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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50)천연(天緣)의 땅인 월봉산(月峰山) 아래 자리 잡은 이광인(李光寅) 선생의 월항재(月恒齋)

월항재
청도신문(2025년 9월 24일)

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50)

천연(天緣)의 땅인 월봉산(月峰山) 아래 자리 잡은 이광인(李光寅) 선생의 월항재(月恒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인협회장,  교장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에 자리 잡고 있는 월항재(月恒齋)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이광인(李光寅, 1656) 선생이다. 공의 호는 월항(月恒)이며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공은 고성이씨 청도 입향조인 모헌(慕軒) () 5세손이며 증조부는 동추공(同樞公) ()이고 조부는 옥계공(沃溪公) 충의위(忠義衛) ()이며 아버지는 월간재(月澗齋) 묵헌공(墨軒公) (), 형은 경재공(敬齋公) 광익(光翼)이다.

  월항공은 1600년대 후반 고향 온막리(명대 마을)를 떠나 언양(彦陽)으로 이주하였고 그 뒤 경주로 옮겨 현재 불국사 입구 온천 호텔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3대가 통정대부인 계찰(桂札), 태빈(泰彬), 영수(英秀)를 비롯한 여러 후손들의 생가지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 집안은 집 주변에 유등 군자정 연지(蓮池)에 버금가는 연꽃 못을 축조할 정도로 재산도 넉넉하고 인물도 출중하여 많은 사람들이 크게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한 세기 정도가 지난 즈음 현손 범간(範幹) 대에 이르러 뜻한 바가 있어 선대의 온막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세거하게 되었다.

  월항재는 1976년에 건립하였으며 팔작지붕 정면 4칸이다. 족후손(族後孫) 종은(鍾殷) 월항재기 조상이 월봉산(月峰山) 아래에 태어나 고향을 떠나 월성(月城)에 살았고 다시 월봉산으로 돌아왔으니 월성이 일으킨 월봉산은 집안 천연(天緣)의 땅으로 그 달을 생각하는 정서가 되었다. 조상이 항상 달과 같이 계신다고 생각하면 후손들이 복을 받게 되고 하늘이 보호하여 흥성해질 것이다. 이 재실이 이런 곳이다라고 했으며 후손 종우(鍾佑)는 월항재 창건운(月恒齋刱建韻) 경모하고 추모하는 장소인 이곳에 조상의 영혼이 오르내리며 자손들을 보살피고 있다.”고 했다.

  2006년 후손들이 경주 대덕산(大德山), 언양 등지에 산재한 묘소를 온막동에 월항종중 세단공원(月恒宗中 世壇公園)을 조성한 뒤 이장하였다. 또 별도의 후손들을 위한 추모공원을 조성하였는데 그 공원 앞에 열아홉 어린 나이로 6.25 전쟁에 참여하여 적의 총탄에 산화한 이종관(李鍾寬) 하사의 애절한 사연을 새긴 단()과 훈장증, 공적비가 있어 발걸음을 붙들었다. 그리고 이 일을 추진하기까지 형을 잊을 수 없어 그 행적을 기어이 찾아내어 고혼(孤魂)을 위로한 종대(鍾大), 종묵(鍾黙) 형제애에 경의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공의 6세손인 재인(在寅, 18611922 )은 칠원(漆原), 군위(軍威) 현감(縣監)에 이어 언양군수(彦陽郡守)를 지냈으며 현재 언양초등학교의 설립에 크게 기여하는 등 여러 공적을 남겨 군민들이 공덕비를 세웠는데 지금도 언양향교에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2기가 남아 있다. 특히 공은 고성 이씨와 다른 문중 사이에 유호연지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을 때 관찰사 등 여러 요로를 통해 그 정당성을 확보하여 마침내 승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인재들이 각계 각층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탐방 138 모리재 편에 자세히 소개한 바가 있다.

  이날 후손인 종묵(鍾黙, 전 대종회장), 승현(承賢, 종중 문장), 승원(承杬, 회장), 승광(承光, 감사), 석형(碩衡, 모헌종중 총무), 동원(東元, 월항종중 총무)께서 월항종중 발전사 등의 자료를 펼쳐놓고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월항재기
월항종중 세단 표성비
월항재 창건운
고 육군하사 이종관 공적비

 

월항재 문중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