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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60)문학과 도행에 모범을 보인 농암(聾巖) 박란(朴鸞) 선생의 중산재(中山齋)

중산재
청도신문(2021년 21월 8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60)

문학과 도행에 모범을 보인 농암(聾巖) 박란(朴鸞) 선생의 중산재(中山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청도문인협회 회장

 

  청도군 이서면 칠곡리에 위치한 중산재를 찾았다. 이곳에 배향하는 분은 농암(聾巖) 박란(朴鸞, 14941557) 선생이다. 공은 두촌 박양무(杜村 朴揚茂) 5세손이고 호재(湖齋) 박맹문(朴孟文)의 둘째 아들이다. 1534(중종 29)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진사를 지냈으나 그 당시 당론(黨論)으로 분규가 있을 것을 알고 벼슬길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남명(南冥) 조식(曺植) 양 선생의 문에 종유(從遊)하며 학문을 익혀 역경(易經)에 밝았다.

  1541(중종 36) 청도의 향로당(鄕老堂)을 중수할 때 우리 고을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명성이 높고 문무재예(文武才藝)의 인사가 끊어지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향소가 누추하여 부끄러웠는데 이번에 향민들이 한마음으로 새로 짓게 되었으니 이제 건설한 뜻을 받들어야 한다. 맑게 수양하면 휼륭한 선비가 될 것이고 힘을 쓰지 않으면 더러운 소인이 될 것이니 우리 선비가 어찌 소홀히 하리오 라는 내용으로 향로당기문(鄕老堂記文)”을 지었으며, 곁들여 향헌(鄕憲) 10조와 향규(鄕規) 5조를 정하여 향청을 통한 향촌 지자체 확립과 세속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향로당(鄕老堂)은 향사당(鄕射堂)이라고도 했으며 원래 성 밖 동북쪽 모퉁이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그러나 향로당기문, 향헌, 향규는 소실되지 않고 청도향교(淸道鄕校) 지인재에 걸려있다.

  공은 제자들을 길러내며 칠곡리 오수곡 정사와 농암대(聾巖臺)를 거닐며 문학과 도행에 모범을 보였다. 신촌리 훈령서원 숭절사(崇節祠)에 향사되고 있다.

  공의 아들인 묵재(默齋) 박광생(朴光生)과 인재(忍齋) 박광형(朴光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학문에 매진했으며 인재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에 종유(從遊)하였으며 진사(進士)이다. 손자 모와(慕窩) 박상(朴詳)은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부모를 낮 동안에는 업고 산에 피신시키고 밤에는 집으로 모시고 돌아와 전란을 무사히 넘기게 한 효자이다.

증손 수헌(守軒) 박희장(朴希章)은 통훈대부통례원좌통례(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이다. 7세손 오수당(吾守堂) 박윤(朴潤)은 오수정을 지었고 태극논기질성설(太極論氣質性說)’,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훈자사칙(訓子四則)‘ 등을 지은 큰 학자이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인촌(仁村) 우재악(禹載岳) 등과 도의상교(道義相交)하였으며 공을 기리는 향도사림수계(鄕道士林修稧)가 있다. 12세손 묵와(默窩) 박용수(朴龍琇)는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문에 수업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만오(晩悟) 박용한(朴龍漢)은 만구 이종기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문에 종유하였다.

  중산재는 1930년에 창건했으며 목조와가 정면5칸이다. 대청에 12세손 박용운(朴龍雲)이 지은 ‘중산재기’, 이상학(李相學)이 짓고 방후손(傍後孫) 박희명(朴熙明)이 글씨를 쓴 ‘중산재 상량문’이 대청에 걸려 있다.

 

‘농암’이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벼슬길 마다하고 향리에 은거하며

향로당 기문 짓고 향헌 향규 만들어

고을을 바로 세운 공 오래오래 추모하리

 

향로당 기문
농암

 

오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