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지역 서원 재실의 설립과 활동
박영환
고향
강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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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지역 서원, 재실의 설립 및 활동
Ⅰ.유래 및 기능
가. 향교(鄕校)
조선시대 각 군현(郡縣)에 설치된 관립(官立) 유학 교육기관으로,
유생(儒生)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고, 공자와 성현에게 제사를 지냈다.
〇 설립과 역사
기원: 고려시대에도 존재, 조선 태조 때 체계화
설치: 전국 모든 고을(부·목·군·현)에 1개씩 설치
성격: 국가가 운영하는 공교육 기관이었으나 조선 말기 교육 제도 개편등으로로 기능 약화
〇주요 기능
교육: 8~20세의 유생 대상, 양반 자제 중심이나 일부 중인·서민 자제도 가능했으며 사서오경, 예악(禮樂), 한문, 글짓기 등을 교육함, 성적 우수자는 소과(생원·진사시) 응시 자격 부여, 지방 백성에게 유교 도덕 확산
제향: 공자와 성현들에 대한 제사 (매년 2회: 춘추 석전대제)
〇건물
대성전(大成殿): 공자와 공문십철(제자들)을 모신 사당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동무 –공자의 제자들 서무 –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공간
廡(무): 처마가 있는 긴 건물이란 뜻
전사청(典祀廳): 제사 준비를 하는 공간
대성전(제향 공간)과 명륜당(교육 공간)은 향교의 핵심이며, 엄격히 구분되어 있음.
나. 서원(書院)
조선시대에 유학 교육과 선현 제사를 함께 담당했던 사립 교육기관. 단순한 학교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유학적 이념의 중심지, 지방 사림의 활동 거점, 향촌 자치와 정치의 기반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〇유래와 역사
기원: 중국 송나라의 서원 제도를 본받음
최초 서원: 1543년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 (후에 "소수서원")
국가 공인: 1550년 명종 때 소수서원에 ‘사액(賜額)’
전성기: 16세기~17세기 사림 세력이 확대되면서 전국에 확산
쇠락: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대부분 철폐됨
〇건물: 명륜당(明倫堂):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
동재·서재: 유생들의 기숙사
〇 사액서원(賜額書院)
국왕이 이름을 하사한 서원 → 국가 공인의 서원
세금 면제, 노비 소유 등 특권 부여
다. 재실(齋室)
조상의 산소 근처나 마을에 지어 제사(祭祀) 때 묵으며 제례 준비를 하거나, 후손들이 모여 선조를 기리는 공간이다.
齋(재)는 재계하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다, 室(실): 방, 건물을 말하며 “재계(齋戒)하는 방”, 즉 제사를 앞두고 몸가짐을 정갈히 하며 머무는 집을 뜻함
Ⅱ.청도의 서원 및 재실, 사당, 누각
1. 현황
| 읍면 | 서원 | 재실 | 정자 및 누각 | 서당 | 사당 | 계 | ||||||||
| 청도읍 | 1 | 21 | 22 | |||||||||||
| 화양읍 | 11 | 4 | 1 | 2 | 18 | |||||||||
| 각남면 | 1 | 20 | 21 | |||||||||||
| 풍각면 | 3 | 35 | 1 | 39 | ||||||||||
| 각북면 | 2 | 10 | 1 | 13 | ||||||||||
| 이서면 | 5 | 68 | 2 | 1 | 76 | |||||||||
| 운문면 | 17 | 2 | 1 | 20 | ||||||||||
| 금천면 | 4 | 23 | 2 | 29 | ||||||||||
| 매전면 | 53 | 3 | 1 | 57 | ||||||||||
| 계 | 16 | 258 | 14 | 2 | 5 | 295 | ||||||||
| 연대 | 1500 | 1600 | 1700 | 1800 | 1901-1944 | 1945-1999 | 2000 | 계 | ||||||
| 수 | 6 | 8 | 11 | 46 | 82 | 130 | 12 | 295 | ||||||
1)면 별로는 이서면(26%)과 매전면(19%)에 많이 있다. 동리 별로는 각남에 신당과 옥산, 각북에 남산, 명대 금천에 신지와 김전, 임당 매전에 관하, 남양, 온막, 하평 운문에 공암 이서에 수야, 대곡, 대전, 신촌, 학산, 흥선리에 5곳 이상이 있다.
2)전체 67 성씨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 중 밀성 박씨 74, 고성 이씨 43, 김해 김씨 22, 의흥 예씨 12, 경주 이씨 10 순으로 많으며 경주 김씨 9, 전주 이씨 8, 경주 최씨 8, 재령 이씨 8 곳이 있고 동래 정씨, 파평 윤씨, 평택 임씨, 아산 장씨 는 5곳이 있다.
3)서원은 1518년 자계서원(紫溪書院)을 시작으로 1995년에 창건한 운천서원(雲泉書院)까지 총 16 서원이 있으며 대부분 재실 및 사당에서 출발했다가 서원으로 승호 개편되었다. 조선 고종 이전의 서원은 철폐령에 의해 모두 훼철되었다가 그 이후 새로 복원한 것이다.
4)재실은 1541년(중종 36) 훈령서당, 1590년(선조 23) 용강재 창건으로부터 2013년에 신축된 현암재에 이르기까지 258 곳이 있다. 그 중에 1800년대 까지 창건 된 곳은 71 곳으로 24%에 불과하며 나머지 224곳(76%)은 1900년 이후에 창건 된 것이다.
〇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상 현양 사업에 뛰어들던 시기이다. 그에 따라 향교의 향안집도 늘어나면서 재실이 많이 늘어났다. 문중과 문중의 경쟁(향전), 또 문중내의 경쟁이 많았다.
〇 청도는 토성 세력이 침체된 반면 이주해온 가문들이 재지사족으로 성장하였다.
5)2000년대 이후에 13곳이 폐쇄되었는데 새로 창건된 재사도 12곳이 된다.
6) 정자 및 누각은 삼족대(1519), 군자정(1550), 운수정(1577)에 이어 2014년에 복원한 탁영정에 이르기까지 14곳이 있다.
7)사당은 1670년에 지은 운계사를 비롯하여 5곳이 있는데 용헌 이원 종택 및 탁영종택은 불천위 사당이 있다.
8)건물구조: 서원은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5-7칸 정도의 강당이 있으며 대청이 가운데 있고 좌우에 방이 있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다. 대체로 강당 아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으며 강당 뒤에는 별도의 영역에 내삼문(內三門) 안에 사당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형식이다.
재실은 대문에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팔작지붕의 목조와가 4칸 또는 5칸으로 되어 있다. 대체로 좌우에 방이 있고 가운데 대청이 있는 ‘중당 협실형’이다. 마당 좌우에 하당과 관리사가 있다. 서원과 재실 공히 뒤에는 대나무를 심고 주변은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대청앞에 재사 이름 편액이 있고 대청벽에 ‘서원기’ 또는 ‘齋記’와 ‘上樑文’이 걸려 있다.
9)근래에는 국한문 혼용 ‘齋記’도 있으며 콘크리트 양옥 재실도 있다.
Ⅲ. 유형과 기능
가.청도 유림 정신의 표상(表象)인 청도 향교(淸道鄕校)
1. 소재지: 화양읍 교촌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7호
2. 역할: 제향과 유림들의 교육을 위해 세운 학교로 현재의 학제에 비유하면 서울의 성균관(成均館)이 국립 대학이라면 지방의 향교는 공립중등학교에 해당한다.
3. 연혁: 여덟 번이란 이전 끝에 1734년(영조 10)에 화양읍 교촌리에 정착했다.
〇 8회 중 사찰들을 활용했던 초창기 3회 이전은 장소와 연대를 알 수 없다.
〇 화양읍 고평리에 창건된 네 번째 장소는 1485년(성종 16)에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선생이 쓴 중수 기문에 60여년 전에 설립되었다고 했으니 환산하면 1424년경(세종 6)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향교도 하천을 건너 제물을 이동하는 중 사망 사고가 생기기도 하였다.
〇 1568년(선조 원년) 다섯 번째 장소인 화양읍 합천 2리로 옮겼다. 하지만 이곳 마저 동천이 자주 범람했다. 隆慶은 중국 명나라 목종 때의 연호(1567- 1572) 즉 목종 2년 1568년임
〇 여섯 번째 1626년(인조 4)에 오산 북쪽 산기슭으로 옮겼는데 수레와 말소리가 시끄러웠다. 다시 1684년(숙종 10) 일곱 번째 하천리로 옮겼지만 또 도로가 번잡하였다.
〇 드디어 여덟 번 만에 현재 자리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4. 건물: 향교의 건물 배치는 대성전(大成殿)과 강학하는 명륜당(明倫堂)이 앞뒤 일렬로 놓이는 것이 일반적이나 청도 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이 좌우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건물은 5칸의 대성전과 각 4칸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7칸 명륜당과 각 5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2층 누각으로 된 사락루(思樂樓)와 대성전 삼문(三門), 지인재(智仁齋)와 유림문화회관(儒林文化會館) 등이 있다.
5. 석전: 대성전 문묘(文廟) 석전(釋奠)은 년 2회(음력 2월과 8월 上丁日)에 행한다.
〇 5성(五聖)은 대성지성 문선왕 공자(大成至聖 文宣王 孔子), 복성공 안자(復聖公 顔子), 종성공 증자(宗聖公 曾子), 술성공 자사(述聖公 子思), 아성공 맹자(亞聖公 孟子)이며 송조 2현(宋朝 二賢)인 낙국공 정이천(洛國公 程伊川) 휘국공 주자(徽國公 朱子) 이다.
〇 동국 십팔현(東國 十八賢)은 홍유후 설총(弘儒侯 薛聰), 문창후 최치원(文昌侯 崔致遠), 회헌 안향(晦軒 安珦),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퇴계 이황(退溪 李滉),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율곡 이이(栗谷 李珥), 우계 성혼(牛溪 成渾),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중봉 조헌(重峯 趙憲),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이다.
나. 서원
〇 올곧은 선비의 표상인 자계서원(紫溪書院)
1. 소재지 및 관리 문중: 이서면 서원리, 김해 김씨 삼현파(三賢派)
2. 배향인물
1) 주벽인 탁영 김일손(1464~1498)
자(字)는 계운(季雲)이고, 호(號)는 탁영(濯纓)이며, 시호(諡號)는 문민(文愍)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 남계(南溪) 맹(孟)이고, 조부는 절효(節孝) 극일(克一)이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23세 때 문과(文科)와 전시(殿試) 등에 각각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였다.
성종이 승하하고 난 뒤 춘추관 사관(史官)으로 있던 선생은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사초(史草)에 세조 찬위의 부당성을 풍자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었다. 이때 훈구파들은 자신들의 비행도 수록될 조짐도 보이자 이 ‘조의제문’을 빌미삼아 공격을 했고 마침내 연산군 4년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때 35세젊은 나이에 참형을 당하게 된 것이다.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이 있으며, 유품은 1490년(성종21)경에 직접 제작한 6현금(6弦琴)이 있다. 이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거문고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957호로 지정된 “탁영금(濯纓琴)” 일명 문비금(門扉琴)이다. 또 성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매화벼루”가 있고 그외 여러 교지, 자계서원 둔전답경자개량등록(屯田沓庚子改良謄錄), 자계서원의 사액시 치제(致祭) 홀기(笏記)는 유형문화재 제27호이다.
2) 절효 김극일(1382-1456)
자(字)는 용협(用協)이고, 호(號)는 모암(慕庵)이다. 의흥 현감 서(湑)의 아들이며, 탁영 선생의 조부이다. 야은 길재(吉再)의 문인으로 세종조에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고, 향리에서 후학들의 훈도에 힘썼다. 증직(贈職)은 사헌부 집의(執義)이다.
타고난 효자로 부모님에 대한 효행이 지극했다. 이 효행이 임금에게 알려져 정문(旌門)하였는데 향리유림과 제자들이 그 효행을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사시호(私諡號)를 절효(節孝)라 했고,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에 등재되었다. 저서로는 『절효선생실기(節孝先生實記)』가 있다. 묘소는 각북면 명대리에 있으며 묘재인 ‘모암재(慕庵齋)’가 있다.
3) 삼족당 김대유(1479-1552)
자(字)는 천우(天祐)이며, 호(號)는 삼족당(三足堂)이다. 직제학 동창공 준손(駿孫)의 아들이고, 탁영의 장질(長姪)이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으로 1507년(중종 2) 정시(庭試)에 장원 급제한 이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정언(正言), 칠원현감 등을 지냈다. 기묘사화(己卯史禍) 이후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돌아와 은거하며 자호(自號)를 “계산(溪山)이 족(足)하고, 풍월(風月)이 족(足)하고, 음아(吟哦)가 족(足)하다”에서 삼족(三足)을 취해서 삼족당(三足堂)이라 하고, 1519년(중종 14) 삼족대(三足臺)를 건립하여 후진을 교육했다.
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譜)』, 『삼족당 유고(三足堂 遺稿)』가 있다. 묘소는 매전면 금곡리에 있으며 묘재인 ‘유현재(惟賢齋)’가 있다.
세 분 모두 유도의 가르침을 앎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실천적 삶을 지향한 문장과 절행에서 이름 높은 선비였다.
3. 연혁
자계서원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맑은 하늘에 둥실 뜬 보름달의 풍광은 ‘자계제월(紫溪霽月)’이라 말하는데 청도 8경의 하나이다.
원래 이곳은 탁영(濯纓) 선생이 25세 때인 1488년(성종 19)에 운계정사(雲溪精舍)를 건립하여 수학(修學)하던 곳인데 1518년(중종 13)에 유생(儒生)들이 운계정사를 자계사(紫溪祠)로 개칭하여 탁영 선생을 배향해왔다.
그 뒤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가 유림과 후손들이 협의하여 1924년에 탁영의 14세손인 모계(慕溪) 김용희(金容禧)의 사재로 완전 복원하였다. 1975년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83호로 지정되었다.
4. 자계서원에는 수많은 불망비(不忘碑)가 있다. ‘탁영선생신도비’, ‘절효선생정려비와 비각(碑閣)’, ‘자계서원원정비’, ‘탁영선생순절500주년추모비’ ‘자계서원사적비’,‘탁영선생문학비’가 그것이다.
5.강계(講契)조직:1854년(철종 5), 탁영 12세종손 창윤(昌潤) 조직, 음력 4월 3일 보인당에서 열림
〇 충절의 거룩한 정신이 서린 용강서원(龍岡書院)
1.소재지 및 관리 문중: 이서면 학산리 모산마을, 밀성(密城) 박씨 소고공파(嘯皐公派)
2.배향인물: 이곳은 여충사(麗忠祠)와 충렬사(忠烈祠)란 두 곳 사당이 있고 배향인물이 무려 열여섯 분이나 된다
〇 여충사(麗忠祠)
1) 주벽인 송은(松隱) 박익(朴翊)(1332 ~ 1398)
자는 태시(太始),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으로 호는 송은(松隱)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등제하여 한림문학(翰林文學), 사재소감(司宰少監), 예부시랑(禮部侍郞),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했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했으며 왜구와 호적을 정벌하는데 충성을 다했는데 이성계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를 무너뜨리려 하자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와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그 후 1395년 조선 태조가 판서에 이어 좌의정의 벼슬로 회유했으나 나가지 않고 충절을 지켰다.
2024년 제3회 한시 백일장(주최: 청도군, 주관: 청도 향교: 주제: 追慕 松隱先生 忠節) 로 실시
사후 600여년이 지난 2000년 9월 22일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묘소에 도굴흔과 함께 지석(誌石)과 화문석(花紋石)이 발견됨에 문화재청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석실내부에 고려 시대의 풍속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조선 초기 무덤에서 고려시대 양식은 처음 발견되었고, 그 특이한 양상과 화려함은 사료적 가치가 높아 국가 사적지(史蹟 제459호)로 지정되었다.
2) 우당 박융(? ~ 1428)
송은 박익의 장남으로 자는 유명(惟明) 호는 우당(憂堂)이다. 포은 정몽주의 제자로서 조선 초기에는 벼슬을 하지 않다가 뒤에 아버지 송은의 조선 벼슬 유명(遺命)을 받은 뒤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이조정랑(吏曹正郞),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함안군수(咸安郡守) 등을 역임했다. 진주 촉석루에 제영운(題詠韻) 시가 있다. 1424년(세종6) 경상도 도사 재임 시에는 청도향교 및 각 고을의 향교를 중수하고 제례제법을 고증하여 정비 제정하고 제기를 일신하고 보완하는데 힘썼다.
2)충렬사
〇 배향인물은 14의사(14義士)이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4월 13일에는 부산, 20일에는 청도가 함락되자 청도에 거주하는 밀성 박씨 일문(송은선생의 6세손, 7세손) 부자, 형제, 숙질, 종반 열네 분이 창의하여 청도지역을 방어하였다. 이는 전국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의병활동이다. 그 중 두 분은 전사하고 열두 분이 공신록에 녹훈되었다. 14의사는 다음과 같다.
삼우정 박경신(三友亭 朴慶新),용연 박경인(龍淵 朴慶因), 제우당 박경전(悌友堂 朴慶傳), 국헌 박경윤(菊軒 朴慶胤), 박경선(朴慶宣), 계애 박지남(溪崖 朴智男), 운애 박철남(雲崖 朴哲男), 괴정 박선(槐亭 朴瑄), 운옹 박찬(雲翁 朴璨), 행와 박린(杏窩 朴璘), 기포 박우(杞圃 朴瑀), 죽와 박근(竹窩 朴瑾), 용암 박숙(龍巖 朴琡), 박구(朴球)
박씨 일문의 의병활동은 삼창 삼순 팔의(三倡三殉八義)로 불려지고 있다. 즉 박경신, 박경전, 박경윤은 창의삼충(倡義三忠)이며 임란 때 순절한 박경인, 박경선과 병자호란 때 순절한 박우는 순절삼충(殉節三忠)이고 박지남, 박철남, 박선, 박찬, 박린, 박근, 박숙, 박구는 거의팔사(擧義八士)인 것이다.
3)경내 서쪽에 있는 용강재는 청도에 입향하여 밀성박씨 소고공파를 열었던 소고공(嘯皐公) 건(乾)의 묘재이다.
3.연혁
용강서원은 1590년(선조 23) 용강재(龍岡齋)를 창건했고, 1868년(고종5)에 사당이 훼철되었다. 1876년(고종 13) 14의사묘정비와 비각을 건립했으며 1992년 송은선생 영당을 여충사(麗忠祠)로 환원하고 용강서당을 용강서원(龍岡書院)으로 개편했다. 충렬사와 14의사 묘정비(14義士廟庭碑)가 문화재(경상북도 기념물 129호)로 지정되었다.
〇 승전의 북소리가 들리는 금호서원(琴湖書院)
1.소재지: 이서면 흥선리, 재령이씨 지암종중(載寧 李氏砥巖宗中)
2.건물구조: 이 서원은 외삼문과 강당, 사당을 일축선상(一軸線上)에 두고 강당의 좌우에 동·서재가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이다.
3. 배향 인물
1) 동계(東溪) 이운룡(李雲龍) (1562~1610)
1585년(선조 18) 무과에 올라 선전관에 이어, 1589년 옥포만호에 임명되었다. 1592년 5월 7일, 원균의 경상도 수군과 이순신의 전라도 수군이 합세하여 거제도 동쪽 옥포양(玉浦洋)에서 적선을 맞아 싸웠다. 이 때 선봉장인 이운룡 장군은 적선 50여 척을 섬멸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것이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인 옥포해전이다. 그 뒤 사천, 진해, 한산, 안골포, 부산해 등 여러 해전에서도 진두에서 적군을 막았다. 1596년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에 오르고 전란 뒤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 되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다.
1605년 내직으로는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 비변사당상관(備邊司堂上官)을 지내고, 외직으로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어 많은 공적을 남겼다. 뒤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식성군실기≫ 2권이 있다.
2) 향산(鄕山) 이백신(李白新)(1539-1604년)
재령이씨(載寧李氏)가 오백여년 간 세거하고 있는 청도 금촌리에서 태어났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 어찌 구차스럽게 살기를 생각하랴’ 하면서 적진에 뛰어 들었다.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고향의 아들이 갑자기 급사(急死)한 불행을 겪었지만 잠시 집에 들러 장례를 치른 뒤 뒷일을 며느리에게 부탁하고 다시 의병의 진중인 금성(金城 : 전남 나주)으로 달려갔다. 전란이 끝났을 때 나라에서 어모장군 훈련원첨정(禦侮將軍 訓鍊院 僉正)을 내리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포상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청도 향중 유림들과 힘을 모아 향교(鄕校)를 수축하고 1599년에는 향약(鄕約)을 만들어 풍속을 바로 잡는데 힘쓰고 후학을 계도했다.
4.연혁
금호서원은 식성군 태생지인 청도 매전면 온막리의 가조(상충사)에서 시작되었다. 뒤에 가조가 퇴락하여 1814년(순조14)에 식성군의 방손이 많이 거주하는 이곳 이서면 금촌리에 서원을 건립하여 영정. 교서. 교지. 등을 옮겨왔다. 그 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가 1960년 다시 복원하였다. 묘소는 경남 의령군 지정면 웅곡에 이장
1994년 녹훈 교서와 교지가 국가 문화재 보물 제1212호 지정되고 또, 경북 지방문화재 제142-2호로, 그리고 서원 건물도 지방문화재 자료 제308호로 지정되었다.
〇 대쪽 같은 선비의 길을 일깨우는 남강서원(南岡書院)
1.소재지 및 관리문중: 각북면 남산리, 밀성(密城) 박씨 행산공파(杏山公派)
2.배향인물
1)오졸재(迃拙齋) 박한주(朴漢柱, 1459 ~1504)
통사랑(通仕郞) 돈인(敦仁)의 아들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 생원, 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1485년(성종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에 제수된 뒤 사간원 정언, 성균관 전적 등을 지냈다.
부모 봉양을 위하여 창녕 현감을 청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혼절을 할 정도로 효심이 지극하였다. 사간원 헌납이 되었을 때 연산군의 실정(失政)과 유연에 대해 극간했고 임사홍(任士洪)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무오사화 때 유배를 갔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46세에 참형을 당했다.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고 그 뒤 도승지(都承旨) 겸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추증되었다. ‘오졸재집’이 있으며 밀양 5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2)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 1572-1652)
아버지는 동몽교관(童蒙敎官) 박신(朴愼)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싸웠다.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 문제에 대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국담박선생문집’, ‘독서지남(讀書指南)’, ‘학문유해(學問類解), ‘도통연원록(道統淵源錄)’, ‘동방학문연원록(東方學問淵源錄)’, ‘의례견문해(疑禮見問解)’ 등의 저술을 남겼다. 1672년(현종 13)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3.연혁
남강서원은 1694년(숙종 20)에 창건되었으나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가 1998년에 복원하였다.
4.이곳에는 조선 명현인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퇴계 이황, 회재 이언적, 정암 조광조의 친필 서장들이 보관되어 있다.
〇 소요당의 그윽한 뜻을 우러러 받드는 선암서원(仙巖書院)
1.소재지: 금천면 신지리, 밀성(密城) 박씨 소요당파(逍遙堂派)
1. 소재지 및 관리 문중: 밀성 박씨 소요당 문중
2. 배향인물:
1)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 1479∼1560)
밀성 박씨 입청도 선조인 소고공(嘯皐公) 박건(朴乾)의 손자로 이서면 수야리에서 출생하여 40세 초반에 이곳 신지리에 정착했다.
1516년(중종 11)에 생원, 1519년 현량과에 피천(被薦)되고 그 뒤 사산감역(四山監役)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1519년 기묘사화 이후 그동안 자신이 지었던 글을 모두 모아 소각(燒却)하고 1521년(중종 16) 눌연(訥淵) 위에 대(臺)를 모아 정사(亭榭)를 짓고 ‘逍遙堂’이라 게액(揭額)한 뒤 자연과 벗하며 생활했다.
교통이 불편한 곰티재 동쪽 지방 주민들의 조세 공납 편의와 천재에 따른 구휼(救恤)과 위민의 방책으로 삼족당 김대유와 함께 사창(社倉)인 동창(東倉)을 설치하였다.
운문구곡가(雲門九曲歌)등 여러 시문이 많으며 찬오명(撰五銘), 오잠(五箴), 춘추대일통론(春秋大一統論), 가훈십조(家訓十條) 및 도주객관상량문(道州客館上樑文), 향노당상량문(鄕老堂上樑文) 등이 문집에 실려 있다.
3.연혁
1577년(선조 10), 군수 황응규(黃應奎)의 주선으로 운수정의 향현사(鄕賢祠) 위패를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선암서원(仙巖書院)이라 하였는데 1868년(고종5) 훼철(毁撤)되었다가 1878년(고종 15) 새로 복원하였다.
4. 건물배치
상류층의 주택에 서당(書堂)건물이 첨가된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서원 뒤에 여러 서책이나 목판을 보관하였던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5.문화재
선암서원은 경상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79호이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08호인 14의사록 판목(14義士錄 板木),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08호인 해동속소학 책판(海東續小學 冊版), 보물 제917호인 배자예부운략 책판(排字禮部韻略 冊版)이 있었으나 현재는 안동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하고 있다.
6.활용
운문천에서 흘러온 맑은 물줄기가 용두소에 푸른빛을 드리워 절경을 이룬 언덕에 마을을 감싸는 어성산을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고 있으며 백일장 등 여러 모임 장소로 활용되고 또한 고택 체험 숙박을 할 수 있는 곳이다.
〇 숭절(崇節)의 선비정신이 가득한 훈령서원(薰嶺書院)
1. 소재지 및 관리 문중: 이서면 신촌리, 밀성 박씨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2.배향인물
1) 박양무(朴揚茂)
두촌 박양무 선생은 고려 공민왕 때 선무랑(宣務郞)을 거쳐 김천(金泉) 도독우(道督郵)를 지내다가 고려의 운명이 다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뜻을 함께한 여러 현인들과 은둔하다가 낙향하여 화양 대성산에 은거하여 성학(聖學)을 강론하고 연마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청도 입향조이다.
2)화은(華隱) 박계은(朴繼隱, 1436∼1520)
두촌의 증손이며 1468년(세조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서당을 열어 글을 가르치니 문학과 덕행이 알려지면서 많은 선비들이 찾아왔다. 청도읍 평양리에서 신안 마을로 옮겨 새 터전을 마련했다.
3) 호재(湖齋) 박맹문(朴孟文)
박계은의 아들이며 조선 성종 때 순천(順天) 교수(敎授)에 제수되었으며 사림에서 본보기로 삼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4) 농암(聾巖) 박란(朴鸞, 1494∼1557)
호재 박맹문의 둘째 아들이다. 1534년(중종 29) 사마시에 합격하여 국상(國庠)에 진출하였으나 벼슬길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향청을 통한 향촌 지자체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오수곡 정사와 농암대(聾巖臺)를 거닐며 문학과 도행에 모범을 보였다.
3.연혁
1541년(중종 36) 훈령서당으로 시작했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병화에 서당이 불탔다. 이후 중창과 훼철을 거듭하다가 1971년에 다시 중건하였으며 1998년에 향내 유림이 훈령재를 훈령서원으로 승호 개편하였다.
4.활용
청도문화원 주관, 경북 선비 아카데미가 열렸다.
〇 학덕으로 빼어난 네 분의 선비를 모신 지산서원(芝山書院)
1.소재지 및 관리 문중: 이서면 신촌리, 밀성 박씨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2.배향인물
1) 일청재 박호(逸淸齋 朴虎, 1512∼1579)
1546년(명종 원년)에 알성급제(謁聖及第)하여 이조좌랑(吏曹佐郎)을 거쳐 평해군수(平海郡守)를 지냈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향민들이 놋숟가락을 모아 주석으로 선정비를 세워 그 덕을 숭앙하였다. 1579년(선조 12)에 향년 68세로 졸하였는데 부음(訃音)을 들은 평해 군민들이 통곡하며 도포자락에 흙을 담아 와서 쌓은 봉분의 크기가 왕릉과 같다고 한다.
공은 청도반시를 시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명나라에서 가져온 감나무 가지를 고향마을 재래종 감나무에 접을 붙였는데 신기하게도 그 감나무에서 열린 감은 씨가 없었고 수분이 많으면서도 아주 달았다. 이 나무가 바로 청도반시의 시조목이다.
2)모효재(慕孝齋) 박지현(朴之賢, 1634∼1681)
숙종조에 효행 문학으로 천거되어 장릉참봉에 올랐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그 효행을 높이 사서 모효(慕孝)란 호를 지어주었으며 그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자겸(子兼)은 우리 문의 효도한 선비로 유림의 표상이 된다고 하였다.
3)경양재(景陽齋) 박태고(朴太古, 1656∼1724)
모효재 박지선현(慕孝齋 朴之賢)의 아들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75년(숙종 1)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1702년(숙종 28)에 준원전 참봉(濬源殿 叅奉)이 되고 이듬해에 장녕전 참봉(長寧殿 叅奉)을 지냈으며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을 문묘(文廟)에 봉안(奉安)하고자 임금께 상소(上疏)하여 그 비답으로 사계 김장생이 문묘에 종향(從享)케 되었다.
4) 죽옹(竹翁) 박중채(朴重采, 1679∼1751)
경양재 박태고(景陽齋 朴太古)의 아들이다. 일찍이 학문을 즐겨 성학요서집(聖學要書輯)을 지었다. 1748년(영조 24)에 효행덕학(孝行德學)으로 수의어사(繡衣御使)의 추천으로 장릉참봉(莊陵叅奉)에 천거 되어 참봉을 지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과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을 문묘(文廟)에 봉안(奉安)하고자 임금께 상소(上疏)하여 종향(從享)케 되었다.
지산서원은 1844년(헌종 10년)에 창건되었으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毁撤)되었다가 후일 자양산 기슭에서 현재의 자리에 있던 영모재 자리로 옮겼고 1984년 상청사(尙淸祠)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〇 춘정과 춘당의 봄기운이 서려 있는 봉양서원 (鳳陽書院)
1.소재지 및 관리 문중: 풍각면 봉기리, 밀양 변씨(密陽 卞氏) 춘정공파(春亭公派)
2. 배향 인물
1)춘정(春亭) 변계량 (卞季良, 1369~1430)
시호가 문숙(文肅)으로 조선이 개국했을 때 개국 이념을 기초했던 분으로 유∙불∙도(儒彿道)에 모두 능했다. 1420년(세종 2) 집현전 대제학에 제수되어 다년간 외교 문서 작성을 맡았고 ‘주자보전(鑄字寶典)’, ‘태조실록(太祖實錄)’,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의 편찬과 ‘고려사’ 개수(改修)에 참여했다. 또 조선 건국을 기린 ‘화산별곡(華山別曲)’, ‘태행태상왕시책문(太行太上王諡冊文)’도 지었다.
벼슬이 우군도총제부판사(右軍都摠制府判事)에 이르렀어도 늘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이어갔으며 ‘춘정집(春亭集)’ 3권 5책이 있고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한다.
2)춘당(春堂) 변중량(卞仲良,1345~1398)
춘정의 형이다. 1365년(공민14)에 문과 급제 후 밀직사좌승지(密直司左丞旨) 정3품 당상관(堂上官)에 이르렀다.
명(明) 나라가 들어서면서 고려를 압박할 때 견제외교를 주창하여 고려의 안정을 도모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격변기 때 포은 정몽주(鄭夢周) 편에 섰다가 3년 간 유배 생활을 했다. 그 뒤 다시 정치 소용돌이 속에 선고(先考)의 상(喪)도 치르지 못하고 2차 유배를 갔고 4년째 되는 해에 잠시 풀려났는데 다시 이방원(李芳遠)이 일으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일파(一派)로 몰려 참화(慘禍)를 당했다. 저서로는 춘당유고(春堂遺稿)가 있다. 춘정, 춘당 형제는 경남 거창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도 제향되고 있다.
3)건물 및 연혁
봉양 서원은 외삼문, 강당, 동·서재를 두고, 후면에 내삼문인 경지문 (景止門)과 제향공간인 숭현사(崇賢祠)가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이다.
고종 때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5년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현 위치에 봉양서당을 중건했으며 그 뒤 서원으로 승격했다.
이곳은 여느 서원과 달리 100여 미터 전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〇 화산군의 충정을 느끼게 하는 황강서원(皇岡書院)
1. 소재지 및 관리 문중: 금천면 갈지리 삼성(三聖)마을, 영양 천씨(潁陽 千氏)
2. 배향인물:
1)화산군(花山君) 천만리(千萬里)
원래 중국 장수이다. 1543년 명나라 가정(嘉靖) 8월 1일(음)에 태어났으며 명나라 말기 무과에 장원급제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壬辰外亂)이 일어났을 때 천 장군은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과 더불어 평양을 탈환하고 도망하는 적을 추격하여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도 역시 충남 천안(天安). 울산(蔚山) 등지에서 적(敵)을 완전히 격퇴시켜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전란이 평정된 후 명나라의 다른 장수와 군졸들은 돌아갔으나 천 장군은 휘하 장수(將帥)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들 둘과 함께 우리나라에 귀화(歸化)하였다. 큰 아들 상(祥)도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1597, 선조 30)에도 공을 세워 벼슬이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이르렀으며 둘째 아들 희(禧) 역시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에 전공을 세워 벼슬이 장령에 이르렀고 뒤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천 장군은 조선 숙종 때 창덕궁 후원에 설치한 대보단(大報壇)에 배향(配享)되어 황단망배지열(皇壇望拜之列)에 오르게 되었다. 이 대보단은 1704년(숙종 30)에 임진왜란 때 조선을 위해 군대를 파견한 명나라 신종(神宗)을 추모하기 위해 창덕궁 후원에 쌓은 제단인데 거기에 배향되는 것은 극히 드문 예우였다. 이 은전은 화산군 봉군(封君)에 이은 큰 특전이었으며 그 뒤 순종 임금 때는 충장공(忠壯公) 시호(諡號)를 내려 그 공적을 또 한 번 크게 기렸다.
3. 연혁
황강서원은 장군이 살던 정사(精舍)에 사당을 세우고 향사하다가 그 뒤 1833년(순조 33)에 천만리의 10세손 석규(錫奎)의 집에서 문서와 장군의 영정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봉안하기 위해 1835년(헌종 원년) 대황산(大皇山)줄기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마침 산의 명칭에도 ‘皇’자가 들어가고 천 장군도 명나라 출신 장수이기 때문에 서원 이름을 ‘황강(皇岡)’이라고 하였다.
특히 사당인 충장사(忠壯祠) 정면 문 위에 상부의 하중을 지지하는 상인방(上引枋)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흔치 않는 것으로, 아마도 명나라 출신의 장수가 모셔져 있기 때문에 특별히 설치 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이 서원 역시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52년 복원하였으며 소장하고 있던 ‘화산군 천만리 선생 영정(花山君 千萬里 先生 影幀)’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 중이다.
〇 고운(孤雲) 선생의 영정을 모신 학남서원(鶴南書院)
1.소재지 및 관리 문중: 각남면 일곡리, 경주(慶州) 최씨
2.배향인물
1) 문창후(文昌候)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고운은 일찍이 12세에 당(唐) 나라에 유학하였으며 18세에 과거에 급제(及第)하였다.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를 비난하는 ‘토 황소격문(討 黃巢檄文)’을 지어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29세 때 신라에 귀국하자 헌강왕은 시독겸 한림학사 수병부 시랑지서서감(侍讀兼 翰林學士 守兵部 侍郞知瑞書監)을 제수(除授)하였다. 그 뒤 부성군(富城郡) 태수 등을 봉직했으며 38세 때 문란한 정치를 해결하고자 ‘시정 수습책 십여조(施政 收拾策 十餘條)’를 진성여왕에게 올리면서 아찬(阿湌)에 올랐으나 정치적 개혁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42세엔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입산하여 은거 중 생을 마쳤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계원필경(桂苑筆耕)’등 20여권과 ‘사육집(四六集)’등이 있다. 또 ‘난랑비 서문(鸞郞碑 序文)’은 화랑도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3. 연혁 및 영정
원래 이곳은 경주 최씨 입향조인 경산(耕山) 최여준(崔汝峻) 공이 후진을 길러내던 장구지소(杖屨之所)였는데 1977년에 고운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승호되었고 또한 고운의 영정(경북 유형문화재 제166호)을 사당인 ‘계동사(啓東祠)’에 봉안하게 되었다.
영정의 규격은 105× 74㎝이다. 다른 곳에 봉안된 선생의 모습은 대부분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은 것인데 비해 이 영정은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에 있어 중국풍의 문인 상 형식을 취했다. 안면묘사와 옷 주름 처리, 바닥에 깔린 자리의 형태 등으로 보아 이 그림은 조선 후기에 다른 초상화를 본떠서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좌우에 동자, 동녀상이 곁들어지고 선명한 색을 사용했다.
원래 이 영정은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후손인 최한룡(崔翰龍) 의병장이 해인사 방장회의(方丈會議)에서 허락을 얻어 이곳에 모셔 온 것이다.
4. 경산재 및 충효각
서원 강당 옆 충효각에는‘가선대부 판의금부사 경산 최공지충효비(嘉善大夫判義禁府事耕山崔公之忠孝碑)’가 있다. 경산은 효심이 지극하여 임진왜란 때 노모를 안전하게 피신시켰으며, 또한 의병을 일으켜 많은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1626년(인조 4)에 충효로 천거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으며 ‘충효각’에 비를 세워 향사하고 있다. 경산재 및 충효각은 2002년도에 복원 및 개축을 했다.
〇 사화에 목숨을 잃은 오졸재, 망헌, 탁영선생을 모신 차산서원(車山書院)
1. 소재지: 풍각면 차산리
2. 배향인물
오졸재(迃拙齋) 박한주(朴漢柱, 1459 ~1504), 망헌(忘軒) 이주(李冑, 1468∼1504),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선생 세 분 선생이다.
이 세 분은 같은 시대, 같은 길을 걸어 온 사람으로 공통점이 많다. 나이는 오졸재,탁영, 망헌의 순인데 오졸재와 탁영은 다섯 살, 탁영과 망헌은 네 살 차이이며, 오졸재는 46세, 탁영은 35세, 망헌은 37세에 목숨을 잃었다.
세 분 모두 사림파의 거두로 강직한 성품을 지닌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同門修學)했는데 그 영향으로 세 분 모두 절의와 의리를 중시한 삶을 살게 된 것 같다.
1)오졸재 박한주
조선 10대 연산군은 군주의 본분을 망각하고 실정(失政)을 거듭하며 아무 때나 용봉장막(龍鳳帳幕)을 치고 연회를 즐기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다.
1479년(연산군 3), 사간원 헌납으로 있던 오졸재는 “용봉장막은 중국 사신이 왔을 때나 큰 잔치 할 적에 치는 것인데 계속 걷지 않고 잔치를 벌이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때 왕이 화를 내어 용봉장막이 네 것이냐고 하니 이는 신민(臣民)의 것이라고 했다. 이때 주변에서 몸조심 하라고 하자 “신하 된 자가 어찌 내 한 몸 보전하자고 임금을 의롭지 못한 지경에 빠뜨릴 수 있겠소?”라고 했다. 그 이후도 노사신과 임사홍의 권력 농단에 대해 상소문의 하나인 차자(箚子)를 올리는 등 극간(極諫)을 멈추지 않았는데 결국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는 귀양을 갔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극형을 당했다.
2) 망헌 이주
정언(正言)으로 있다가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진도로 귀양 갔다가 이어 궐내에 관리를 감찰하고 임금께 간언하는 대간청(臺諫廳)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로 갑자사화에 사형에 처해졌다.
3)탁영 김일손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훈구파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고, 춘추관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는 세조 찬위의 부당성을 풍자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다가 무오사화 때 참형을 당했다.
그 뒤 중종반정 이후 세 분 모두 신원이 되면서 관직이 추증(追贈)되었다. 오졸재는 도승지 겸 예문관 직제학으로 망헌은 이조 참의에 이어 승정원 도승지로 탁영은 중종반정(中宗反正)이 되고 신원복작(伸寃復爵), 그 뒤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〇 백세의 사표(師表)인 오졸재, 망헌 선생을 배향한 석강서원(石岡書院)
1.소재지: 풍각면 흑석1리
2. 배향 인물
오졸재(迃拙齋) 박한주(朴漢柱)와 망헌(忘軒) 이주(李冑)
두 분 모두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과 실정을 바로잡기 위해 직언을 하다가 무오사화에 유배를 가고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은 충절로 이름 높은 분들이다. 이미 남강서원과 차산서원 방문 시 그 행적을 소개한 터라 석강서원 편에서 오졸재의 학구적인 태도, 지극한 효심, 청렴한 일면을 소개하려 한다.
공은 젊어서부터 성리학에 침착하여 매진하였고 제자백가(諸子百家) 산경(山徑), 지지(地誌)、노장(老莊) 불교의 학설까지 섭렵하였다. 종일 똑바로 앉아 독서를 하는데 비록 한집 식구라도 게으른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언행이 한결같아 예의를 따랐으며 아무리 급할지라도 말을 빠르게 한다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부모를 섬김에 늘 공경하고 기쁜 낯빛으로 극진(極盡)하게 받들었다. 날마다 첫닭이 울면 반드시 세수하고 빗질한 다음 의관을 정제하고 부모님을 뵈었다. 창녕현감으로 있을 때 본가인 차산리와의 거리가 반나절이지만 공무로 여러 날 뵙지 못하면 마음이 편안하지 아니하여 초저녁 때 혼자 말을 타고 달려가 조용히 뵈옵고 새벽이 되면 곧 돌아오곤 했는데 사람들이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1501년(연산군 7)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에 있을 때 부친의 부음을 듣고 보내준 의복으로 자리를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소리 내어 통곡하는 통에 기절했다가 소생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의(義)가 아니면 취하지 않고 도(道)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다. 거처하는 집을 단장하지 않았으며 늘 가난한 살림살이였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의복은 몸을 가릴 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한번은 어느 친구를 찾아갔을 때 그 집 하인이 주인에게 “문밖에 손님이 왔는데 키가 크고 베옷을 입었는데 꼭 거문고집 같습니다.” 했다. 하인이 조롱할 정도의 남루한 차림이었는데 그 때 주인이 “틀림없이 박 모이다.” 하고 신을 거꾸로 신고 뛰어나가 맞아들이니 그 집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고 한다.
뒷날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선생은 충과 효가 모두 극진하고 체(體)와 용(容)이 겸비된 분으로 진실로 백세의 사표(師表)라고 할 수 있으니 천년토록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청도는 물론 경남 밀양에서도 오현으로 숭앙하고 있으며 경남 함안에도 여표비가 있다.
〇 임진왜란 중 효시였던 의병 창의로 왜적에 맞섰던 박경신(朴慶新) 선생의 임호서원(林湖書院)
1. 소재지 및 관리 문중: 금천면 임당리, 밀성(密城) 박씨 삼우정공파(三友亭公派)
2.배향 인물
1) 주벽인 삼우정(三友亭) 박경신(朴慶新)
무과초시, 무과복시에 이어 1573년 35세에 무과전시(武科殿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마침 관직에서 휴가 중이었던 공은 두 아들을 비롯한 사촌, 조카들과 더불어 의병창의(義兵倡義)를 했는데 그날이 4월 23일이었다. 이는 임진왜란 의병 창의의 효시로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도화선(導火線)이 된 것이다.
공은 의병들에게 임무와 진지를 배치한 후 상경, 4월 29일 어전(御前)에 나아가 북상하는 왜적의 실상을 아뢰었다. 이때 선조 임금은 적을 꼭 막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공을 청도조전장(淸道助戰將)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장군은 탁월한 통솔력, 빼어난 무예로 여러 의병들과 합세하여 청도읍성을 탈환 하는 등 2년 간 총50여 회 전투에서 왜적 234명을 참살하는 등 역사에 남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조정에서 청도조전장에 밀양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까지 겸무하라는 명을 내려 더더욱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러는 중 누적된 과로에 시달렸고 마침내 심한 전상(戰傷)을 입어 1594년 6월 5일 순직하고 말았다. 공이 남긴 ‘창의일록(倡義日錄)’에는 전투 중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당시의 진중 상황이 일자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뒤 1605년 어사선무원종 1등 공신과 호성원종 2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공은 14의사 중에서 나이와 공신등급이 가장 높다.
2)계애(溪崖) 박지남(朴智男)
삼우정의 장남으로 1565년 출생했다.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청도 등 인근의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선무원종공신2등에 올랐다.
3)운애(雲崖) 박철남(朴哲男)
아버지 박경신, 형 지남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였고 또한 형과 함께 선무원종공신2등에 올랐다. 혁혁한 공을 세운 임진란 삼부자(三父子)는 용강서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춘추제향(春秋祭享)되고 있다.
3. 절지수
삼우정 및 두 아들이 수령한 절지수(節祗受: 功臣錄功帖) 13매와 어사원종공신록권 1책 등 4종 17점은 국가보물 1237호로 지정되어, 대구 국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4. 건물
강당 및 경의사(景義祠), 보물 전시각인 경의관이 있다
〇 ‘이운룡 함’ 명명을 기원하며 찾은 석동서원(石洞書院)
1. 소재지 및 관리 문중: 청도읍 원정리 흑석마을, 재령 이씨(載寧 李氏) 문헌공파
2.배향 인물
1)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1562~1610)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출신으로 1585년 무과에 합격하여 1587년 선전관(宣傳官), 1589년 옥포만호(玉浦萬戶), 1593년 웅천현감, 1595년 통정대부(정삼품), 경상좌수사, 1604년 선무공신 삼등에 녹훈 식성군에 봉해졌고 1605년 2월 도총부 부총영, 포도대장 겸 화기제조 비변사당상, 같은 해 9월 삼도수군통제사, 1607년 함경도 병마절도사, 1609년 충청수사를 역임했다.
특히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도와 경상 전라 수군의 연합함대 구성을 이끌었고 옥포, 한산대첩에서 선봉장으로 용감히 싸워 왜적의 서해 진출을 저지했다.
1605년(선조 38) “경상 우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누가 적임자인가?” 라고 물었을 때 영남의 여러 장수가 한결같이 이운룡 장군을 거명했고 한음 이덕형이 천거했던 명장이다.
‘거영일기(居營日記)’와 ‘계본등록(啓本謄錄)’을 남겼는데 거영일기는 장군이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1605년 7월 30일부터 1606년 9월 1일까지 15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다.
또 ‘계본등록’은 이두식 토를 달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2책으로 되어 있는데 수군통제사로서 국왕께 올렸던 장계 138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수군의 활약상과 화기, 전선(戰船)에 관한 기록 및 전후의 수군 편제, 인물, 훈련과정, 방비상태를 비롯 각 진의 군비 상황, 수군력 강화 안과 정비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판옥선에 대해 강조하여 이 배가 화전화시(火箭火矢)의 효과가 크기에 왜군을 격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왕에게 보고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아무튼 이 저서들은 우리 해사(海史)에 길이 남을 공적이다.
3.해군함 명명 운동
이처럼 장군이 보여준 혜안과 충정, 멸사봉공의 정신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나라 사랑 정신이기에 2016년 12월, 이승율 청도군수를 중심으로 청도군민들이 우리 해군 함정에 장군의 이름을 명기하자는 운동을 벌이며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다시 이를 상기하며 2019년 3월 1일, 장군이 태어난 매전면 온막리 일원에서 가두 행진을 하고 구 매전초등학교 교정에서 공동 위원장인 김덕수(해군 소장 전역), 이종평(전 대경대 부총장) 두 분과 뜻있는 많은 분들이 참여한 가운데 이를 정부 당국에 강력하게 촉구하는 결의 대회까지 가졌다.
이 무적의 ‘이운룡 함’이 ‘필승 해군’의 선봉에 서서 우리 바다를 철통같이 지킨다면 국민들은 크게 안심하며 긍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빠른 시기에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〇 임란, 선무원종 공신인 독석암 예인상(芮仁祥) 선생의 율강서원(栗岡書院)
1.소재지 및 관리 문중 각북면 삼평리, 의흥(義興)예씨 훈련원판관공파(訓練院判官公派)
2.배향 인물:
1)독석암(獨石庵) 예인상(芮仁祥,1562 ~ 1633)
독석암은 고려 정이품인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역임하고 부계군(缶溪君)으로 봉군된 예낙전(芮樂全)의 후손으로 1585년(선조18)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 벼슬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몽진(蒙塵)하여 서행(西行)할 때 호종하게 되었다. 이때 다른 신하들은 험악한 백성들의 분노를 두려워하였으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전란 내내 어가(御駕) 호위에 만전을 기하며 7년 동안 충성을 다했다.
종전(終戰)이 되자 선조가 그를 직접 불러 노고를 치하한 후 어모장군 훈련원판관(禦侮將軍 訓鍊院判官)에 제수하고 선무원종 공신(宣武原從 功臣) 2등훈에 책록했다.
그리고 “예(芮)씨는 보기 드문 성씨이니 채씨(蔡氏)로 바꾸는 것이 어떠한가?” 했다고 한다. 이 때 독석암이 엎드려 절하며 "신이 조상의 성을 물려받은 지 10여 세(世)를 내려왔으며 그동안 나라의 은혜를 입어 세상의 공인을 받은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삼가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성씨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했다. 그러자 공의 뜻이 확고함을 알고 선조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은 왕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가문을 중시하고 성씨에 대한 자긍심이 높았던 것 같다. 예씨는 지금도 전국적으로 보면 많지 않지만 청도지역에서는 자손이 흥하여 이서면 대전, 각북면 율정, 매전면 지전, 내동, 온막리 등에 집성촌을 형성하여 조상의 유덕을 기리며 살고 있다.
예인상은 1626년(인조 4년)에 직에서 물러나 율리(栗里)의 산수 간에 돌아와 '홀로 돌이 되어 도를 닦는 집'이란 뜻인 독석암(獨石庵)이라 부르며 세상일에 관계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율강서원의 전신인 경석재 기문에 박재시(朴在時)는 “여기 암자 하나를 짓고 인중방에 독석(獨石)이라고 이름을 걸어 임천(林泉)에 넉넉히 놀다가 홀로 늙어 세상을 마쳤으니 그 지조를 지키어 속세를 떠난 표치는 백세를 가도 갈리지 아니하였다.”라고 했다.
‘독석암 예선생 포상비’와 ‘상충사 묘정비’가 서원을 에워싼 푸른 대나무 숲속에서 당신의 큰 삶을 말해주고 있다.
3. 연혁
이곳은 1914년 경석재(景石齋)로 출발하였으나 1992년 유림들의 공의에 의해 율강서원으로 승호 되었다.
〇 충성과 용맹으로 어가를 호위한 운곡(雲谷) 박문부(朴文富) 선생의 운천서원(雲泉書院)
1. 소재지: 금천면 신지리 길부 마을, 밀성박씨(密城朴氏) 운곡종중(雲谷宗中)
2. 배향 인물
1)운곡(雲谷) 박문부(朴文富, 1563∼1605)
충의공(忠毅公) 전객령(典客令) 천경(天卿)의 6대손이며 할아버지는 현신교위(顯信校尉) 의번(義蕃)인데 진주에서 청도로 옮겨왔다. 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 기석(起碩)이며 어머니는 달성 서씨이다. 운곡은 다섯 살에 부친상을 당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평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버이를 봉양하는데 효도하지 못하고, 임금을 섬기는데 충성하지 못한다면 짐승들에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하였다.
선조 15년(1582)에 무과에 올라 선전관, 제포첨사로 부임한 뒤 탁월한 통솔력으로 철통같은 방위를 하여 한나라 국경의 장성(長城), 송나라 관문(關門)의 자물쇠라 불릴 정도였다.
그뒤 선조 22년에 사복시 첨정으로 내직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때 대낮인데도 태백성(太白星)이 수시로 나타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불길한 예감을 느낀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병란에 대비하기를 소청했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벌을 주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본 운곡은 바른 건의가 통하지 못하는 곳에 더 머물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향리, 운천재(雲泉齋)로 돌아왔으며 이곳에서 무예와 전쟁에 관한 일을 강론하며 국가의 위급한 상황에 대비했다. 그때 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공은 급히 서울로 달려가 의주로 몽진하는 어가를 충심으로 호종했다. 이에 체찰사 오리공(梧里公)이 그의 정성을 높이 평가하였고, 초유사 학봉(鶴峯) 또한 공의 충성과 용맹을 특별히 임금에게 보고하였는데 선조는 말 한필과 비단 일단(一段)을 하사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삼등에 녹훈했다.
그 뒤 선조 38년(1605)에 통훈대부 이성현감(利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그해 정월 22일, 43세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3. 연혁
헌종 4년(1838)에 운천서사(雲泉書社 忠孝祠)로 출발했다가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는데 1922년, 1995년 중창했으며 2009년 운천서원(雲泉書院)으로 승호(陞號)했다.
다. 사당
〇 불의에 항거하다 사화에 희생된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선생의 종택
1.소재지 및 관리: 화양읍 백곡(栢谷)마을, 김해 김씨 탁영 종택
2.배향인물
1)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
23세 때 문과(文科)와 전시(殿試)에 각각 장원으로 급제한 뒤 이조정랑등을 역임했으며, 명나라에 질정관(質正官) 및 서장관(書狀官)으로 두 번이나 다녀왔다.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훈구파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고, 춘추관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는 세조 왕위 찬위의 부당성을 풍자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 연산군 4)때 35세로 참형을 당했다. 그 때 고향 앞 냇물이 선생의 충절을 말하듯 붉게 역류하여 본래 이름인 운계(雲溪) 대신 자계(紫溪)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 뒤 1506년(중종 원년) 관작이 회복되었고 1578년(선조 11) 자계사를 자계서원(紫溪書院)으로 중건하고 종택에도 부조묘를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종택과 자계서원 일부가 불타고 말았다. 1661년(현종 2) 유생들의 청원에 의해 자계서원이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종택의 부조묘 역시 사불천위(私不遷位)에서 국불천위(國不遷位)로 사승(賜昇)되었다. 그리고 1834년(순조34)년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 문민공(諡文愍公)을 하사(下賜)받았다.
3건물
전면에 세운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탁영 선생의 문집 등을 보관한 영모각(永慕閣)과 사랑채, 안채, 행랑채가 있고 그 뒤에 탁영 선생 내외를 모시는 부조묘(不祧廟)가 있었다. 이곳은 대대로 종손을 중심으로 기제사와 설날, 한식, 단오, 추석, 9월 9일, 동지 등에 다례(茶禮)를 올리는 사당이다.
4. 연혁
백곡마을에 처음 이거한 분은 탁영 선생의 아버지인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경연춘추관사(經筵春秋館事)에 증직되었던 남계 맹(南溪 孟)이었다, 공은 운계리(현, 이서면 서원리)에 거주하다가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김씨 삼주(三珠)’라 일컬어지는 아들 준손(駿孫), 기손(驥孫) 일손과 함께 새터를 잡아 옮긴 것이다. 그 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선생의 백씨와 조카들이 전북 남원으로 유배되어 살다가 탁영 선생 증손인 도연정 치삼(道淵亭 致三)이 탁영선생의 묘소와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청도로 돌아왔다. 1844년(헌종 10) 진사 모천 창윤(慕川 昌潤)이 노후된 부조묘를 재건하였으며 1940년 종석(鍾碩)이 부조묘를 다시 재건하였다.
종택의 사랑채는 1949년, 현재 종택을 지키고 았는 18대 종손 상인(相仁, 포항대 교수, 공학박사)이 태어나던 해에 준공했으며 동생 상건(相健, 대구시 사무관) 상기(相基,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이학박사) 형제가 아버지 청랑 헌수(靑浪 憲洙, 청도 경산 교육장 역임)와 함께 살던 곳인데 2016년, 청도군과 경북 도의 협조를 받아 개축했다.
종택은 2008년 2월 18일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161호 지정되었으며 탁영 선생 숭모 사업회가 결성(회장 김순곤)되어 ‘탁영 선생 숭모 기념관’ 건립 부지를 매입했고 ‘탁영 선생 문집’과 ‘도연정 선생 문집’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〇 용헌(容軒) 이원(李原) 선생의 국불천위(國不遷位) 제사를 모시는 명대 대묘(明臺大廟)
1. 소재지 및 관리 문중: 매전면 온막리 명대마을, 고성 이씨
2. 배향 인물
1)용헌(容軒) 이원(李原, 1368- 1430)
고려 공민왕 17년 평재공(平齋公) 이강(李岡)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18세에 문과에 합격했고 공조(工曹)와 예조(禮曹),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쳤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의 부름으로 대각춘방(臺閣春坊)의 시관(試官)이 되었으며 태종 때 지금의 대법원장 격에 해당하는 후설(喉舌)직에 임명되었고 집현전(集賢殿) 제학(提學)을 거쳐 중국 문황제(文皇帝)의 고명(誥命)을 받으러 다녀왔다. 경상도 관찰사, 예조판서(禮曹判書)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세종 때는 우의정(右議政)에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고 조정에 출입한 지 20여년에 9년간 수상직을 맡았다. 62세에 졸했을 때 임금께서 슬퍼하시어 귀양 보낼 때 삭탈했던 관직을 복관하고 시호를 양헌(襄憲)이라 하고 태종 조정에 배향했다. 또한 나라에 큰 공훈이 있고 도덕성과 학문이 높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힌 분이기에 사당에 영구히 모시고 국불천위(國不遷位)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찰방 김상우(金商雨)는 일찍이 “용헌(容軒)선생의 큰 이륜(彛倫)과 덕업, 구슬 같은 문장은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풍성히 받았고, 우뚝한 주석(柱石)과 같이 네 조정을 섬겼네. 학문의 연원은 포은(圃隱)과 목은(牧隱)의 문하에 출입하였고 세월 따라 차례로 관직에 올라 높이 정승의 자리에 이르렀고 천자가 황염재상(黃髥宰相)이라 불렀네.“ 했다.
3. 후손 활약
용헌 선생의 후손 중에는 선대의 뜻을 받들어 충의(忠義)를 실천한 선비들이 많다. 망헌(忘軒) 이주(李冑)는 연산조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진도로 귀양 갔으며 갑자사화 때는 궐내에 대간청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로 극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임청각 집안에는 10 명의 독립운동 수훈자가 배출되었다. 석주 선생은 독립운동에 나서며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나라가 독립되기 전에는 절대 귀국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또한 임진란 때 청도(淸道) 5의사(五義士)인 이경(李磬), 이해(李海), 이염(李溓), 이잠(李潛), 이철(李澈)은 왜적에 맞서 칼을 빼어들었으며 병자호란 때는 이 장, 이하(李瑕) 형제가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제 때 항일 투쟁을 한 매운(梅雲) 이정희(李庭禧) 지사 등 이루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4.연혁
원래 용헌과 망헌을 향사하던 명계서원(明溪書院)이 있었는데 안동으로 옮겨가면서 1980년대 중반에 명대대묘를 건립했으며 공의 기일인 6월 19일(음)에는 전국의 용헌공파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올리고 있다. 대묘 앞에는 종가집이 있는데 몸채는 6칸, 사랑채는 3칸 목재 와가이다.
〇 청도의 수호신인 김지대(金之岱), 김한귀(金漢貴) 선생을 모신 성황사(城隍祠)
1.소재지: 화양읍 교촌리
2배향인물
이곳은 김지대(金之岱), 김한귀(金漢貴) 양 선생을 모신 사당(祠堂)이다. 이 두 분은 청도가 낳은 큰 인물이기도 하거니와 고을이 밀양군 속현(屬縣)으로 감무(監務)가 파견된 지역에 불과했는데 후일 군수에 해당하는 지군사가 다스리는 군으로 행정단위를 승격시킨 공적이 컸음을 기리고 앞으로도 고을을 지키는 수호신(守護神)이 되어 주실 것을 기원하여 청도군민이 세운 것이다.
김지대 공은 청도 김씨 시조이며 고려 고종조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정당문학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등 제 관직을 거쳐 최 고위직 태부(太傅)에 올랐으며 김한귀 공은 공민왕조 동경도병마사(東京道兵馬使), 감찰대부(監察大夫), 개성윤(開城尹) 등 제 관직을 거쳐 고려명현이 모셔지는 선원각에 배향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두 분 모두 오산군(鰲山君)으로 봉(封) 받은 것이다. 김지대공은 오산군으로 봉호 되면서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가 되었고 김한귀공은 그 후손인데 특별히 동명의 봉호를 이어받은 것이다. 이 두 분은 나라에서 봉호뿐만 아니라 시호도 하사했는데 김지대 공은 영헌(英憲)이고 김한귀 공은 원정(元貞)이다. 두 분 시호(諡號)에 담긴 뜻에는 공직자로서 갖춰야 할 덕성과 청백을 의미하고 있으니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오래오래 본받을 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2002년 7월 30일, 청도군수 김상순, 청도문화원장 이문섭, 청도향토사학회 회장 장봉채, 청도김씨 대종친회 회장 김태우는 비문의 말미에 1998년 청도군이 늦게나마 사당을 그 터에 옛 모습대로 재건하였으니 군민 모두 기뻐함이 산과 바다와 같은 큰 기쁨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3. 연혁
창건연대는 조선 성종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이미 오산(鰲山)의 산록(山麓)에 성황사(城隍祠)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공들의 목상(木像)으로 장난치는 일이 있어 후손들이 보기가 민망하여 매장을 했고 사당은 오랜 세월을 돌보지 않아 1960년대 경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1998년, 청도군에서 복원하였으며 그 뒤 2002년에는 청도 김씨 종친회에서 거액을 들여 주위환경 보수, 조경, 진입로 확장, 포장을 하는 등 새롭게 단장하였다.
맞배지붕 3칸에 ‘城隍祠’ 가 현액되었으며 입구에 성황사 안내문 및 ‘성황사 사적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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