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41)
후학들을 훈도하며 덕행이 높았던 손성운(孫聖運) 선생의 모선재(慕先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前 청도문인협회장, 前 교장
청도군 풍각면 월봉2리(묘봉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모선재(慕先齋)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손성운(孫聖運)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경숙(敬淑)이다. 1781년(정조 5)에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공은 뜻한 바가 있어 월봉리로 이거한 밀양 손씨 좌사전공 5세손 태보파(台輔派)의 청도 입향조로 후학들을 훈도하는 속에 덕행이 높았다.
밀양 손씨 시조는 손순(孫順)이다. 그는 신라 흥덕왕 10년에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묻으려 한 효행이 왕에게 알려져 신라의 국효(國孝)로 일컬어졌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그의 맏손자 익감(翼減)도 공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지면서 밀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 공의 7세손인 긍훈(兢訓)은 중흥조(中興祖)로 대작갑사(大鵲岬寺, 지금의 운문사)에 상시 주둔하며 장군평(將軍坪)에서 임전 태세를 다졌다. 후삼국 통일의 공훈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오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졌다. 고려 태조의 칙령으로 운문산 수호신으로 조영당(祖影堂)에 영정을 봉안하여 향사를 받들고 있다.
공의 9대조 태보는 진사(進士)이며 6대조 사숙(士淑)은 장사랑(將仕郎)이었고 증조부 창세(昌世)는 가선대부(嘉善大夫)였으며 할아버지는 우영(祐永), 아버지는 덕재(德載)이다. 후손 중 종해(鍾海)는 경기 인천 지방병무청장을 역임했고 상욱(尙煜)은 대검찰청 부장검사이다.
1943년에 창건한 모선재는 팔작지붕 정면 4칸으로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마루에 붙여 기단을 올려 누각 한 칸을 별도로 배열했으며 양옥슬라브 관리동 한 채도 독립 공간에 있다.
손석유(孫錫維)는 ‘모선재기’에 “주손(胄孫) 홍석(弘錫)이 재실을 짓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작고하자 춘석(春錫), 동석(東錫), 성갑(性甲) 등 전 종원들이 힘을 합쳐 재실을 창건했다. 이 재실에 조상을 받들고 유림들을 접대하며 자손들을 가르치며 날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 경주인 최증묵(崔增默)은 재실 창건을 축하하는 경차모선재운(敬次慕先齋韵)에 “建築斯齋幾載營 이 재실을 짓고 꾸리는데 몇 해가 걸렸는가/ 當然處世子孫誠 자손은 정성들여 처세에 마땅하였네/ 鄕賓來到皆稱語 고을의 손님 오가며 모두 칭찬하고/ 宗族頻酬別有情 종족들이 자주 모여 서로에게 남다른 정을 느낀다/ 大澤滔滔臨戶白 큰 못은 넘실넘실 창에 닿아 희고/ 竗峰疊疊入簾靑 묘한 봉우리 겹겹이 발에 들어와 푸르다/ 秋霜春雨應多感 가을 서리와 봄비에 응당 느낌이 많아/ 遐福箇中自此生 이 가운데 큰 복은 여기에서 생겨나네” 했다.
이날 후손인 인천(仁泉)씨가 족보 및 조상의 문헌 등 여러 자료를 내어놓고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모선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뒤에는 대나무숲 앞에는 묘봉이라
저수지 맑은 물 쉬지 않고 출렁이는 속
선대의 교훈을 새겨 이어가는 모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