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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28)통정대부 훈련원도정(通政大夫 訓鍊院都正) 박태명(朴泰明 선생의 첨모재(瞻慕齋)

첨모재
청도신문(2024년 10월 23일)

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28)

통정대부 훈련원도정(通政大夫 訓鍊院都正) 박태명(朴泰明 선생의 첨모재(瞻慕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인협회장,  교장

 

  청도군 풍각면 덕양리 송월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첨모재(瞻慕齋)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박태명(朴泰明, 16481743) 선생이다. 본관은 밀성(密城)이고 호는 진암(眞庵)이다. 공은 정국군 위()와 이조판서 기()의 후예이다. 고조는 장사랑(將仕郎)을 지낸 근()이고 증조는 밀양 부북면 대항리 정촌 마을로 이거한 파조(派祖) 충찬위(忠贊衛) 세건(世健)이다. 조부는 별시위(別侍衛) 수번(秀蕃), 아버지는 무과에 올라서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이었으며 증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된 도은 순생(棹隱 順生)이다.

  진암공은 1676(숙종 2)에 무과에 올라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가 되었고 그 뒤에 참군(參軍), 주부(主簿), 경상우도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통훈대부(通訓大夫) 오위(五衛) 호군(護軍)을 거쳐 1712(숙종 38)에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직을 맡았다. 공은 재직 중 가난하고 고생하는 고을의 백성들을 힘껏 구제하였다. 흉년이 드는 해에는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기에 백성들이 그 애민의 공덕을 칭송하며 우러러 따랐다. 한편 효도와 우애를 근본으로 한 삶을 실천했기에 가정은 늘 안온하고 화목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예도가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슬퍼하였으며 시묘살이 내내 죽만 먹었던 하늘이 낸 효자였다. 장수하여 96세에 졸하였는데 묘소는 밀양 청도면 천주산에 있다.

  아들 경당 석희(耿堂 碩禧)는 조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를 따라 시묘살이를 할 때 큰 범이 울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독서와 무예 단련을 하였으며 1685년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 관청에 사용(司勇)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 부사정, 사과(司果), 사직, 통훈대부 용양위부호군, 1745(영조 21)에는 통정대부 절충장군이 되었다. 향년 84세였다.

  손자 상문(尙文)은 호가 송강(松岡)이다. 그는 조부 진암공과 아버지 경당공의 지혜를 이어받아 겨우 말을 할 때 아버지가 문자를 가르치면 문득 깨우쳐 오래 기억하였다. 장성한 뒤에는 침식을 잊고 독서를 하기도 했다. 그는 건장한 체구에 성품이 겸손하고 포용력이 있어 일가나 향민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그 역시 타고난 효자로 어머니가 급환으로 사경을 헤맬 때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드리워 회복을 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효심이 알려져 조정에서 표창하고 통덕랑(通德郞)을 제수했다. 1750(영조46) 경 밀양 고법(古法) 팔방리(八方里)를 떠나 풍각 송월리로 이거하였다.

  첨모재는 2004년에 창건한 슬라브 양옥집이다. 마루에는 첨모재기(瞻慕齋記)가 걸려 있고 마당에는 통정대부 훈련원도정 박공 유허비(通政大夫訓鍊院都正朴公遺墟碑)’가 있다. 기문 및 비문은 김범수(金範洙, 전 대학교수)가 썼다. 그 이전 1959년에 지은 목조와가 송강재(松岡齋)가 있었으나 새로 지으면서 이름도 바꾸었다. 첨모(瞻慕)는 선조의 은혜와 음덕을 사모한다는 뜻이다.

이날 후손 지일(志一) 씨가 문중의 문서 및 족보를 내어놓고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송월 마을이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솔 위에 달 걸리고 조상 음덕 서린 곳

이팝꽃 향기 속에 풍년가 가득하니

후손들 첨모재 모여 오래오래 기린다

 

유허비
첨모재 기문
첨모재 전경
마을 입구의 이팝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