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36)
양촌(陽村) 근(近)의 후예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권기세(權起世) 선생의 적암재(赤巖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前 청도문인협회장, 前 교장
청도군 매전면 내리에 자리잡고 있는 적암재(赤巖齋)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권기세(權起世)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이중(彛仲)이며 통훈대부(通訓大夫)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공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왔다가 이곳 내리에 정착한 입향조이다.
안동 권씨의 시조는 행(幸)이다. 그의 본래 성은 신라 왕실의 김씨였으나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 때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을 격파하였다. 이에 태조가 삼중대광(三重大匡) 대상(大相) 품계를 내리고 통합삼한보사벽상아부 공신(統合三韓保社壁上亞父功臣)으로 삼았으며 신라 김씨에서 안동 권씨로 사성(賜姓)했다.
정간공(靖簡公) 희(僖)의 넷째 아들이며 안동 권씨 추밀공파(樞密公派) 파조인 근(近)은 호가 양촌(陽村)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색, 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조선왕조의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었다 그 뒤에 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길창군(吉昌君)에 피봉되었으며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그가 지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퇴계 이황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규(跬)는 태종의 부마이며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었으며 그의 장자 담(聃)은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냈다. 그의 둘쩨 아들 훈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과 현감(縣監)을 지냈다.
군자감정 공의 고조부 노(輅)는 현령(縣令)을 지냈고 증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부총관(同知義禁府副摠管)이었고 증조부 경(憬)은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할아버지 효생(孝生)은 성균관 생원이었다. 아버지는 상중(尙中)이다.
아들 극경(克經)은 통정대부 장예원판결사(通政大夫 掌隷院判決事), 달경(達經)은 금산군수(錦山郡守)를 지냈고 손자 유선(有善)은 자헌대부(資憲大夫) 증 한성좌윤(漢城左尹), 유협(有協)은 장사랑(將仕郎)을 지냈다. 증손 만귀(萬貴)는 가선대부 중추 용양위부호군(嘉善大夫, 中樞 龍驤衛副護軍), 만보(萬保)는 정포수군만호(井浦水軍萬戶)를 지냈으며 대대로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적암재는 팔작지붕 목조와가 4칸 재사이다. 1965년에 창건하였지만 노후하여 헐고 2011년에 후손들이 힘을 합쳐 새로 중건하였으며 마루에는 권상규(權相圭)가 지은 ‘적암재기’가 걸려 있다. 재실 전면에는 ‘봉조정(蓬祖亭)’이 현액된 솟을대문이 있다. 이 재실을 중건할 때 후손 광기는 문전옥답 914평을 팔아서 6,120만원을 희사했는데 이는 본채 건립비용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 갸륵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赤巖內洞 安東權氏 光基 誠金碑’를 대문 앞에 세웠다. 그 비석 옆에 11세손 정복(貞福)이 근찬한 ‘적암재 준공기념비’와 후손 우현이 지은 ‘축원문’도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날 후손 정복, 순배씨가 족보 등 문중 자료를 펼쳐놓고 설명해주었다.
‘적암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육화산 기슭에 안동 권씨 적암재
양촌 선생 후예답게 이어진 학문과 벼슬
조상의 음덕 기리며 뜻을 세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