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38)
각계 각층에서 후예들이 크게 활약하고 있는 이담(李潭) 선생의 모리재(慕理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前 청도문인협회장, 前 교장
청도군 금천면 김전리 모리곡에 위치한 모리재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옥계공(沃溪公) 이담(李潭)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평생 동안 언행이나 문장에 앞서 실천함을 소중히 여겼으며 무오, 갑자사화가 오래되지 않은 터라 벼슬에 나가지 않고 효성과 우의, 충의를 깊게 지키는 속에 후학을 가르치며 향리에서 일생을 마쳤다. 묘소는 모리곡(慕理谷) 건좌(乾坐)에 있으며 방후손 종기(鍾夔)가 지은 묘갈명이 있으며 향사는 양력 4월 첫째 주 일요일에 받들고 있다.
용헌(容軒) 원(原, 좌의정, 철성부원군)의 6세손이며 고성이씨 입향조인 모헌(慕軒) 육(育, 찰방)의 증손이고 조부는 교(郊, 참판), 아버지는 반(礬, 동지중추부사)이다. 아들은 민(珉), 오(璈), 륵(玏), 주(珠), 용(瑢), 장(王+將), 하(瑕)가 있다.
모리재는 모리곡에 자리 잡고 있기에 ‘慕理齋’라 했으며 사백여 년 전에 창건되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노후하여 1935년 후손들이 합심하여 칠동육가(七棟六架, 일곱 개의 기둥에 여섯 칸의 집)에 부엌과 창고를 곁들인 웅대한 재사를 새로 지었다. 1936년 족후손 준형(濬衡,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아들로 독립운동가, 법흥파 31세)이 모리재 기문을 썼다. 그는 기문에 “사람들은 옥계공의 후손들을 칭찬하기를 긍구긍당(肯構肯堂, 조상의 일을 잘 이어받음)을 한다고 하니 선령(先靈) 또한 기뻐할 것이다. 이 ‘모리재’ 현판을 달면서 후손들은 더더욱 분발하여 이어가면서 권면(勸勉)을 해야 할 것이다.”했다.
그런데 이렇게 규모가 큰 재실이었지만 60여 년이 흐른 뒤, 다시 풍우를 이기지 못하자 1997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목재를 쓰지 않고 벽돌 슬라브집으로 중건했는데 1998년 종후생(宗後生)인 인기(仁基)가 ‘중건문’을 썼다.
공의 후예들이 사회 각계 각충에서 크게 활약을 했다. 그 명단을 요약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무산재(無山齋) 후손: 진희(振羲, 국회의원, 청와대 대변인, 문공부 장관), 상희(祥羲, 국회의원, 과학기술처 장관), 월간재(月澗齋) 후손: 영창(永昶, 치안본부장, 국회의원), 승곤(承坤, 외무부 특명전권대사), 승구(承玖, 검찰청 검사장), 종명(鍾明, 육군대령, 국회의원), 원동(元東, 청도군수) 경의당(景義堂) 후손: 창의(昌羲), 청와대 경호실장), 도희(道羲, 고성이씨 대종회장), 승열(대구종친회장, 모헌종중 문임), 경선재(景先齋) 후손: 효수(孝秀,영남대 총장), 승계(承桂, 판사), 정아(변호사), 인영(성균관대 교수), 종규(육군준장, 사단장), 사원재(思遠齋) 후손: 은형(국민대학교 경상대 학장), 아형(부산외국어대학 교수), 월항재(月恒齋) 후손: 태기(台基, 해군대령), 광기(光基, 대구향교 전교), 종배(鍾培, 병무청 차장), 종묵(鍾黙, 고성이씨 대종회장), 병주(炳周, 경제학 박사, 공정거래위원회 상임위원), 종석(鍾碩, 변호사), 종은(鍾隱, 군무서기관, 국방통신무선대장), 광주(光周, 서기관 진주시 건설국장), 종율(鍾栗, 목회학 박사, 기독교 목사), 승출(承出, 서기관), 승규(承奎, 부이사관), 승구(承丘, 상담학 박사, 고용노동부 연구관), 경진(京珍, 美UCLA 영문학박사), 승주(承柱, 건축기술사), 성민(成敏, 영문학 박사), 승만(承滿, 서기관), 승봉(承鳳, 육군중령), 동원(東元, 공학박사, 경북대), 동욱(東昱, 전자공학 박사, 포항공대), 동수(東秀, 해병대 중령), 동일(東一, 문학박사)
이날 주손인 인형, 종권(모리재 회장), 시형(재무), 원동(전 청도군수), 종해, 승관, 원희 씨가 재실을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