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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66)청도의 유일한 퇴계 제자인 수모재 박적 선생의 위유정(爲有亭)

위유정

 

청도신문(2022년 3월 10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66)

청도의 유일한 퇴계 제자인 수모재 박적 선생의 위유정(爲有亭)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前 교장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水也里) 귀일(歸一) 마을의 위유정(爲有亭)을 찾았다. 이곳은 병재(甁齋) 박하징(朴河澄), 수모재(守慕齋) 박적(朴頔) 두 분 부자(父子)가 여러 군자와 함께 시를 읊고 강론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런데 병재 선생은 ‘명동서사(明洞書社)’ 편에서 이미 소개했기에 이번 회는 수모재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수모재 박적(1507-1595) 선생은 여말 충신인 송은(松隱) 박익(朴翊)의후예로 어려서부터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조부 퇴암(退巖) 박승원(朴承元)과 증(贈)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부친 병재박하징으로부터 가학을 전수 받았고 성장한 뒤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청도지역에서는 유일한 퇴계 제자였던 공은 안동 도산이 5백 여리 떨어져 있는 곳이지만 독실한 학구적 열의로 연마하여 후대가 퇴계 학맥을 가학적 연원으로 계승하게 했다. 퇴계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추모하는 제문에 “퇴계 선생은 온 나라가 높이 사모하니 일월처럼 영원히 밝으리라. 양세에 걸친 학문 어찌 우연이라 하리오. 길은 비록 멀더라도 마음으로 맺기는 문전처럼 여겼네. 아! 그 덕스러운 모습이여, 보이는 곳곳마다 계시는 듯하네. 그 존경스런 유풍은 산처럼 높고 강물처럼 길이 흐르리라.” 했다.

  공은 효심이 지극한 분이었다. 이는 병재공이 돌아가신지 4년 뒤에 묘비를 세울 때 지은 입석축문(立石祝文) 말미에 “대대로 이어지는 충효, 문장과 도덕, 불초한 이 몸이 계승하지 못하였고 이를 돌에 새겼지만 뜻과 공적을 미치지 못하니 눈물이 쏟아지네” 하는 절절한 애도의 추도문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공은 부모님 돌아가신 뒤 전·후 6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러한 효행으로 천거되어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공의 묘소는 조부 박승원의 묘소가 있는 응봉산에 있으며 이현규가 묘갈명을 지었다.

  ‘위유정’은 명동서사 동쪽 연못 안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1948년에 건축했고 그 뒤 1992년 후손들이 힘을 모아 새로 중수했다. ‘爲有亭’이란 이름은 주자의 대표적인 시인 관서유감(觀書有感) 위유원두활수래爲有原頭活水來 - 끝없이 샘물이 솟아 그렇다 에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연못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두어 무(畝)의 땅에 연못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대대로 내려오는 별업(別業)’이란 기록이 있고 청도문헌고에도 ‘명동제(明洞堤)는 둘레가 890자, 깊이가 4자이다. 못 가운데 누석대(累石臺)가 있으며 그 위에는 병재공의 수구제(守口齋)가 있었다.’고 했다. 이러한 못이 있었기에 병재공이 지내리(池內里)에서 출생했다고 했던 것 같다.

  수야리가 밀성 박씨 집성촌이 된 것은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를 역임했던 소고공(嘯皐公) 박건(朴乾, 수모재의 증조부)이 조선 세종 때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철성(金哲誠)의 사위가 되어 밀양 부북면 사포에서 이주하면서 비롯되었으며 충절의 정신이 이어졌다. 그래서 안동 국학진흥원이 주관한 소고공파 문중전의 제목도 ‘수야곡에 흐르는 충절의 마음’이었다.

 

‘수모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어버이 그리며 무릎이 닳았고

스승을 사모하여 도산 길이 닳았던

위대한 참 선비의 도, 유림의 으뜸이라.

 

위유정 중건 기념비
2015년 안동 국학진흥원에서 밀성박씨 소고공파 문중전이 열렸다

 

안동, 국학진흥원 주관 청도 밀성 박씨'소고공파 문중전 개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