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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29)은일(隱逸)의 선비였던 성균진사(成均進士) 장방한(蔣邦翰) 선생의 만향재(晩香齋)

만향재
청도신문(2024년 11월 13일)

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29)

은일(隱逸)의 선비였던 성균진사(成均進士) 장방한(蔣邦翰) 선생의 만향재(晩香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인협회장,  교장

 

  청도군 화양읍 신봉리(새터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만향재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국헌(菊軒) 장방한(蔣邦翰, 16161691) 선생으로 본관은 아산(牙山)이다.

  장()은 본래 중국의 나라 이름이다. 주공(周公)이 아들 백령(伯齡)을 장()에 봉한 뒤 그대로 성을 장()이라 했다. 그 뒤에 여러 세대를 지나 송나라의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신경위대장군(神慶衛大將軍)을 지낸 서()가 금족(金族)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충청남도 아산에 오게 되었다. 고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송나라에 알렸는데 아산군(牙山君)으로 봉하고 식읍을 하사하게 했다. 이에 관향을 아산으로 쓰고 시조가 되었다. 그 증손 숭()은 호가 천산재(天山齋)이며 정록대부(正錄大夫) 군기감사겸 통총판군감시사(軍器監事兼統摠判軍監寺使)였다.

  청도의 입향조는 승훈랑(承訓郎)과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낸 희윤(希尹)이다. 그는 국헌공의 증조부이다.

국헌공은 1616(광해군 8)에 각남면 향인촌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릴 때부터 깨달음이 빨라 12세에 경사(經史)를 두루 읽었으며 그 4년 내에 연방(蓮榜, 소과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의 명부를 적은 글)에 오르고 37세에 성균진사(成均進士)로서 반궁(泮宮, 성균관과 문묘를 통틀어 이르는 말)에 거처하였으며 학문의 명망이 조정과 재야에 널리 알려져 장래가 촉망한 인물로 각광 받았다. 그러나 공은 벼슬에 뜻이 없어 화악산 기슭에 은거하여 학문하고 시를 읊으며 의연하게 지냈다.

  공은 일찍이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형제 간에도 우애가 남달리 두터웠다. 이요재(二樂齋) 장방익(蔣邦翼, 양헌(養軒) 장방호(邦豪) 두 형님과 더불어 학식과 덕망이 난형난제(難兄難弟)라고들 하였다. 향인촌 화계사(華溪祠)에 나란히 배향되었는데 이곳 화계정사는 큰 형인 이요재가 강학을 베풀던 곳이었는데 형이 몰(歿)한 뒤에는 공이 이어받아 후진양성을 한 곳이다.

  국헌의 아들인 희재(熙載)는 지방에서 실시한 과거 초시인 향시(鄕試) 3번이나 합격하는 등 명성이 높았다. 역시 국헌의 후예인 복암(復庵) 장화식(蔣華植)은 조선 말기 청도의 삼학사 중 한 분이다.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했으며 돌아가셨을 때 유림들의 애도 속에 유림회장(儒林會葬)을 치렀다. 복암의 아들 병기(炳璣)와 병구(炳球)도 유림의 신망이 두터웠고 학문이 높았다. 봉채(奉埰)는 교장, 대종회장, 청도향교 전교, 성균관 전인(典仁)을 역임했다.

  만향재는 1996년에 창건했으며 목조 4칸이다. 박희명(朴熙明) 만향재기 중국 진()나라 도연명(陶淵明)은 국화(菊花)를 사랑하였는데 이 꽃은 서리 내리는 가을에 홀로 피어 그윽하니 참으로 선비의 자태라 하겠다. 그런 까닭으로 옛날 숨은 선비 중에는 국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 국헌 선생도 국화를 매우 사랑했으니 이 어찌 은일(隱逸)의 선비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날 후손인 정채(丁埰, 대구시 행정사무관 역임) 씨가 문중에 관한 문헌 등을 펼쳐놓고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만향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서리가 내릴수록 그 향기 짙은 국화

그 꽃에 배움 얻고 삶의 길을 열었던

국헌은 은일의 선비, 흠모하며 절 올리다

만향재지
아산장씨 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