 주살하였다. 1636(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조정의 부름이 없었으나 아들 귀성, 김충선 등과 상경하여 쌍령전투에서 호적(胡賊)을 물리쳤다.

7. 모하당과의 끈끈한 우정

  김성인과 모하당 김충선(慕夏堂 金忠善, 1571년〜1642, 正憲大夫, 녹동서원 배향)은 같이 귀순한 이래 왜적과 호적을 물리치고 북방경비에 자원하고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등 모든 일에 동지로서 같이 활동했다. 그리고 만년도 아주 가까운 거리인 함박(김성인), 가창면 우록(김충선)에 살면서 끝까지 우의를 나누었던 것 같다. ‘모하당 문집’에 ‘김성인 행록’이 잘 기록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중경 선생의 ‘오산지(鰲山志)’ 산실인 수헌정사(壽軒精舍)

1. 소재지: 이서면 수야리(행정마을)

 

2. 수헌 이중경

  수헌 이중경(李重慶, 1599〜1678)은 이곳에서 청도 최초의 사찬(私撰) 읍지(邑誌)인 오산지(鰲山志)를 편찬했다. 공의 가문인 전의(全義) 이씨들이 수야리에 정착한 것은 공의 증조부인 흥지(興智)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의 사위가 되면서 경기도 금천에서 입청도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 두암(竇岩) 기옥(璣玉)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과 한강(寒岡) 정구(鄭逑)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두암은 39세에 작고했지만 유림들이 높은 문장과 기개를 기려 ‘도림서원(道林書院)’을 지어 배향했다.

 

3. 오대 봉서정

  6세에 아버지를 잃은 수헌은 외가인 예천 고평리에서 살다가 20세에 청도로 돌아와 청도 원정리 죽산인 참봉 박형(朴炯)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뒤 미리 한벽당(閑僻堂)이라고 새겨둔 오대(梧臺)에 49세에 봉서정(鳳棲亭)을 짓고 이듬해부터 66세가 될 때까지 머물었다. 현재 이곳은 밀양군 상동면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청도 땅이었다. 공은 이곳에서 자연과 벗하며 학문과 문학 활동에 전념하며 연시조인 오대어부가(梧臺漁父歌) 20수를 창작하고 그간의 시문을 수습하여 ‘잡훼원집(雜卉園集)’을 남겼다.

오대 어부가

4. 고향 마을로 귀향, 오산지 편찬

  그 뒤 67세가 되던 해 1665(현종 6)에 고향 수야리에 수헌정사를 짓고 80세인 1678년에 작고하기까지 13년간 만년을 보내면서 ‘오산지’를 완성했다. 그러나 ‘오산지’ 편찬에 착수를 한 것은 그보다 40여년 전인 1627년 군수 류진(柳袗)의 계획 아래 군지(郡誌) 만드는 일을 맡으면서 사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류진이 파직되어 떠나면서 결실을 보지 못하다가 75세 때인 1673년(현종 14)에 청도군수 권일(權佾)의 부탁으로 종전의 기록물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그는 오산지 서문에서 “내가 삼가 옛날에 들은 바를 취하고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모아 사실에 부합되는 것은 따르고 잘못된 부분은 없애서 한 권의 책을 만들어 군수께 드렸다. 만약 누군가 우리 고을 고금의 자취를 알고자 한다면 이 책을 펼치는 순간 관아에 앉아서도 온 고을의 사정을 훤히 볼수 있으며 오늘날에 살면서도 앞 시대를 두루 알 수 있을 것이니 아마도 백성을 다스리고 군을 다스리는 일에 보탬이 될 것이다” 라고 적어두었다.

  오산지에는 ‘산천형세총론(山川形勢總論)’에 이어 역사, 문화, 인물, 토산물 등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특히 2003년도에는 청도문화원에서 이상동(李相瞳)이 역주(譯註)한 ’역주 오산지‘를 발간하여 수헌의 말처럼 그 당시의 사정을 쉽게 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5. 만세 불파지기 수야

  수헌은 도선답산기(道詵踏山記)를를 원용하여 “수야리는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국으로 만세가 지나도 깨어지지 않는 땅으로 두 물줄기 사이에 명당이 있다” 고 했다. 수야촌은 지금의 수야2리이니 이곳에 정사를 짓고 ’오산지‘ 등을 편찬하며 장선고개 너머 선대의 묘소도 돌봤을 것 같다.

 

 

〇길손들의 안전과 소망을 빌던 팔조령 신당(八助嶺神堂)

 

 

신장상

1. 소재지::이서면 팔조령(398m) 길목 팔조지(八助池) 아래에 있다.

 

2. 유래 

  이곳은 팔조리의 동신(洞神)을 모신 제당(祭堂)이기도 하려니와 고개를 넘는 길손들이 안전과 소망을 비는 곳이었다.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80년(고종 17)에 중수를 했는데 그 ‘팔조령신당중수상량문(八助嶺神堂重修上梁文)’이 전해오고 있으니 처음 지은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것으로 짐작된다.

 

3. 이전 및 기능 쇠퇴

  원래 이 신당은 고갯마루에 있었으나 1950년대에 현재의 장소로 옮겨왔다고 한다. 신당 ‘헌성록(獻誠錄)’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올린 것으로 보아 팔조리 동민은 물론 이웃이나 길손들까지 매우 관심을 가지고 조성했던 것 같다. 토석담장에 둘러싸인 신당 중앙에는 칼을 든 신장상(神將像)을 모셨는데 길손들은 그 앞에서 축원문을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1960년대에 고개에 차도가 생기고 근래에는 터널까지 뚫려 걸어서 넘는 사람이 없고 보니 점차 그 기능을 잃고 말았다.

청도문화연구회 팔조령 옛길 탐방(2025년 2월 25일)

4. 관문 그리고 방어선

  팔조령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과 청도군 이서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며 이곳은 문경 새재 및 작원관(밀양의 삼랑진과 양산 사이에 있는 낙동강을 낀 산기슭)과 더불어 동래에서 서울을 잇는 영남대로 중에서 험하다고 소문난 3대 관문 중 하나이다.

  아무튼 팔조령은 사람과 물자를 운반하는 주요한 통행로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 요충 역할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영남대로 여덟 개 방어선 중 팔조령과 성현을 연결한 제3 방어선이기도 했다.

 

5. 청도 기독교 100주년 기념비

  또 이 고개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였던 배위량(裵偉良, Rev. William M.Baird) 목사가 1893년 4월 17일 부산을 출발 4월 22일 청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이 고개를 지나가기도 했다. 이를 기념하는 ‘청도 기독교 100주년 기념비’가 고개 길섶에 세워져 있다.

청도문화 연구회 팔조령 옛길 탐방 기념 촬영

6. 봉수대

  그리고 정상에는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던 봉수대(烽燧臺)도 있었다. 청도 남산의 봉수를 받아서 대구 법이산(法耳山)으로 전달한 것이다.

 

7.팔조의 어원

  험준한 이 고개는 원래 도둑이 많이 붙어 여덟 명이 조를 짜야만 넘을 수 있다고 ‘팔조령(八助嶺)’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八鳥嶺’으로 표기한 적도 있다. 이는 우리말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팔조도 원래 ‘벌린 사이‘인데 축약되어 ’벌새‘ 가 되었으며 ’벌‘은 다시 느낌이 분명한 양성모음 ’발‘로 바뀌었다가 또 좀더 높고 험한 산의 의미를 주기 위해 거센소리 ’팔‘로 바뀐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〇마치면서

  재실 및 서원은 과거의 흔적이 아니고 오늘도 진행되어야 할 

우리의 정신적 지주입니다. 기둥 하나 서까래 하나에도 조상들의 숨결이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잘 지켜서 계승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고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강의를 들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