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26)
의령 남씨(宜寧 南氏) 청도 입향조인 남도후(南圖厚) 선생의 필경재(必敬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前 청도문인협회장, 前 교장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에 자리잡고 있는 필경재(必敬齋)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남도후(南圖厚)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자는 천숙(千叔) 호는 거연(居然)이다. 공은 1666년(현종 7) 경기도 화성(華城)에서 출생했으며 1685년(숙종 11) 경 화양읍 유등리에 입향하여 자연 속에 살며 아들과 손자를 교육하며 유림들과 교유하며 지냈다. 그 뒤 1700년 대에 증손 두채(斗采)가 유등리에서 토평리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의정(領議政)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충경공(忠景公) 재(在), 중직대부예문관직제학(中直大夫藝文館直提學) 간(簡),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증 호조참판(戶曹參判) 준(俊)이 공의 선대이다.
손자 건만(建晩)은 호가 청암(淸庵)이며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냈다. 박효수는 비문에 “재주 있고 지혜롭고 용맹함은 하늘로부터 타고나서 선비의 세 가지 품위인 삼품(三品), 즉 도덕 공명 부귀를 차례로 쌓아 올렸으니 우연이겠는가? 훌륭한 명성이 자자했고 문헌에 증거할 만한 내용이 넘쳐난다.”고 했다.
증손 두채는 호가 청재(淸齋)이며 뜻이 돈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주변에 따르고 칭송하는 사람이 많았다. 현손인 훈천 영식(塤泉 永植)과 지천 영로(篪泉 永老)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있고 문행이 있었다.
5세손 명교(命敎)는 우애가 지극하여 가문을 번창하게 뿌리를 내리게 했으며 붕교(鵬敎)는 효성이 지극하여 사림의 칭송을 받았으며 그 행적이 대동문헌록(大東文獻錄)에 탑재되어 있다. 7세손 도천 종우(棹泉 鍾宇)는 문행이 있었다.
의령 남씨의 시조는 남민(南敏)이다. 그의 본명은 김충(金忠)이며 원래 중국 당나라 사람인데, 일본에 다녀오는 길에 표류하다가 신라에 도착하여 귀화하였다. 신라 왕이 남쪽에서 온 사람이라 하여 남씨(南氏)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남민의 7세손인 진용(鎭勇)의 세 아들 중 맏아들 홍보(洪甫)는 영양(英陽), 둘째 군보(君甫)는 의령(宜寧), 막내 광보(匡甫)는 고성(固城)을 본관으로 하고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그중 군보를 중시조로 하는 의령 남씨(宜寧南氏)가 자손이 번성하여 남씨 중 호수가 가장 많다.
남씨는 조선시대 정승 6명, 대제학 6명, 판서 24명을 배출했다. 남이, 남이흥 장군 생육신 남효온,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도 의령 남씨이다.
필경재는 1971년에 창건했으며 목조와가 정면 4칸, 측면 1칸이며 2017년 등 여러 차례 중수했다. 마루에 박효수(朴孝秀)가 찬기(撰記)한 ‘필경재기’와 사손(嗣孫) 원현(源鉉) 및 후손 기홍(基鴻), 기수(基守), 창우(昌祐)의 재실 낙성(落成) 축하시(祝賀詩)가 걸려 있다.
이날 후손인 장근(長根, 청도향교 이사), 규하(奎夏, 청도향교 전 장의) 씨가 족보등 조상 관련 문서를 내어놓고 설명해주었다.
‘필경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토평리 한가운데 의령 남씨 필경재
선비의 덕목인 삼품 정신 우뚝하다
후대들 그 뜻 드높여 받들어 이어가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