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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56)학행과 기개가 높았던 용산재 이기(李夔) 선생의 용산재(龍山齋)

용산재
청도신문(2021년 10월 6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56)

학행과 기개가 높았던 용산재 이기(李夔) 선생의 용산재(龍山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청도문인협회 회장

 

  청도군 매전면 하평리 몬담마을 동리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용산재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인물은 용산재(龍山齋)이기(李夔)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고성이며 또다른 호는 취선(醉仙)이다. 공의 선대는 조선 세종 때 우의정(右議政)에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고 조정에 출입한지 20여년에 9년간 수상직을 맡았던 용헌(容軒) 이원(李原)과 고성이씨 청도 입향조인 모헌(慕軒) 이육(李育)이다.

  공은 도학자인 박즙송(朴揖松)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행과 기개가 높았으며 항상 평정심을 잃지 않고 깨끗하게 살았으며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간옹(澗翁) 조선일(曺善一), 사와(土窩) 정주면(鄭周寃)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시를 주고받으며 도의로써 깊이 교류했다.또한 공의 고매한 인품을 흠모하여 찾아온 제자들도 많았다. 공은 이처럼 생전에도 존경하여 우러러 받드는 이가 많았지만 사후에도 사당에 추모의 발길이 이어져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렸다. 그때 상향축문(常享祝文)에 “바르고 굳은 모습으로 소박하게 살아가면서 선비로서 향기를 품어 감화시켰네. 빼어나게 높은 덕 백세(百世) 무궁하니 오랫동안 받들어 모실 향기 남았네.” 했다.

  금파(錦坡) 이정병(李鼎秉)이 찬(撰)한 용산재 이기 묘갈명(龍山齋李夔墓碣銘)에 “스스로 자신을 취선(醉仙), 성민(醒民) 처사라 하셨도다. 세속을피하여 산과 못으로 둘러싸인 깊숙한 곳에 은거하며 유학의 본성(本性)을 지키면서 사셨도다. 뒤에 사가(史家)들이 그 자취를 표장(標章)하리라. 나는 공의 그 삶을 돌에 새겨 기리어 전하리라.” 했다.

  공의 아들은 봉암(蜂巖) 이찬(李纘)이다. 집안의 가풍을 이어 지식과 학문이 해박하여 유림에서 명망이 있었다. 항상 몸가짐을 삼가하고 조심하였으며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였고, 평소에 학문과 행실이 매우 깊이가 있어 문하에 드나들던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분들이 사후에 기록을 남겼다.

  현손은 은와(隱窩) 이연묵(李淵黙)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겨우 말을 배울 때쯤에 벌써 한 번 들으면 곧 근본을 터득하였다.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도 시끄럽게 떠든 적이 없었으며, 남달리 일찍부터 어른스런 태도가 있었다. 임천에서 늙어 생애를 마칠 때까지 경전과 예를 강조하였고 사림의 중망이 있어 향당의 모범이 되었다. 유고가 있다.

  용산재는 1910년에 창건했으며 1928년에 중건하고 2003년경에 번와를 하는 등 중수를 했다.

  재사는 1미터 정도의 축대를 조성한 터에 푸른 대나무를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재실은 팔작지붕 청기와 5칸 전퇴이며 그 이외에 관리사, 대문 등 3동이 분동되어 있다.

  대청벽에 조긍섭(曹兢燮)이 찬한 ‘용산재 중건기(龍山齋重建記)’, 5세손 이영선(李永善)이 근서한 ‘용산재 상량문(龍山齋 上樑文)’ 6세손 이정보(李庭輔) 등이 지은 ‘선재중건유감(先齋重建有感)’이 4편 걸려있다. 또 ‘모은정사(慕隱精舍)’ 현판이 좌측 방문 위에 걸려 있는데 이 ‘모은정사’에서 ‘몬담’이란 동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모은’을 줄이면 ‘몬’이 되고 ‘담’은 마을이란 뜻이니 ‘모은정사가 있는 마을’이란 뜻이 되는 것이다.

 

‘용산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깊숙한 곳 나무라도 바람이 먼저 알 듯

흠모한 사림들 익히 알고 찾았는데

생전에 글 읽던 등불 사후엔 향불되다

 

몬담 마을의 유래가 된 모은정사
용산재 전경