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63)
나라 위한 올곧은 선비의 기상이 이어진 이탕(李宕) 선생의 납청재(納淸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前 교장
청도군 청도읍 거연리 단산 마을, 오례산성을 뒤로 하고 청도천 맑은 물이 굽어도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납청재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납청헌(納淸軒 이탕(李宕) 선생이다. 공의 조부는 고성 이씨 입청도조인 모헌공 이육이며 아버지는 공조참판을 지낸 이교(李郊)이나 출계(出系)하여 숙부인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 이추(李鄒)의 대를 이었다. 벼슬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만년을 납청재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교육한 올곧은 선비였다. 재사 앞 강변에는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공의 맏아들인 이렴(李濂, 1563∼?)은 임진왜란 때 창의를 한 고성 이씨 5의사 중 한 분이다.
이 의사는 자태가 출중하고 덕량과 재능이 탁월하여 주위에서 마땅히 벼슬에 나아가 경륜을 펼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심신을 닦으며 학문에 몰두할 뿐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있었는데 임란이 일어나 왜적이 침입하자 친가로는 숙부인 이경(李磬)과 재종 형제인 이해(李海), 이잠(李潛), 이철(李澈)과 더불어 창의를 논의했다. 그리고 아버지 납청헌을 만나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창의를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난 뒤 허락을 얻어 바로 충의공 곽재우 장군의 진영으로 가서 화왕산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렇게 큰 공을 세웠음에도 전쟁이 끝난 뒤에는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할 뿐 지난날의 공로를 말하지 않으니 향리 사람들이 그의 높은 인격을 크게 칭송하였다. 선략장군용양위부사과(宣略將軍龍驤衛副司果)가 제수 되었지만 물러났으며, 나아가도 물러나도 큰 걱정이다[進退亦憂]라고 크게 써서 좌우명으로 삼았다.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상(瑺)과 현(玹)은 어모장군(禦侮將軍), 환(環)과 무(珷)는 가선대부(嘉善大夫)이고 또 부(玞)가 있다.
또 납청헌의 후예로 독립운동가인 이승옥(李承玉)과 이만희(李晩羲)가 있다.
이승옥(1900∼1983)은 거연리 단산 마을에서 출생했다. 1919년 4월 20일 거연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1921년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부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태극기를 만들어 경부선 철로 변에 높이 달아 독립 의지를 고취시키는 등 시위를 벌이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1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에도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전개했고 또 자신의 토지를 처분한 금액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만희(1900∼1954) 역시 거연리 단산 마을에서 출생했으며 이승옥, 성상영(成祥永) 최갑수(崔甲壽), 최주식(崔周軾) 등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여 철로 변에 세우고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징역 10개월에 처해졌다.
이 재사는 1690년에 창건했다.
‘납청헌’이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숭고한 애국 정신 대대로 이어져
임란에는 창의로 일제 때는 독립투사
납청재 붉은 맥박은 오늘도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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