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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57)동암(東巖) 예덕흥(芮德興) 선생의 장구지소(杖屨之所)이었던 지양재(芝陽齋)

지양재

 

청도신문(2021년 10월 21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57)

동암(東巖) 예덕흥(芮德興) 선생의 장구지소(杖屨之所)이었던 지양재(芝陽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청도문인협회 회장

 

청도군 매전면 지전리 지소(紙所)마을에 있는 지양재(芝陽齋)를 찾았다. 앞에는 동창천이 흐르고 서쪽에는 오리산, 남쪽에는 종주산이 바라보이는 곳이다.

이곳의 배향인물은 동암(東巖) 예덕흥(芮德興, 1716〜1787) 선생이다. 공은 의흥예씨(義興芮氏) 20세이며 자는 만원(萬源) 호는 동암이다. 공의 선대는 고려 인종조에 문장훈업(文章勳業)으로 부계군(缶溪君)에 봉해진 예낙전(芮樂全, 一世), 강원, 전라 관찰사 형조참판 한성부윤을 지낸 예승석(承錫), 경주부윤(慶州府尹) 대사성(大司成) 유담(柳潭) 충년(忠年) 어모장군 예극양(克讓)이다. 어모공이 충청도 면천(沔川)에서 청도 대전에 새 터를 잡아 옮겨왔고 동암은 지소의 동쪽 마을인 내동으로 옮겼다가 다시 지소에 시거(始居)하게 되었다.

공은 이곳으로 옮겨온 뒤 동리 앞 냇가 주변에 흩어져 있는 수석의 미에 심취하고 또한 서(書)와 농(農)을 낙으로 여겨 청빈하게 살면서 자손들이 오래 이어나갈 터전을 구축하였다. 공은 항상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공(功)을 다투지 않는 것처럼 늘 화합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라”고 자손들에게 교육을 했다.

공의 아들 몽운(夢雲) 예창윤(芮昌胤)은 성리학을 탐구하고 효행과 우애가 돈독하였다. 현손인 수호(壽湖) 예국언(芮國彦)은 중용과 대학을 만독(萬讀)한 큰 학자였고 역시 현손인 예문주(芮文周)는 통정대부(通政大夫)였다. 5세손 농속(聾俗) 예태붕(芮泰鵬)은 문중화합의 좌수(座首)였고 6세손 지강(芝岡) 예종해(芮宗海)는 퇴계학파(退溪學派)의 학맥을 수학한 것이 유학연원록(儒學淵源錄)에 수록되어 있고 마을 앞 풍호대(風乎臺) 바위에 시를 새겼다. 8세손 간송(澗松) 예영희(芮永熙)는 면의회 의장을 역임했고 역시 8세손인 제헌(霽軒) 예달희(芮達熙)는 청도향교 전교를 역임했으며 9세손인 예규대(芮圭大)는 청도군의회 의장을 지냈다.

지양재는 원래 동암공이 학문을 닦고 시유하던 장구지소(杖屨之所)이었는데 공이 졸한 200년 뒤인 1942년에 창건했다. 팔작지붕에 목조 4칸 전퇴이다. 1961년에 지은 솟을 대문이 정면에 있고 3칸 하당은 좌측에 있다. 예대주(芮大周)가 근찬한 ‘지양재 상량문’, 이현규(李玄圭)가 지은 ‘지양재기’, 예상해(芮祥海), 예병기(芮秉起)의 시가 마루에 걸려 있다. 2001년에는 본당 중수를 했으며 2014년에는 하당의 번와 2017년에는 전체 도색을 새로 했다.

지양재는 그 동안 여러 용도로 활용되었는데 재실 본연의 역할인 종사와 일가친척의 제반사를 논의하고 찾아오는 유림을 접빈하는 이외에도 매전초등학교에서 분교된 중남초등학교의 본교사가 지어질 때까지 임시 교사로 사용된 적이 있고, 경찰 파견 중남지부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또 마을 앞 다리에 차가 전복했을 때 40 여명 부상자의 치료 장소로 활용되었고 어느 은행이 피난을 가던 중 강에 차가 추락하여 물에 빠진 돈을 재실 마당에서 말린 일도 있었으며 그 외 각종 투표소, 예방접종, 학생들의 공부방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지전리’라는 시제로 글을 올렸다

 

우뚝 선 지양재 가슴 열고 보듬으니

물소리 고운 마을 햇살도 따뜻한데

선대의 큰 가르침이 메아리로 일어선다

 

솟을 대문

 

풍호대 시비
지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