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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59)각남면 예리 가례마을의 경덕재(景德齋)와 효열각(孝烈閣)

경덕재
청도신문(2021년 11월 24일)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59)

각남면 예리 가례마을의 경덕재(景德齋)와 효열각(孝烈閣)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청도문협 회장

                      

각남면 예리리(가례마을) 소재 경덕재(景德齋)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인물은 이문(李璊)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자는 계지(桂之)이다. 용헌(容軒) 이원(李原)의 후예이며 모헌(慕軒) 이육(李育)의 5대손으로 증직(贈職)은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이다. 공은 유호동(柳湖洞)에 거주하다가 늑평동(勒坪洞)에 잠시 머물었으며 그 뒤 각남 구곡(九谷) 마을에 택거하였다.

공의 3남인 이광일(李光一)은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으며 7대손 만송(晩松) 이영선(李榮善)은 학행이 높았다.

이 재사는 1960년대 초에 신축했으며 5칸 팔작지붕의 재사인데 2012년경에 중수했다. 인암(忍庵) 박효수(朴孝秀)가 쓴 ‘경덕재 상량문’ 및 순재(醇齋) 김재화(金在華)가 쓴 ‘경덕재기’가 걸려있다.

마을 입구에 공의 5대손인 이택준(李宅俊, 1793∼1815)과 그의 처 현풍 곽씨(玄風郭氏)를 기리는 효열각(孝烈閣)이 있다.

효성이 뛰어난 이택준은 부모님 돌아가신 뒤, 큰 하천을 건너 멀리 떨어진 묘소를 매일 찾아가 애통하며 극진히 성묘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은 큰 비로 하천에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게 되자 애절하게 통곡을 하니, 물길 가운데가 끊겨 하천을 건너 성묘할 수 있었다. 이는 이택준의 효성에 하늘이 감복한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이런 효행이 1822년(순조 22) 3월 11일 예조에서 수합한 충·효·열의 초계(抄啓) 중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 결과 다음 달인 윤 3월에 효행이 정식으로 인정되어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贈童蒙敎官 朝奉大夫)를 증직(贈職)하는 교지를 받게 되었다.

이택준의 처 현풍 곽씨도 열녀로 추숭 받았다. 현풍 곽씨는 이택준이 1815년(순조15) 세상을 떠나자 상례에 정성을 다하고 난 뒤 비통함을 참지 못해 상복을 벗자 바로 지아비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이 또한 조정에 알려져 남편 이택준과 더불어 1822년 예조 초계의 ‘열녀 정려질(烈女旌閭秩)’에 포함되었으며, 이택준이 조봉대부로 증직될 때 영인(令人)으로 증직하는 교지를 받았다. 문무관 4품에 오른 남편들의 작호는 봉정대부(奉正大夫), 조산대부(朝散大夫), 진위장군(振威將軍), 정략장군(定略將軍) 등으로 나누어졌으나, 부인들은 통틀어 영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1832년 편찬된 『경상도 읍지(慶尙道邑誌)』 청도군 편의 ‘열부’ 조에 영인으로 증직된 현풍 곽씨가 누락이 되는 일이 생기자 1832년과 1834년 이택준의 동생 이택락(李宅洛) 등이 청도 군수와 경상도 관찰사에게 탄원서인 상서를 올렸다. 현재 이택준 부부에게 내린 교지 2편과 상서 4편, 합 6편의 고문서가 보존되고 있다.

이 효열각은 강판 기와 뱃집이며 정면에 문이 있으며 목재 울타리를 둘렀다. 조선 철종 때 구곡리에 세웠으나 40여 년 전 현재의 위치로 옮겨 후손들이 받들고 있다.

 

‘귀감’이란 시제로 받들어 올렸다.

 

남편은 조봉대부 아내는 영인이라

하늘도 감동한 효자와 열녀 가문

천세에 귀감이어라 받들어 기립니다.

 

효열각

 

효열각 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