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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44)운문(雲門) 산수(山水)를 사랑하며 제자를 길러냈던 석치호(石致虎) 선생의 은구정(隱求亭)

은구정

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44)

운문(雲門) 산수(山水)를 사랑하며 제자를 길러냈던 석치호(石致虎) 선생의 은구정(隱求亭)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인협회장,  교장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명포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은구정(隱求亭)을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석치호(石致虎, 18161866)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자는 운서(雲瑞)이며 호는 금계(錦溪)이다. 공은 밀양 출생이지만 운문(雲門) 산수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세 아들을 데리고 명포 마을에 택거했다. 그 이후 은구정(隱求亭)을 짓고 농사와 독서로 생활하며 자식들을 교육하고 또한 많은 제자를 길러내니 감화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충주 석씨의 시조 석린(石鄰) 1176(고려 명종6)에 서북병마사(西北兵馬使)가 되었고 상장군(上將軍)으로 거듭 올랐다. 뒤에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삼았다. 예성은 충주의 옛 이름이기 때문이다.

석린의 6세손 양선(良善)은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봉해졌고 양선의 손자 여명(汝明) 1374(공민왕 23)에 성균관 생원으로 을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나 고려의 멸망과 함께 두문불출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太宗)이 집현전 제학을 내렸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사후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여명(汝明)의 아들 문성(文成)은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졌다. 또 성옥(成玉)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으나 연산군 시절 벼슬을 버리고 밀양에 숨었다. ()은 건공장군(建功將軍), 진백(振伯)은 가선대부 용양위부호군(嘉善大夫 龍驤衛副護軍)에 올랐다.

금계공의 아들 조은 세중(釣隱 世重)은 학행이 높았고, 가은 세형(稼隱 世衡)은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으며 초은 세관(樵隱 世寬)도 통정대부였다.

  1975년에 오래된 건물을 헐고 새로 중건한 은구정은 팔작지붕 정면 5칸이다. 증손 병식(炳植)은 은구정 중건 사실기(事實記) 백 여 년의 세월이 지나자 풍우에 정자가 기울어지자 증손 병우(炳玗)가 여러 종친과 옛 제자 가문에 물어 중창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자 그 아우 병달(炳達)이 형의 아들 덕균(德均)과 더불어 옛집을 복원했다. 이에 우리 종족은 서로 도와서 선정(先亭)을 보수하니 무궁하리라.” 했다.

  도주 김재화(道州 金在華) 은구정기 진실로 후손들은 할아버지 생각을 하며 덕을 닦아서 구하는 뜻을 채우면 반드시 행의가 달통한 선비가 되리라 했으며 죽계 안용호(竹溪 安龍鎬) 은구정 상량문에 상량한 뒤에는 숨은 덕이 더욱 빛나는 속에 효도와 우애로 꽃다운 법을 전하리라했다.

  증손 병달은 은구정운(隱求亭韻) 운문 일월은 명포로부터 열고 금수(錦水) 연원은 대천(大川)에서 일어난다. 선대를 기술하고 전함은 모두의 책임이 되느리라.” 했으며 주손(胄孫)인 학균(鶴均) 은구정 액자를 다시 찾아서 걸게 되니 隱求란 글자가 다시 밝고 뚜렷하다. 바른 걸음이 되려면 아주 작은 것도 어김이 없고 마음 가짐은 항상 저울을 달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날 후손 준균(晙均, 전 금천 새마을금고 이사장, 전 평화통일 정책자문위원)씨가 선대의 자료를 내어놓고 자세히 안내해주었다.

은구정이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양지바른 냇가에 자리 잡은 명포마을

금계옹 높은 덕으로 많은 제자 길러냈네

오늘도 글 읽는 소리 가득한 은구정

 

은구정기
은구정 상량문
은구정 운
은구정 사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