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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32)임진왜란 때 창의를 한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 이경(李磬)선생의 충의재(忠義齋)

충의재
청도신문(2024년 12월 26일)

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32)

임진왜란 때 창의를 한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 이경(李磬)선생의 충의재(忠義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인협회장,  교장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에 자리잡고 있는 충의재(忠義齋)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이경(李磬) 선생이다. 공의 자는 태원(太元)이며 고성이씨 청도 입향조인 모헌공(慕軒公) ()의 손자이며 증 공조참판(工曹參判) ()의 다섯째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맑고 욕심이 적어 일찍부터 영달을 추구하지 않고 수신제가(修身齊家)와 학문 정진에 뜻을 두었다.

  그러던 중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이때 청도군수는 관졸을 데리고 피신하였고 백성들은 갈팡질팡 산으로 숨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러한 난리 통에 공은 침착하게 중심을 잡고 문중 종숙질 사이인 해(), (), (), ()과 창의할 것을 결의하고 장정들을 모집했다. 가재(家財)를 풀고 종과 머슴까지 설득하고 고을의 유생들과 창의 맹약문과(倡義 盟約文)과 격문(檄文)을 발표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맹세했다.

  공은 먼저 청도, 매전, 금천의 장정 및 적천사 스님과 합세하여 대구로 향하는 적의 주요 통로인 유천과 오례산성(烏禮山城)을 방어하는데 주력하였다. 또 지세와 지형을 이용하여 국지전과 유격전으로 적을 교란시켜 사기를 꺾었다. 특히 유천 전투에서는 격전을 벌여 많은 왜군을 참륙(斬戮)했고 그 뒤에도 야간 복병 및 기습 작전 등으로 적의 증원군 및 후방 보급을 차단시켰으며 뒤에 곽재우 장군의 부대에도 합류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를 역임했다. 공의 활약상은 고성이씨 세덕지(世德誌)’에 소개되어 있다.

  고성이씨 다섯 의사는 화양읍 유등리 원산 자락에 민족 백대에 충신의사의 귀감으로 유방백세(流芳百世)에 빛나리라란 글귀가 새겨진 임란창의 5의사 숭모단에 모셔져 있고 또 대구 망우당 공원에 세워진 영남호국 충의단에도 배향되어 있다.

  전면 4칸인 충의재는 1996년에 창건했으며 처음에는 삼호재(三湖齋)로 명명했다가 뒤에 충의재로 바꾸었다. 오랜 세월 조상을 모실 재실이 없어 안타까워 하던 중 13대손 승옥 (承玉)이 재실 터를 제공하고 승일(承日)이 건물을 지어 헌성했다. 그 뒤 두 형제의 모선(慕先) 정신에 감화하여 삼호회 기금 6천만원으로 관리사 부지를 확보하고 도장과 조경을 하고 축대를 쌓았다. 대청 벽에 三湖齋 옛 현판이 걸려 있으며 후손 승헌은 국한문 혼용으로 쓴 忠義齋記 옛 성현의 말씀에 인()의 진수는 어버이를 섬김에 있고 의()의 진수는 형을 따르는 것이라 했으며 또 임금을 섬겨 목숨을 바치는 것을 충()이라 하고 국가가 위급할 때 몸을 바쳐 구하는 것을 의()라 했으니 모두 효()에서 나와 효도로서 집안을 보존하고 충의로서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중에 우리 13대조 형제는 효우(孝友)로서 집안을 보존하였고 또 충의로서 나라를 지켰으니 이로 인하여 재실 이름을 忠義로 하였다.”고 하였다.

  이날 후손 승화(承華, 청도, 고성이씨 모헌공 종중 문임)씨가 재실을 안내하며 설명을 해주었다.

 

충의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붓 대신 칼을 들고 깃발 세워 호령하던

선대의 거룩한 뜻 후대들이 이어가니

충의의 푸른 기상이 갈수록 드높구나

 

충의재기
예빈시 봉사 이경 선생 묘비

 

향사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