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49)
효심이 지극했던 증 동몽교관(童蒙敎官) 양규적(梁圭勣) 선생의 추원재(追遠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前 청도문인협회장, 前 교장
청도군 청도읍 용각산 아래 덕암리(德巖里)에 자리 잡고 있는 추원재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호가 만오당(晩悟堂)인 양규적(梁圭勣) 선생이다. 공은 용성부원군파(龍城府院君派) 남원 양씨(南原 梁氏) 입향조로 증 동몽교관(童蒙敎官)이다.
공의 파조(派祖)는 고려 원종 때 삼별초난을 진압하여 그 공로로 용성부원군에 봉해진 양주운(梁朱雲)이며 조선 성종 때 청백리로 포록(褒錄) 되었으며 함양군 수동면 구천서원(龜川書院)에 배향된 병조참판(兵曹參判)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 일노당(逸老堂) 관(灌)이 공의 7대조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심이 있었는데 7세 때에 부친을 잃고 어른들처럼 애통했으며 홀로 남아 있는 모친을 모실 때 항상 뜻을 거슬리지 않았으며 모친이 중환으로 자리보전을 하고 있을 때 모친 대신 자신의 수명을 바치고자 하늘에 기도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을 피해 모친을 업고 남원 땅에서 경남 밀양 무가리(茂加里)에 이르렀으며 그 뒤에 덕암리로 옮겼다.
피난 중 생활은 무척 곤궁하였으나 모친을 지극정성 간호하여 주위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학업을 연마하여 학행이 높았으며 성품이 굳고 깨끗하고 권세나 이익에 욕심을 내지 않으며 스스로 소박한 생활을 편안히 여겼고 경전을 연구하며 도를 닦았다. 그리고 부모님을 봉양하는 뜻을 가훈으로 삼아 자손에게 남겼다. 지금도 후손들이 그 뜻을 잊지 않고 학문과 효행이나 자선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많다.
추원재는 1895년 창건한 뒤 1962년에 중건했으며 정면 4칸이고 하당과 대문채가 있다. 마루 벽면에 1903년에 송재직이 지은 ‘추원재기’와 1963년에 박효수(朴孝秀)가 쓴 ‘추원재기’‘ 후손 대호(大鎬)가 지은 ‘추원재 상량문이 걸려 있으며 건축 당시 종손 해진(海震)을 비롯한 협의 임원 28명의 명단도 판에 새겨 걸어 두었다.
박효수는 ‘추원재기’에 “ 여러 후손이 함께 논의하여 재계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재실을 지었다. 추원(追遠)'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잊지 않고 생각하며 욕됨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는 양씨 집안 선조들이 예의범절에 밝았다는 것을 아는데, 지금 여러 자손들이 선조의 뜻을 이어받으려 노력하고 있으니 더욱 감회가 새롭다. 선조의 행적을 잇는 데 열심이니 어찌 공이 남긴 은혜가 아니겠는가? 반드시 만오공(晩悟公)이 남긴 도리를 밝혀서 밭을 갈며 책을 읽고 효성과 우애를 다해야 한다. 또 일노공(逸老公)의 맑은 덕을 추모하며 스스로 절개를 지키고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 그런 후에야 재의 이름을 지은 뜻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그대들의 자손이 또 각자 여러분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으면, 이 재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양씨 가문은 갈수록 창성할 것이다. 서로 격려하고 힘써야 한다. 공사를 마치고 와서 기(記)를 써달라고 요청한 사람은 후손 해조(海祚)이다.”
대호는 상량문에 “상량후에는 날개를 퍼덕이며 힘차게 날아서 복록이 영원히 번창하기를 바란다. 밝은 천명을 찬란히 드러내며 지켜가되 끝까지 신중하라. 인간 관계를바르게 하며 가까운 혈족에게 정을 두텁게 하라. 멀리 바라보며 근본을 따를 때 덕이 두터워진다. 더욱 분발하여 꿋꿋이 정진하라.” 고 했다.
이날 후손인 성식(成植, 문중 총무)씨가 재실을 안내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