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31)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절충장군(折衝將軍) 전윤용(全潤龍) 선생의 동산재(東山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前 청도문인협회장, 前 교장
청도군 풍각면 흑석리(黑石里)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동산재(東山齋)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전윤용(全潤龍) 선생이다. 공은 대구에서 이곳 흑석에 새 터를 잡아 옮긴 옥산전씨(玉山全氏) 흑석문중 입향조이며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고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냈다.
공의 6대조인 백영(伯英)은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공민왕 때 문과에 올랐다. 조선 개국 후 대사헌(大司憲),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등을 거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예판(禮判), 경기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그가 별세하자 조정을 3일 동안 열지 않았으며 문평(文平)이란 시호를 내렸다.
5대조 유성(由性)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평해군수(平海郡守), 선공부정(繕工副正)을 지냈으며 할아버지 순(珣)은 통덕랑(通德郞)이었으며 아버지 응창(應昌)은 퇴계 문인으로 호가 세심정(洗心亭)이며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함안군수, 충청도사(忠淸都事)를 지냈다.
삼촌인 경창(慶昌)은 호가 계동(溪東)이며 퇴계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등을 거쳐 영변통판(寧邊通判)이 되어 치적을 올렸다. 논의가 강직하고 성리학에 밝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고 대구지역의 성리학을 연 분으로 유림의 중심 인물이었다. 아들 기영(起榮)은 예빈시(禮賓寺主簿)였다.
동산재는 윤용 공의 증손인 우승(宇升)이 할아버지를 위해 지어 선조의 유덕을 추모 숭상하고 자손들의 강학을 하던 곳이다. 이름은 동산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 산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1909년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는데 1949년에 여러 후손들이 힘을 합쳐 새로 중건했다.
건물구조는 목조 와가 3칸과 대문채 3칸, 양옥으로 된 관리동이 있다. 마루에는 도주(道州) 김재화(金在華)가 짓고 서흥(瑞興) 김희연(金煕淵)이 쓴 ‘동산재중건기(東山齋重建記)와 정화식(鄭華植)이 지은 ’동산재 서헌소기(東山齋 西軒小記)’가 걸려 있다. 마당에는 ‘옥산 전씨 도사공파 흑석문중 제단’과 ‘제단비’가 있다. ‘제단비’에는 고려조의 신호위대장군을 지낸 시조 영령(永齡)을 비롯한 선대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흑석문중은 충청도사를 지낸 응창에서 비롯됨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재실 마당에는 병락(柄洛)의 공덕비(功德碑)가 있다. 병락은 도사공 응창의 11세손으로 일제 식민지 치하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생 끝에 큰 재산을 일구었다. 1950년도 말에 귀국한 그는 흑석문중(黑石門中)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선뜻 거금인 답(畓) 천 평을 문중에 희사하여 지금까지 문중의 대소사가 어려움 없이 잘 추진되게 했다. 이에 문중에서 그 뜻을 기리고자 공덕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글은 병걸(柄傑)이 썼다. 제단에는 도사공을 비롯하여 그 후손 여러 신위를 모시고 있다. 이날 후손인 진환씨가 설명을 해주었다.
‘흑석문중’이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앞에서 끌어 주고 뒤에 밀어주며
조상의 뜻 받드는 옥산 전씨 흑석문중
헌신적 자애의 마음 유림의 귀감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