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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46)서당을 열고, 의병 창의를 했던 숭록대부(崇祿大夫) 김춘업(金春業) 선생의 추모재(追慕齋)

추모재
청도신문(2025년 7월 23일)

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46)

서당을 열고, 의병 창의를 했던 숭록대부(崇祿大夫) 김춘업(金春業) 선생의 추모재(追慕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인협회장,  교장

 

  청도군 청도읍 송읍리 안송읍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추모재(追慕齋)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김춘업(金春業, 1567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보현(輔賢)이다. 일찍이 서당을 개설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임진왜란 때는 맹서문 10조를 높이 외치며 창의했다. 증 숭록대부(崇祿大夫)이다.

공의 8대조 첨검(添劒)은 여조(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한 김해 김씨 판도판서공파 시조이다. 공의 아버지는 두(+)이다. 그는 호가 경암(敬庵)이며 벼슬이 지평(持平)이었는데 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화를 당했다.

  춘업공의 아들 유후(有後)는 증 통정대부 병조좌랑(通政大夫兵曹佐郎), 현손 계찰(繼札)은 증 가선대부(嘉善大夫)이었으며 준찰(峻札)은 청도향교 사락루(思樂樓) 중건시 예조(禮助) 천금(千金)을 헌성(獻誠)하여 크게 칭송받았다. 일찰(鎰札)은 통정대부 좌윤(通政大夫左尹)이었다. 5대손 진만(進萬)은 선전관(宣傳官)이었고 6대손 세구(世九)는 증 통정대부 절충장군(通政大夫 折衝將軍) 행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성구(聖九)는 가선대부중추부사(嘉善大夫中樞副使)였다.

  7세손 귀영(貴榮)은 증 통훈대부 군자감 공조좌랑(通訓大夫 軍資監 工曹佐郎)이었으며 귀정(貴鼎)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3년간 시묘를 했으며 증 통정대부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通政大夫 折衝將軍 龍驤衛副護軍)이었다.

귀정의 아들 8세손 상은(尙殷)은 호가 송재(松齋)이며 부모님이 병환에 있을 때 6년간 변의 맛을 보며 간병했다. 이 효행을 경상도 순무어사(慶尙道 巡撫御史)가 알고 표창하는 비를 세웠다. 주구산에 재실과 비각이 있으며 송읍리에 불망비(不忘碑)가 있다. 상은의 동생 덕은(德殷)의 부인인 안인(安人) 밀양 박씨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막내 시숙(秉殷)이 후사가 없자 둘째 아들(祥瓚)로 대를 잇게 했고 또 큰집(상은)에서 대가 끊어지게 되자 자기 집은 비워두고 맏아들(朝瓚)을 양자 보냈다. 뒤에 조찬의 둘째 아들 익홍(翼洪)으로 대를 잇게 되었다. 지극하고 숭고한 우애이다. 희은(希殷)은 증 통정대부 병조좌랑(通政大夫 兵曹佐郎)이었고 10세손 승홍(昇洪)은 돈령부정감역(敦寧郡正監役) 겸 도사중추원 예조좌랑(都事中樞院禮曹佐郎)을 지냈다. 기홍(基洪)은 헌전의금부도사(軒前義禁府都事)였으며 11세손 경윤(景潤)은 통정대부였으며 경한(景漢)은 목릉참봉(穆陵參奉), 12세손 보영(普泳)은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보영의 아들 13세손 상순(相淳)은 금릉, 달성, 성주, 영일, 청도 군수를 역임했다.

  추모재는 1591년 경 춘업 공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는데 1900년 경 경부선 철도의 건설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그 후 오랜 세월 풍우에 노후되어 후손들이 힘을 합쳐 1997 4 20( 3 14) 팔작지붕 겹처마 전면 5칸으로 중창했다. 마당에 청도군수를 지낸 상순의 기념식수가 있고 후예인 명술의 풍각면 금곡리 산 96(32,529)을 기증한 공적을 기리는 감사비가 세워져 있다.

  이날 후손인 정석(廷錫, 청도 군청공무원 퇴임, 청도향교 이사)씨가 재실 관련 자료를 내어놓고 안내해주었다.

 

추모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서당 열어 후학 양성 의병 창의 맹서하니

대대로 이어받아 효도하고 나라 사랑

칭송의 소리 높도다 길이 빛날 추모재

송재 김상은 불망비
감사비
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