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43)
선대의 충효 정신이 후대로 이어지고 있는 영모재(永慕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前 청도문인협회장, 前 교장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에 자리잡고 있는 영모재(永慕齋)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박광옥(朴光沃)선생으로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공은 삼우정공파의 파조인 삼우정(三友亭) 경신(慶新)의 7세손이다. 삼우정은 1573년((선조 6) 무과전시(武科殿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마침 관직에서 휴가를 얻어 섶마루 자택에 머물고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 창의를 했고 그날이 4월 23일이었으니 우리나라 의병 창의의 효시였다. 그는 의병들을 지휘하여 청도읍성을 탈환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1605년(선조 38) 어사 선무원종 1등 공신과 호성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두 아들은 각각 선무원종 2등공신이 되었다.
광옥공의 손자 정우(廷佑)는 그 아버지 상덕(象德)이 별세하자 장흘산에 토감(土坎, 묏자리를 정하기 전 임시로 흙을 덮어 둔 곳)을 한 뒤, 묘 아래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장흘산(일명:장걸산) 기슭 새정지[鳳亭]의 영모재는 그 여막터에 지은 집이다. 이곳에 1897년 진계(進溪) 박재형(朴在馨, 운강고택을 중흥하고 海東續小學 등을 집필한 학자)이 찬술한 봉정고악기(鳳亭古堊記) 현판(懸板)이 걸려있다. ‘봉정고악기’를 발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일족인 재수(在秀, 정우의 맏손자)가 울먹이며 말하기를, “조부 처사공이 60세를 넘긴 나이인데도 슬픔과 고통으로 예법을 넘어서는 시묘살이를 3년 동안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사공의 이러한 행동은 길 가던 사람들이 감탄했고, 마침내 고을과 도내의 선비들이 (나라에) 포상을 청하는 글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여막이 오랜 세월에 기울고 무너졌습니다. (불효한) 나는 그 흔적이 없어지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새로이 단장(중수) 했는데, 옛것에 거듭 붙이기만 하여, 그 모습이 황량하여 몹시 구슬프고 애달픈 마음입니다.” 했다.
내(진계)가 어릴 때 그분(정우)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지냈다. 그때 그분의 기운과 모습이 매우 위엄있고 풍모가 정갈함을 깨달았으나, 식견이 좁았던 어린 내가 처사공께서 존재하고 수양하는 본질을 궁극적으로 탐구하는 것에 대해 직접 논할 수 없었던 것이, 늘 한스럽다. 예기에 이르기를 ‘선조의 아름다움(美德)이 있는데 알지 못하면 밝지(지혜롭지) 못하고, 알고도 선양하지 못하면 어질지 못함이다.’라고 하였다. 재수(在秀)가 오늘 같은 마음을, 오랜 세월 동안 성심성의껏 쌓으면, 그 마음이 밝혀져서 널리 퍼뜨려지는 날이 저절로 있을 것이니. 재수(在秀)는 힘써야 할 것이다.
이상은 봉정고악기의 내용이다. 아무튼 영모재 선대의 그 거룩한 뜻을 이어받은 후손들 중 해상(海相)은 농림부 차관을, 순태(淳台)는 구미시장, 현상(賢相)은 검사, 현미(賢美)는 변호사, 도상(燾相)은 육군대령, 희상(熙相)은 국가정보원 서기관, 영구(榮球)는 공학박사로 대학교수, 효상(孝相)도 공학박사, 영욱(永旭)은 비행기 부품 방산장비 기업체 사장을 맡는 등 각계 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다.
광옥 공의 후손들은 ‘보륜계’를 조직하여 친목을 도모하며 조상을 추모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봉정고악기’ 내용을 한문학자 이정환(李程煥)에게 의뢰하여 번역하고, 영구(공학박사)가 원문과 번역문을 다시 총괄 편집하고, 희상이 가계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보륜계 회장은 순상(舜相)이다. 이날 임호서원 종친회장을 역임한 희상 씨가 재실에 대한 자료를 펼쳐놓고 자세히 설명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